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쫑 내려고 냈던 음반이 대박이었다니!”
  • 차형석 기자 (cha@sisapress.com)
  • 승인 2006.06.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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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기념 콘서트 여는 산울림 ‘회고 인터뷰’

 
1977년 어느 날. 세 청년이 데모 테이프를 들고서 서라벌 레코드사를 찾았다. 가수로 데뷔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자비 출반을 마지막으로 ‘음악을 그만하고’ 음반을 찍어 친척들이나 친구들에게 기념품처럼 돌리고 싶어서였다. 그래서 당시 돈 3백만원을 빌려놓은 상태였다. “그런데 다음날, 음반사에서 돈 안 갖고 와도 그냥 찍어주겠다고 연락이 왔어요. 별 희한한 곳이 있네, 어떻게 돈을 안 받고 찍어주나. 그때는 1천장이고, 몇 장이고 음반 찍어서 우리만 주는 줄 알았어. 그런데 그것을 팔더라고.”(김창완) ‘아니 벌써’가 실린 명반 ‘산울림 1집’은 이렇게 태어났다.

‘아니 벌써’ 산울림 결성한 지 30년째라니. 오는 7월5~6일에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산울림 30주년 기념 콘서트를 갖는다. 산울림 팬클럽 ‘개구장이’에서 활동하다가 매니저가 된 지명옥씨와 인터뷰 약속을 잡고 나서 예전 인터뷰 자료를 읽자니 ‘아차’ 싶었다. ‘김창완’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여러 단어 가운데 하나가 ‘술’이었다. 대중음악 평론가 김작가는 김창완씨와 술을 마시며 인터뷰한 얘기를 하면서 “그는 음학적 철학자 같았다”라고 전했다. 게다가 인터뷰 기사를 읽어보면, 때때로 ‘동문서답’처럼 보였다. 맥락이 없어 보이기도 하고, 달리 보면 자유로워 보였다. ‘저녁에 술을 마시면서 인터뷰를 했으면 더 좋았을 텐데(기자)’. 후회했다. 약속 시간은 ‘멀뚱멀뚱하기 딱 좋은’ 오후 2시30분이었다. 어찌 하리.

약속 시간에 맞추어 김창완씨는 매니저와 함께 나타났다(김창훈씨와 김창익씨는 각각 미국과 캐나다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6월말에 공연을 위해 귀국할 예정이다). 드라마에서 자주 보았던 이웃집 아저씨 같은 이미지였다. 음악을 처음 시작했을 무렵부터, 이틀에 걸쳐 해남까지 다녀올 정도로 자전거 마니아가 된 지금까지, 금연에서 음반시장까지 대화는 종횡무진했다.

- 원래 학창 시절부터 연주를 했나?
1971년 대학교 1학년 때. 파고다극장 근처 악기점에서 기타가 눈에 들어오더라. 교본과 기타 하나를 샀다. 그 전에는 기타를 만질지도 몰랐다. 그때 둘째가 고1인가 중3이었고, 막내가 중2 정도였다. 그 기타가 팔자를 바꿀지 누가 알았나?
음악 교육을 따로 받은 것은 없다. 둘째(김창훈)도 중학교 2학년부터 오선지를 그렸다. 기보법은 학교에서 배운 것이 다였다. 

- 한 산울림 팬은 ‘산울림 이전에 산울림 없고, 산울림 이후에 산울림 없다’라고 했다. 음악의 장르 폭도 넓고, 한국 대중음악에서 비슷한 음악 경향을 찾기 힘들다는 말이었다. 주로 들으며 영향을 받은 음악이 있었나?
전혀. 그전에는 고3이니까. 고3수험생인데. 그 전에 들은 음악이 없으니까, 괴상한 노래가 나오지. 기타를 만진 그 날부터 곡을 만든다고 께적였으니까. 아마 그 전에 음악을 많이 들었다면 나름대로 선입견이 생겼을 거다.

