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리우드 영화엔 ‘과학’이 있다
  • 송 준 기자 ()
  • 승인 2006.05.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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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는 자기혁신.체계적 공식 등 배울 만


 아카데미상의 메카 할리우드를 흔히 ‘꿈의 공장’이라고 일컫는다. 이 ‘공장’은 미국 시장만을 상대하지 않는다. 전세계 영화 관객의 70~80%가 ‘메이드 인 할리우드’ 필름에 열렬한 반응을 보인다. 한국 관객도 예외일 수 없다.

 지난 12월5일 개봉한 <보디가드>는 서울에서만 1백만명 흥행을 기록했다. 입장 인원 60만명(전국) 정도면 “터졌다”는 환호가 이는 한국 영화의 실정에 견주어, 이 할리우드 영화의 흥행은 ‘메가 히트’로 간주된다. 지난 87년 미국 영화 직배를 허용한 뒤로 상위 2백개 흥행 작품 가운데 1백 13편이, 또 20위 이내 작품 가운데 16편이 할리우드 영화였다.

 도대체 할리우드 영화가 이처럼 관객을 강력히 유인하는 요인은 무엇일까. 또 할리우드의특징을 한국 영화에 도입해 영상문화 발전의 계기로 삼을 수는 없을까.

 최근의 메가 히트작 <보디가드>에도 그 해답이 있다. 이 영화는 , 한 프로페셔널 보디가드(케빈 코스트너)가 최고 팝스타(휘트니 휴스턴)을 광적인 팬의 살인 위협으로부터 구해내는 이야기를 평이한 구성으로 그린 것이다.

 <보디가드>는 관객을 지루하게 만들지 않는 적당히 재미있는 오락 영화이다. 그러나 이 영화 속에는 할리우드 영화의 제작 소프트웨어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시작 5분 만에 관객을 사로잡아라”

 할리우드 영화의 핵심은 비현실적인(또는 비일상적인) 이야기를 그럴 듯하게 현실화하는 기술이 있다. 할리우드 80년 역사는 거의 이 ‘포장술’을 모색하는 데 바쳐졌다. 이렇게 얻어진 비결은 몇가지 공식으로 굳어져버렸다.

 영화학자들이 정리한 할리우드 영화 공식은 이렇다. 첫째, 주인공을 영웅화하는 것이다.주인공이 악당이든 정의의 사자이든 간에 카메라는 조명.음향.특수효과를 총동원하여 그를 영웅으로 그려낸다. 이때 주인공과 그 상대역은 ‘선과 악의 이분법’에 의해 뚜렷이 구분된다. 이 선.악 대립구도의 조절을 통해 갈등과 긴장을 유지하면서 필름은 영화공식의 백미인 해피엔딩, 또는 권선징악의 결말을 향해 속도감 있게 돌아간다.

 그런데 이것만 가지고는 90분~1백20분에 이르는 장면을 충실히 채우기 어렵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할리우드는 한편의 영화에 2~3개의 줄거리를 혼합하는 방식을 채용한다. 그리고 이같은 요소들은 더욱 박진감있게 엮기 위해 관객의 심리를 분석했다.“그결과, ‘영화 시작 5분 안에 관객을 사로잡아라’라는 계명이 생겨났다”고 이효인씨(영화평론가)는 설명했다. 실제로는 영상미로든, 첨단 과학으로든 할리우드 영화는 도입 부분에서 뭔가를 보여준다.

 발단 단계에서 일단 시선을 사로잡았더라도 그 다음에 관객에게 지루함을 주면 영화는 실패한다. 이 문제는 ‘무브먼트(토막 이야기나 사건)’란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해결했다. 즉 전체 영화를 40개의 무브먼트(발단 10,전개 20,결말 10)로 구성하는 것이다. 이때 각 무브먼트는 3분을 넘지 않는다. 관객이 영화적 환상에서 벗어나기 전에 다음 무브먼트로 하여금 새로운 흥미를 유발하토록 하는 전략이다.

 흥미 유발을 위한 안전장치의 마지막 단계는 ‘데드라인’이다. 무브먼트를 평이하게 전개하는 것이 아니라, 곳곳에 긴박감.위기.감동.전율.공포(영화 성격에 따라) 등의 강도를 한껏 끌어올리는 긴장 국면을 마련하는 것이다. 이같은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도입.결말.반전 따위의 부분별 시나리오만 전담하는 작가팀마저 생겨났다.

 이상의 공식은 영화의 성격에 따라 좀더 구체적으로 체계화된다. 예컨대 미스터리극이나 멜로물의 경우는 감동과 긴장을 고조시키기 위해 치밀한 복선을 마련하지만, 액션물이나 공포 영화에서는 충격 효과를 높이기 위해 오히려 복선을 없애버린다.

