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실험 물체는 전술 핵탄두였다?
  • 남문희 전문기자 (bulgot@sisapress.com)
  • 승인 2006.10.16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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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올 초 소형화 기술 확보했을 가 능성…사실이면 미사일 탑재 능력 지녀

 
북한이 아무리 ‘위험한 행동’을 해도  잘 안 믿으려는 풍조가 국내외에 형성되는 듯하다. 7월5일 미사일 발사에 이어 10월9일 핵실험 역시 ‘진실 게임’의 대상이 되었다. 이라크라면 누명을 씌워서라도 때려잡았던 미국이 북한에 대해서는 유난히 ‘관대’하다. 핵 도발이라는 불장난에도 불구하고, CNN 등 언론을 통해 ‘가짜설’을 흘리고 , 정부는 정부대로 설령 ‘진짜라도 인정 못 한다’는 태도다. 그렇다면 유엔 안보리 대북 제재는 무엇을 근거로 추진한 것인지 불분명해진다. 국내 언론들 역시 미국이 끄는 대로 예외 없이 진실 게임에 빠져들었다.

흥미로운 것은 미국 최고의 핵 전문가로 인정받는 지그프리드 헤커 로스앨러모스 국립연구소 명예소장이나 북한 핵 정보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세르게이 이바노프 러시아 부총리 겸 국방장관, 그리고 국내에서도 북핵 전문가로 손꼽히는 인사들은 이런 진실 게임과 일찌감치 거리를 두어왔다는 점이다. 오히려 실험이 성공했고, 경우에 따라 소형 핵탄두 제조 단계의 진입 등 심각한 상황일지도 모른다고 경고했다.

왜 이런 괴리가 생겼을까. 무엇보다 10월9일 핵실험 결과 나타난 핵폭발의 규모가 ‘통상적 수준’에 비해 매우 작았다는 데서 의혹이 제기되어왔다. 통상적 수준이란, 북한의 핵실험이 이번이 처음이라고 가정할 때, 기존 국가들의 그것에 비해 현저히 작았다는 것이다. 즉 기존 핵 보유 국가들의 첫 실험에서는 거의 대부분 10~60kt(킬로톤·1kt은 TNT 1천kg의 폭발력) 규모가 관측되었다. 그런데 북한의 핵실험에서는 나라별 추정치가 달라 정확하게 얼마라고 얘기하기는 힘들지만, 이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작다는 것이다.

우선 러시아의 이바노프 국방장관이 발표한 5~15kt이 그나마 근접한 수준이고, 한국은 1kt, 호주는 0.5kt, 여기에 북측이 핵실험 전 중국에 통보한 수준이라고 워싱턴 포스트가 보도한 4kt 등 제각각이다. 여하튼 기존에 나온 추정치들을 모아보면 대체로 최소 0.5kt에서 최대 5kt 대였다고 추정할 수 있다.

만약 이 실험이 실패가 아니라 성공한 것이라고 할 경우, 이는 북한이 초보적 핵실험을 건너뛰어 핵 기술에서 가장 어렵다는 소형 핵무기 실험을 시도한 것이 되는데, 이것이 말이 되느냐는 얘기다. 만약 핵실험의 폭발력이 1kt 미만일 경우 탄두 중량이 1t 미만이 되기 때문에 지난 7월5일 발사한 대포동 2호에 곧바로 탑재가 가능할 정도의 소형 핵무기라는 얘기가 된다. 이보다 더 소형이라면 중·단거리 미사일 탑재까지 가능하다. 바로 이 점에서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히로시마나 나가사키에 떨어뜨린 리틀보이형 핵무기는 대체로 22kt급으로, 무거워서 미사일 탑재가 불가능해 비행기로 운반해서 떨어뜨려야 한다. 이 정도 기술은 이미 보편화해 있지만, 요즘같이 방공망이 발달한 시대에는 실전에서 사용 불가능한, 소장품에 지나지 않는다.

미사일 탑재가 가능하려면 폭발 출력 1kt(탄두 중량 1t)까지 탄두를 소형화해야 하는데, 이 경우 핵물질을 폭발시키는 주변 장치를 고도로 축소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첨단 제어 기술과 정밀 기술이 있어야 하고, 적어도 수백 번의 핵실험을 통해 시행착오를 거쳐야 가능하다. 이제 겨우 ‘처음’ 핵실험에 발을 디딘 북한이 이런 소형화 기술을 획득했다고 누군들 주장할 수 있겠는가.