- 학창시절, 라디오에서 ‘아니 벌써’를 듣고 깜짝 놀랐다. 그 이전까지 들었던 가요와는 달랐다 (윤무영 사진기자)
그 전 가요들은 뭐랄까, 어떤 정형성이 있었다. 노래는 이래야 한다는 강박과 감상주의가 있었다. 우리는 보다 세밀하게 묘사해보자고 가사를 쓰다 보니, 파격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그 전에는 가요하면 어른들이 듣는 노래였다. 청소년이나 대학생은 팝이나 클래식을 들었고. 산울림 노래가 등장하면서 젊은 층에서도 가요가 유행하게 되었다. 산울림이 가요계 중심축을 옮기는 데 한몫했다고 본다.

- 데뷔하던 1977년에 둘째 김창훈씨가 작사·작곡한 ‘나 어떡해’가 대학가요제 대상을 받고, 그리고 산울림 1집이 출반되었는데.
대학가요제에 우리는 팀 이름은 ‘무이(無異)’였다. ‘다름이 없습니다’는 뜻이었다. 우리는 ‘문 좀 열어줘’로 출전을 했고, 둘째(김창훈)는 샌드페블즈 멤버로 활동하던 둘째는 ‘나 어떡해’ 곡을 샌드페블즈에게 연습시켰다. 샌드페블즈는 주축이 2학년이다. 3학년이 되면 한 명이 매니저를 봐주는 것이 전통이었는데, 둘째가 매니저 역을 했다. 둘째는 무이 베이시스트로 대학가요제에 참가하기도 했고. 

방송사 관계자에게 들으니, 예심에서는 ‘문 좀 열어줘’가 1위, ‘나 어떡해’가 2위였다. 상금이 솔찮잔아요.(웃음) 야, 우리가 다 먹었다 그랬는데, 그런데 그때 요강에 대학 졸업생이 있으면 안 된다는 규정 때문에 ‘무이’는 자진 탈락했다. 우리 곡이 대중적으로 인기가 있을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얻기는 했다.

음반낼 때, 우리는 대뷔한다고 음반을 낸 것이 아니다. 대학가요제 이후에 이제 상도 탔으니 음악을 그만두자고 했다. 둘째도 대학교 4학년이 될 때였으니까. 친구들과 친척들에게 나누어주려고. 자비 출반하려고 당시 돈 3백만원을 빌렸다. 그런데 레코드 사에 전화를 했더니 그런 것을 안 한다고 했다. 여기저기 전화를 돌려보았는데, 음반사는 왜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지. 집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 서라벌 레코드사였다. 가서 데모 테이프를 주고, 이거 몇 백장만 찍어달라고 했다. 그 다음 날 돈 안 갖고 와도 찍어주겠다고 연락이 온 것이다.

음악을 그만두는 기념으로 만들려다가 나온 앨범이 첫 음반이었다. 그런데 버스 탔는데, 라디오에서 노래가 나오고, 신문 4단 만화에 ‘아니 벌써’가 나오고 보름새 난리가 났다. 우리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방송사에서도 오라고 하고. 처음에는 마이크만 봐도 덜덜 떨리는데. 그게 데뷔더라고(웃음).

- 그럼 그때 다른 곡들도 거의 완성이 되어 있었나?
2집 곡까지는 거의 다 곡이 완성되어 있는 상태였다.

 
- 데뷔 음반은 약 40만장 정도 나갔나?
사실 집계가 잘 안되었다. 세금 때문에 신고가 잘 안 됐으니까. 추산으로 40만장을 잡는데, 그보다는 더 많이 나갔을 것이다. 산울림이 낸 음반 가운데 아홉 장은 밀리언셀러라고 봐야 한다.

- 그럼 그때 음반 안 냈으면?
신문사나 은행이나 전공 제한 없는 곳을 알아보고 있었다. 친구들 중에 은행으로 간 친구가 많다. 은행 시험이 있었는데, 레코딩 날짜와 겹쳤다. 은행 시험은 내년에도 있고, 이거는 평생 한번 해보는 일인데, 이것(녹음)을 하자. 그 이후로는 시험을 봐본 일이 없다.

- 당시 산울림 음악에 대한 반응은?
괴로워했다. 어른들은 특히. 젊은 층과 편이 갈렸다. 우리 노래는 어른들에게는 노래가 아니었다. 실질적 음악적 평가를 받는 데는 10년이 걸렸던 것 같다.
3형제가 활동을 함께 한 것은 고작 2년 반 뿐이다. 나머지는 여진이다. 그런데 그 그룹이 30년 동안 영향력을 갖고 있다는 것은 히트곡을 보유하고 있다기보다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산울림 음악은 문화 충격이었다고 본다.