관객 기호 파악하는 데 전력 기울여

 영화 성격에 맞춰 서로 다른 요소를 가감하기 위해서는 먼저 세심하게 영화의 장르를 구분해야 한다. 그 결과 서부극.애정물.미스터리.활극.뮤지컬. 공상과학 등으로 장르가 확연히 분류되었고, 이로 인해 미국 영화는 흔히 ‘장르 영화’라고 불린다. 장르 영화라는 호칭은 마치 ‘붕어빵’을 찍어내듯이 영화를 미리 규정한 각 장르의 틀에 짜맞춰 제작한다는 데 대한 비아냥을 담고 있지만, 이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섯는 할리우드의 철학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처음 영화를 발명했을 때 유럽은 이를 새로운 예술 표현매체로 받아들인 반면 미국은 획기적인 레크레이션 상품으로서의 가능성에 주목했다. 그런데 위험부담률이 높은 영화산업이 대량생산을 골간으로 하는 미국식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뿌리를 내리는 데에는 풀어야 할 문제가 적지 않았다. 서부극에서 공상과학영화에 이르기까지 할리우드가 기울여 온 모든 노력은 바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들은 소비자, 즉 관객의 기호를 파악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할리우드는 전문화.세분화.표준화 작업에 들어갔다. 제작 각 분야의 전문가를 키워 스태프를 구성하는 등 일련의 전문화 작업을 한 끝에 마침내 미국 대중문화의 꽃인 ‘스타 시스템’을 만들어낸다. 연기 전문가인 스타는 흥행 실패를 어느 정도 막아주는 안전판 역할을 동시에 맡고 있다.

 또 여러 업무 분야를 특화하는 세분화 작업은 영화의 장르 구분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세분한 장르마다 ‘영화 공식’을 적용하는 표준화 작업이 뒤를 이었다. 대중의 기호와 반응을 분석해 새 영화 제작에 반영한 것이다.장르 영화는 이렇게 얻어진 규격화된 영화 형식이며, 거개의 할리우드 영화는 이 틀을 좀체로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 반복형 제작 방식은 매너리즘과 거리가 멀다. 반복하되 새로운 표현을 담는다.새로운 시도는 끊임없이 더 나은 영상기법을 창출해 왔지만, 시대 상황에 따라 조금씩 변해가는 대중의 기호를 지나치게 앞질러가지 않았다.

 반복과 변형을 거치면서 장르 영화가 발전해온 한켠에서, 벌써 오래 전부터 할리우드9영화 혹은 영화산업)을 연구.분석하는 작업이 활발히 이루어져왔다. 프랑스를 주축으로 한 이 연구들은 주로 비판적 입장에 섰다.

 기 엔느벨은 <할리우드 영화의 아편>이란 논문을 통해 매우 구체적으로 할리우드 영화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한다. 이 논문에 따르면, 할리우드 영화는 기계화된 창조성이 낳은 ‘현실 위에 분 바르기’이다. 이 영화들은 역사를 위조(인디언 학살. 흑인 매매 등을 왜곡 해석하거나 조장)하고, 사회구조적 문제를 개인 차원으로 돌리면, ‘아메리칸 드림’같은 미국의 정신과 문화.이데올로기 등을 수출하는 구실을 맡기도 한다. 이밖에도 할리우드 영화는 남성숭배.인종적 편견.폭력 면역화 같은 역기능을 보인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할리우드에 대한 분석은 <할리우드>(제3문학사)와 <할리우드 스튜디어 시스템>(예건사) 등 여러 편의 책과 논문이 나와 있다. 이 연구자들은 대체로 할리우드 영화와 영화산업을 비판적 시각에서 정리한 것들이다. 그러나 프랑스 등의 할리우드 연구와 비판이 자국 영화의 발전을 위한 이론적.실용적 토대가 되고 있는 반면, 우리의 경우 영화제작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실용적 연구는 전혀 없는 형편이다.

 감독이나 영화사.제작자 등도 할리우드를 배우려는 움직임이 없기는 매한가지다.한 영화 평론가는 “우리 영화계는 할리우드를 단지 ‘골리앗’으로 바라 볼 뿐 뭔가를 배우려는 적극적인 노력이 없다. 그런 상태의 맹목적 비난은 패배적 냉소주의와 다름없다”라고 질타했다.

 우리가 규모나 기술 수준에서 엄청나게 앞선 할리우드의 체제 자체를 활용할 수는 없다. 그러나 텔레비전.비디오 등의 등장에 맞서 영화를 살리려 애쓴 할리우드의 처절한 자기혁신과, 대중의 정서와 반응을 존중하는 치열한 작업정신은 우리 영화계의 따끔한 일침이 될 듯하다.

 한국 영화의 철학은 무엇인가. 영화인들의 자세는 어떠한가. 우리 영화와 영화현실을 바라보는 눈은 어떤 연구. 분석에 바탕을 두고 있는가. 없다면, 이를 극복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가. 김지석씨(영화평론가)는 이와 관련해 “한국 영화는 무엇보다 철학을 정립하는 일이 시급하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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