동북아 미군기지 겨냥한 반격 전략 세워

그러나 가설은 어디까지나 가설일 뿐이다. 그렇지 않아도 비밀이 많은 국제 사회에서 북한이 핵 실험 처녀지라고 하는 가설은 얼마나 사실에 가까울까. 북한 핵실험이 반드시 북한의 지하 동굴에서만 이루어지라는 법은 또 어디 있는가. 일반적으로 첫 핵실험에서 소형화 기술까지 나아가는 데 약 10년이 걸린다고 하는데, 만약에 북한의 첫 핵실험이 지금으로부터 약 8년 전 다른 방식으로 이미 이루어졌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최근 국내의 언론 보도를 들여다보면 북한의 핵 개발사 내막을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는 전문가들은 말을 아끼거나 ‘핵실험이 어쨌거나 실패는 아니다’라는 식의 묘한 태도를 취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북한이 이미 8년 전인 지난 1998년에 비록 간접 방식이기는 하나 첫 실험을 했고, 그 실험 결과를 토대로 그 이후 핵 능력을 꾸준히 축적해왔다는 사실을 그들이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 8년 전의 핵실험이 바로 1998년 5월28일 파키스탄의 핵실험이다. 당시 이 실험은 파키스탄의 핵과학자인 칸 박사의 주전공인 농축 우라늄 방식이 아니라 플루토늄 방식이어서 미국 정보기관의 주목을 끌었다. 결과적으로는 북한이 노동 미사일 기술을 파키스탄에 제공하는 대신 파키스탄이 북한을 대신해 핵실험을 해준 것으로 파악되었고, 국제 사회에 이미 이 내용은 상식처럼 떠돌았다. 핵실험 한 달 전인 1998년 4월 파키스탄이 북한 노동 미사일의 복사판인 가우리 미사일 시험 발사에 성공한 바 있는데, 이것이 바로 북한과 파키스탄 간 핵·미사일 커넥션의 존재를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결국 미국 정보기관이나 북핵 전문가들이 파악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북한은 이미 첫 핵실험 이후 8년간 기술을 축적했고, 반면에 그동안 확보한 플루토늄의 양에도 한계가 있는 처지에서 막대한 양의 플루토늄이 필요한 초보적 수준의 실험을 구태여 해야 할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굳이 한다면 그것을 뛰어넘는 좀더 구체적인 목적의 실험을 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무엇보다 북한이 이번 핵실험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게 무엇인가. 북한 사정을 잘 아는 국내의 대북 소식통들은 북한의 핵 개발은 공격용 핵무기 확보를 위한 것 보다는 상대의 공격을 저지하기 위한 방어용 전술핵 무기 확보에 초점이 맞춰진 것이라고 주장해왔다. 즉 부시 행정부 출범 이후 등장한 미국의 선제 핵공격 전략을 저지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것이다. 북한은 기존의 재래식 군사 전략으로는 부시의 선제 핵공격에 대응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통감하고, 그 이후 미사일과 핵탄두를 결합해 이를 저지 또는 반격하기 위한 전략으로 군사 전략의 교리를 바꿔왔다고 한다.

이를 위해 북한은 지난 2004년 북한 군내  각 부대에 흩어져 있던 미사일 부대를 하나로 통폐합해 미사일지도총국을 신설했다. 미사일지도총국은 북한 인민군 평양방위사령부 직속의 군단급 부대로 그 산하에 프로그/KN-2 2~3개 여단, 스커드 BC 2~3개 여단 노동 미사일 2~3개 여단, 대포동 미사일 2~3개 대대, 신형 중거리 탄도 미사일 1~2개 대대 등이 소속되어 있다. 북한이 지난해부터 부쩍 미사일 훈련을 빈번하게 실시했고, 급기야 지난 7월5일 단거리·중거리·장거리 미사일을 동시에 발사하는 대규모 실험에 나선 것도 바로 이 미사일지도총국의 유사시 지휘통제 능력을 점검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국제문제조사연구소 조성렬 박사 자료).