- ‘내 마음의 주단을 깔고’ 같은 노래는 전주만 해도 3분이 넘으니 놀랐겠다.
방송사에서 틀기 어렵다고 하소연을 하기는 했다. 한 방송에서 새 음반 소개한다고 생방송으로 마지막 곡으로 그 노래를 틀었다. 뉴스 앞두고 3분 동안. 전주만 나가고 잘렸다.

- 티켓링크 예매율을 보니, 40대가 절반을 차지하지만 20대와 30대도 많더라. 세대별로 산울림을 어떻게 받아들이는 것 같은가?
이런 생각이 든다. 40대들에게 산울림의 음악은 추억이고. 동시대인의 노래이니까 수용하는 것 같고. 20대는 클래식으로 들어주는 것 같고. 30대에게는 하나의 동기가 되는 것 같다. 일종의 모티베이션이 되는 음악.  우리가 음악을 처음 시작할 때는 지금 30대 같은 사람들을 원했다. 음악적 평가를 제대로 내리는 사람은 지금 30대들 같다. 한 장르를 형성한 음악으로 인정했다는 생각이 든다.

- 산울림의 가사는 독특하다. 혹시 문학에 관심이 있었나?
문학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 가사를 먼저 쓰나? 아니면 곡을 먼저 쓰나?  
나는 가사를 먼저 쓴다. 원래 가사가 갖고 있는 운율이 태생적으로 있는 것 같다. 가요라면, 가사를 먼저 쓰는 것이 옳다. ‘아니 벌써’라는 뉘앙스가 운율이 있지 않나. 그 운율에서 잠재적 선율을 끄집어 낸 것이니까.
요즘은 음악이 가사를, 멜로디를 전달하기 위해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도 있던데. 나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멜로디를 빌려온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가사 먼저 쓴다.

- 연기는 어떻게 하게 되었나?
연기는 감독이 하라고 하니까 한다. 왜 하라고 했냐, 1985년부터 1995년까지 드라마 음악을 맹렬하게 했다. 정말 많이 했다. 황인뢰 감독이 처음으로 드라마를 하라고 권했다. 그 다음부터 감독들이 하라고 해서.

- 가수로, 연기자로, DJ로, 광고 모델로 활동한다. 어떤 일은 해야겠다, 혹은 하지 말아야겠다는 강박 같은 것이 없어 보인다.
맞다. 나는, 이거는 꼭 해야 되는 일, 해서는 안 될 일을 어떻게 구분해야 할지 모른다.  다른 사람들은 이 일은 해야 할 일, 저 일은 안 해야 할 일로 정해야 할 것 아니냐고 하는데, 나는 ‘일을 순서대로 한다’. 드라마이든, 광고이든 순서가 되면. 들어오는 순서대로 시간되는 대로 한다. 모든 것에 선입견을 갖고 판단하려는 것은 스스로 안 한다. 나 자신을 놓고도 마찬가지다. 나는 이런 사람이어야지 하는 강박이 없다. 그런 강박에 시달릴 일도 없다. 그게 일견 사람들에게 자유로워 보이는 지도 모르겠는데. 비결은 그거 하나다.

사람들이 나를 자유스럽게 보는데, 나는 틀에 짜여 있는 것을 좋아한다. 의외로. 생각만 자유롭다 뿐이지. 여행도 싫어한다. 여행을 좋아하고, 시간을 고무줄처럼 쓸 것처럼 생각들 하는데, 안 그렇다. 나는 매일 짜인 생활이 불편하지 않다. 오히려 그렇지 않은 날이 혼란스럽다. 일상은 그냥 A4 용지 같은 거다. 그냥 규격품. 그게 지루하지 않다. 

