옐친의 미국인 환심 사기
  • 워싱턴 · 이석열 특파원 ()
  • 승인 1992.07.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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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 3분의 2 감축 · “미군 포로 생존” ··· 2백억 달러 經援 기대한 포석



 러시아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국빈대접을 받으며 미국을 방문한 보리스 옐친은 두가지 일로 미국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첫째는 부시 행정부가 기대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폭으로 전술핵무기를 삭감하겠다고 나선 점이고 두 번째는 과거 여러차례에 걸친 전쟁 때 실종된 것으로 보도된 미군들이 러시아 어딘가에 살아 있다는 증거를 갖고 있다고 밝힌 것이다.

 전술핵무기 감축에 대해 옐친과 부시는 현재 두나라가 보유한 장거리 핵유도탄을 3분의 1인 3천개 선으로 대폭 줄이고 러시아의 多彈頭 대륙간유도탄 SS-18 · SS-24와 미국의 MX · 미니트맨을 모두 없애기로 첫날 회담에서 합의했다. 이것은 작년 부시와 고르바초프가 만났을 때 미국과 소련이 전술핵무기를 각각 6천5백개로 줄이기로 약속했던 것보다 두배 이상 많은 규모이다. 더욱이 다탄두 유도탄을 한꺼번에 다 없애기로 한 합의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두사람이 서명한 전술핵무기 감축 합의문서는 미국 상원과 러시아 의회가 각각 승인하면 발효된다. 합의문서에 따르면 서기 2003년까지 미국은 전술핵무기를 3천5백개로, 러시아는 3천개로 줄이도록 돼있다. 또한 그때까지 러시아는 지하발사대를 이용한 다탄두 대륙간유도탄을 모두 폐기하며 미국은 잠수함 발사용 핵유도탄을 현재의 절반 이하인 1천7백50개로 줄여한 한다.

 

핵무기 폐기비용을 러시아 재정문제와 연결

 다탄두 핵무기의 전면 철폐는 과거 1972년 이후 미-소 간에 이뤄진 몇 단계 군축협상에서 가장 큰 걸림돌이 돼왔음을 감안할 때 극적인 타결로 평가된다. 옐친 대통령은 워싱턴을 방문하기 1주일 전만 하더라도 모스크바에서 러시아 군부 지도자들을 모아놓고 지하발사대를 이용한 다탄두 유도탄을 제거하라는 미국 요구는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고 공언했을 뿐만 아니라 전술핵무기 감축협상에서 부시 대통령이 미국에 유리한 입장만을 고집한다고 비난했다.

 옐친 대통령이 왜 태도를 갑자기 바꿨는지에 대해 미 대통령 공보비서는 “모스크바에서는 청중이 군인들이었고 워싱턴에서는 정치인들이기 때문”이라고 엉뚱한 설명을 했다. 그러나 워싱턴 관측통들은 옐친이 미국으로부터 적어도 2백억달러에 이르는 ‘경제원조’를 기대해 미국 조야의 환심을 사려한 것 같다고 풀이한다. 옐친은 이런 대폭감축에 대해 “전무후무한 일로 아무도 미리 생각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자화자찬을 했다. 그러면서 그는 핵무기를  폐기하는 데 드는 비용만 아니라면 더 많이 없앨 수도 있다고 넌지시 재정문제와 연결시켰다.

 러시아에 미군 포로가 생존해 있다는 옐친의 주장도 큰 파문을 불러 일으켰다. 미군 포로가 외국땅에 아직도 볼모로 잡혀있다는 것은 정치적으로 매우 민감한 문제이다. 더욱이 대통령 선거기간 중에 있는 부시 대통령에게는 조금도 이로울 게 없는 악재로 볼 수 있다. 더구나 무소속으로 대통령 출마를 굳힌 로스 페로가 월남전쟁 때 행방불명된 미군 가운데 아직도 살아있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니까 정부가 이를 철저히 추적해봐야 한다고 여러번 물고늘어진 일도 있다. 옐친의 주장이 나오자 군인 가족은 물론 많은 시민들이 미국 정부가 태만하기 짝이 없었다고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 문제는 지금 의회가 독자적으로 생존자를 찾고 있는중이어서 러시아에서 미군 생존자가 발견되어 송환될 경우 부시 행정부의 입장은 더욱 난처해질 수 있다. 미군 월남전 실종자가족연합회 돌로레스 알폰드 회장은 “바로 이런 사실 때문에 우리가 지금까지 투쟁해오고 있는 것 아니냐”고 반문하고 “이제사 살아 돌아올 우리 남편과 자식들의 눈망울을 똑똑히 볼 수 있게 됐다”고 흥분했다.

 미국 정부는 지금까지 한국전쟁에서 약 8천명, 월남전쟁에서 2천2백66명의 행방불명자가 생겼다고 발표했다. 제2차세계대전 때 행방불명된 미군은 7만8천명 쯤 된다고 하니까 모두 8만8천여명이나 되는 셈이다. 여기에 냉정 기간에 소련 영공을 첩보비행하다 격추당해 생포된 미군 조종사가 12명 있고 이들 대부분이 강제수용소나 정신병동에 수용돼 있다고 한다. 옐친 대통령은 옛 소련 공산당 비밀문서와 KGB 보관 서류를 찾아본 결과 한국전쟁과 월남전쟁,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해 약 2천8백명의 미국 시민이 소련에 억류돼 있었다는 기록을 찾아냈다고 말했다.

 

러시아의 미군 포로, 부시 再選에 큰 짐

 미군 행방불명자가 러시아에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옐친 대통령이 처음으로 밝힌 것은 워싱턴으로 오는 비행기 안에서 가진 NBC 기자와의 회견에서였다. 이 뉴스가 전해지자 다들 어리둥절했다. 백악관에서는 회견 때 통역 잘못으로 와전된 것이 아니냐 하는 해석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옐친은 부시와의 정상회담에서 또다시 이 사실을 밝혔고, 다음날 가진 미 의회 합동회의 초청 연설에서도 “실종 미군이 한사람이라도 러시아에 있다면 찾아내어 가족 품에 안기게 하는 것이 나의 결심”이라고 거듭 강조하여 공연히 한 말이 아님을 입증했다. 부시 대통령은 옐친과 회담한 뒤 “처음으로 옐친 대통령이 실종 미군에 대해 러시아가 어떤 정보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밝혔다”고 말하고 “미군 포로나 실종자를 찾아낼 때까지 그가 최선을 다할 생각을 분명히 했다”고 덧붙였다. 부시 대통령은 미군을 찾아내기 위해 전 소련대사였던 말큼 툰을 특사로 즉각 모스크바에 보내겠다고 말했다.

 옐친은 실종 미군 문제를 그의 워싱턴 방문과 때를 맞추어 미국 사람들에게 화해의 메시지로 거론했을 가능성이 많다. 그러나 이 문제로 워싱턴 정가는 한동안 시끄러울 것이다. 가뜩이나 힘겨운 선거를 치르느라 탈진상태인 부시 대통령에게는 더욱 어깨를 짓누르는 짐이 될지도 모른다.

 미국과 러시아는 서로를 말살할 수 있는 핵무기를 필요 이상 많이 보유한 야생 ‘곰’과 ‘독수리’이다. 이빨 몇개 빼고 발톱 몇개 잘라낸다해서 두 맹수가 갑자기 순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곰과 독수리가 평화롭게 공존하기를 바란다. 옐친의 워싱턴 방문은 이런 점에서 좋은 출발로 봐줄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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