- 쓴 책을 보니까, 누군가 ‘천진한 페시미스트’라고 표현했던데?
나는 뼛속까지 비관주의자라는 말을 많이 했다. 그런데 지난해부터 생활 태도나 세상 보기가 많이 바뀌었다. 그전에는 비관주의자라고 말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주저한다. 이유는 모르겠다. 특별한 계기라면, 모르겠다. 아마 취미 생활이 바뀌면서인 것 같고. 자전거를 계속 탔다. 친구가 바뀌고 그들에게 좋은 영향을 받는 것 같다.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 긍정적 사고를 하는 친구들이다. 굉장히 경쾌하고, 프라우드도 있고. 나도 긍정적으로 변하는 것 같더라. 자신감도 생기고. 50년 우울을 벗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30년 동안 담배를 피웠는데, 이제는 다른 사람들에게 금연하기를 권한다. 금연 부적 만들어서 방송국에서 나누어준다. 담배 끊으면 삶의 질이 달라진다.

술도 부어라 마셔라, 30년 동안 해보았는데, 술을 끊는 것도 좋다. 어제는 술을 붓듯이 마셨지만. 술을 끊으니까 술이 더 소중해.

아까 보니까, 기자가 담배 피던데, 내가 담배 끊는 법 가르쳐줄까? 금연은 물리적으로 물이 많이 필요하고, 심리적으로는 위로가 필요해. 자신과 주변 다른 사람이 많이 위로해줘야 해.  

- (기자가 우물쭈물하며) 꼭 담배를 공공의 적처럼 보네요 .
담배는 공공의 적이야. 살다보면 스트레스를 받고, 괴롭고. 술 먹고 담배 피면 더 비관주의자가 될까, 해피해질까. 비관주의자가 되지. 술 먹고 담배 안 피면 해피해지지. 해피해지면 좋아. 해피해지는 것을 싫어하나.
사람이 묘한 마법을 건다. 술이나 중독되게 만드는 것들이 묘한 환상을 불러 일으키는데, 마치 센치한 것으로 좋아하는 것처럼 만든다. 글루미한 마음 상태라는 것을 즐기기에 좋은 심리상태인 것처럼 걔네(담배)들이 포장한다니까. 걔네들이 아주 악마적이야. 술을 끊으려니까 술이 귓속에다 ‘니가 원하는 것이 뭐냐? 도대체’ 이렇게 묘한 질문을 던진다니까. 사람 헷갈리게. 아주 교활한 계책을 쓰는 거야. 담배도 그렇고.

(중간에 그가 속한 자전거 동호회장에게서 이번주 토요일에 정선으로 자전거 여행을 가자는 문자 메시지가 날아왔다. 다음은 김창완씨가 전화로 하는 말들. “대장님. 토요일에 간다고요? 저는 토요일에 안 되는데, 그날 스위스 전이라고 생방송을 한데요. 아, 이거 어쩌지. 네, 네, 네. 거기 비포장이니까 엠티비 가져가야 하는데...방송이요? 방송은 11시에 끝나죠. 출발은 어디서 하죠? 네,네,네. 아 그럼 나는 바이크 끌고 가야겠다. 11시에 끝나고, 오토바이로. 자전거는 버스에다 싫어놓고. 그리고 일요일날 자전거 타고, 그리고 오토바이 타고 오고. 오 굿, 아이디어” 자전거와 오토바이에 대해 통화하는 그의 표정이 반짝거렸다)

- 자전거에 정말 관심이 많은 것 같다.
나에게 날씨는 두 가지다. 자전거를 탈 수 있는 날과 자전거 타기에 그지 같은 날. 사람도 두 가지에요. 자전거 타는 사람과 나쁜 사람(웃음). 심플하지.
(이때 기자가 동석한 윤무영 사진기자가 거의 ‘라이더’ 수준으로 오토바이를 탄다고 하자, 김창완씨가 오토바이 타는 방법에 대해 윤기자에게 물어보기 시작했다. 할리, 지에스, 린인, 린아우트 등 생소한 단어들이 오고갔다. 인터뷰가 동에 갔다, 서에 갔다 오는 듯 했다. 오토바이 탄 것처럼. 두 사람 사이에 대화가 오갈 때 기자는 ‘저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에요, 가끔 자전거 탄다’고 살짝, 끼어들었다)

- 요즘 다른 음악은 많이 듣나?
안 듣는다. 나는 보는 것, 듣는 것이 없다. 유일한 것은 책. 거의 책만 본다. 듣는 것, 보는 것에 익숙하지 않다. 우리 집에서는 애가 어릴 적에 텔레비전을 없앴다. (-연기 모니터링은?)  연기 모니터링도 안 하고. 라디오도 없고. 저는 아무 것도 안 한다. 신문도 안 보고. 매체 그쪽은 거의, 관심도 없다. 세상 따라잡기를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른다. 세상 돌아가는 일도 잘 모르고. 스위스전이 토요일에 있다는 것도 오늘 방송 때문에 알았다.

한 마디로 인형의 집이다. 내 안에 갇혀 사는 거. 사람들이 김창완류의 사고방식이나, 김창완류의 말 같은 것이 진력날 만도 한데,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있다.

- 1997년에 13집을 냈는데, 14집은 안 내요?
14집은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모르겠다. 지금 음악시장 환경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것 같기도 하고. 음반이 그전에는 소장 가치로 구입했는데, 지금은 그런 것 같지도 않고. 내용도 달라진 것 같고. 솔직히 무엇을 담아야 할지 모르겠다. 지금 사람들이 음반을 어떻게 사는지도 모르는 것 같고. 시장 변화에 우리가 적응을 못하고 있다. 신보를 내도 어떤 식으로 어떻게 팔아야 할지. 신곡 발표도 몇 차례 했고, 곡은 다 만들어져 있다. 그것을 소비자에게 어떻게 전달해야 할지 고민이에요.

- 본인이 특별히 아끼는 곡을 꼽으라면?
어떤 곡이 좋으냐면, 나도 어떻게 만들었는지 모르는 곡이 있다. 본인도 모르는 곡. 그냥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 같은 곡이 있다. ‘청춘’, ‘아마 늦은 여름이었을거야’, ‘아니 벌써’,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 ‘너의 의미’, ‘그대 떠나는 날 비가 오는가’, ‘창문 너머 어렴풋이’, 도대체 어떻게 그런 멜로디를 떠올렸을까, 그거 언제 만들어진 거지, 생각해보면 나도 모른다. 다른 것들은 내 심리적인 뭐랄까, 의도나 이런 것이 내가 파악하고 있는 것, 내가 인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나온 곡들은 하나의 일기 같고. 그 당시에 심리적 상태나 내가 쓰고자 했던 것이 선명하기 때문에 그런 것들은, 액자가 요란한 그림 같은 느낌이 있다. 앞에서 말한 곡은 도대체 프레임은 있는 것인지, 청춘 같은 것은 애기 돌날에 만든 것은 아는데, 누가 탁 써놓고, 간 것 같다. 불과 몇 분 안에 완성이 되는데, 최근에 ‘나쁜 남자’를 좋아하는데, 그것도 가사 쓰고 곡 붙이는데, 몇 분이나 걸렸을까, 몇 분이 안 걸렸다. 그런 것은 내가 받은 선물 같다.

- 그런데 산울림이라는 이름은 누가 지었나?
서라벌 레코드 사장이다. 그때는 어떻게 이름을 짓겠다, 이런 생각이 없었다.

- 이름을 그렇게 지었다니, 허무하지 않나?
그렇게 허무해다, 우리가. 아까 말한 것처럼 우리는 굉장히 허무하게 시작했다(웃음).

인터뷰를 마칠 즈음에 동호회장인지 다른 누구에게서인지 전화가 걸려왔다. 김창완씨는 사진기자에게 “사진 찍는 데 얼마나 걸리냐”라고 조심스레 물었다. 담쟁이 넝쿨이 널려 있는 담에 기대어 사진 촬영을 했다. 지나가는 차에 탄 40대 여성 운전자와 그 옆에 탄 사람들이 그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도 웃음으로 답했다. 함께 나이 들어가는 ‘음악계의 거장’이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인 듯하다. 사진 촬영 후에 김창완씨는 “아, 이제 오토바이 타러 갈 수 있겠다”라고 ‘아이처럼’ 좋아했다. 나는 여전히 속으로 생각했다. ‘아, 역시 술을 마시면서 인터뷰를 했어야 했는데. 그럼 좀더 재미있는 말을 들었을 것 같은데. 담배 끊어야할 지 어떨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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