“네오콘이 기술 발전시킬 시간 벌어줬다”

미사일은 사실 운반체에 불과하다. 따라서 선제 핵공격에 맞서는 반격 전략이 완성되려면 미사일 능력만 가지고는 안 된다. 바로 그 미사일에 올려놓을 전술 핵탄두가 확보되지 않는다면 무용지물이다. 일본 방위청 소식통이 일본 언론에 흘린 바에 따르면, 지난 7월5일 발사한 북한의 단거리 및 중거리 미사일이 러시아 앞 동해상 ‘수km 반경’에 떨어졌다고 하는데, 만약 통상 탄두를 장착한 미시일이라면 군사적 효용이 매우 떨어진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전술 핵탄두를 장착했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일반적으로 미국 항공모함 전대의 경우 보통 4km 반경 내에 12척의 전함이  같이 움직이는데 이 반경 안에 통상 탄두가 아닌 전술 핵탄두가 떨어지면 매우 심각한 상황이 전개될 수밖에 없다.

북한의 반격 전략은 미국 항공모함과 더불어 유사시 미국의 대북 공격 거점인 동북아 주둔 미군기지 네 군데를 주요 타깃으로 하고 있다. 동북아 주둔 미군 주력군이 위치한 괌과, 해병대가 주둔한 오키나와, 그리고 해군 부대가 위치한 도쿄 만의 요코스카 해군기지, 통신부대가 위치한 삿포로의 통신기지 등이다. 유사시 동해상으로 접근하는 항공모함과 이들 네 군데의 핵심 기지를 전술 핵무기로 강타할 능력을 확보하는 게 바로 부시 정부의 선제 핵공격 전략에 맞서는 북한의 억지 전략의 핵심이다.

북한의 변화된 군사 교리의 관점에서 볼 때, 지난 7월5일 미사일 발사에 이어 핵실험이 감행되었다면, 그 핵실험이 추구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더 이상 말을 할 필요가 없다. 미사일을 주고받는 실전을 염두에 두면서 비행기로나 운반이; 가능한 구식 핵무기 실험을, 그것도 전세계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데 버젓이 감행할 리는 없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이 핵실험을 했다면 그것은 바로 실전 배치가 가능한 전술 핵무기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한 실험이었다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기서 또다시 의문에 부딪힌다. 북한이 아무리 1차 핵실험을 비록 간접적이기는 하지만 8년 전에 실시해, 상당한 수준의 핵기술 능력을 축적했다고 해도, 그것이 곧 소형화 기술 확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미국이나 옛 소련도 수없이 많은 핵실험 끝에 겨우 도달할 수 있었던 단계이다.

정확하게는 지난해 9월, 그러니까 9·19 공동성명을 전후한 시기까지만 해도 북한의 핵 과학자들은 여전히 이같은 고민에 쌓여 있었다. 즉 당시까지만 해도 소형화 기술로 나아가기 위한 기술적 장벽을 넘어서지 못했던 것이다. 당시 북측 인사들을 접했던 국내의 대북 소식통들이 전한 바에 따르면 “대외적으로는 핵무기를 가지고 있다고 발표했지만 내부적으로는 아직 미사일 탑재까지는 가지 못했다. 다시 말해 무기화가 불가능한 수준이었다”고 한다. 당시만 해도 여전히 재래식 수준이었다는 얘기다. 따라서 “지난해 9월만 해도 핵실험을 하고 싶어도 창피해서 할 수 없었던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북한 처지에서는 다행스럽게도 부시 행정부의 강경파들이 시간을 벌어주었다. 9·19 공동성명 직후 곧바로 대북 금융 제재를 단행해 협상 이 중단되어 버린 것이다. “김정일 위원장은 사실 미국이 생존과 존엄을 보장하면 굳이 핵무기를 가질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었다. 만약 9·19 이후 협상이 순조롭게 진행됐다면 핵무기 소형화와는 다른 선택을 했을 수도 있다”라고 당시의 정황을 잘 아는 소식통은 밝혔다. 그러나 네오콘을 중심으로 한 미국 강경파의 금융 제재가 김위원장의 퇴로를 차단하는 식으로 파고들어 오면서 이제는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핵무기 소형화 기술 확보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남측의 대북 소식통들이 북측 인사들의 태도 변화를 감지하기 시작한 것은 지난 6월께였다. 갑자기 태도에 자신감이 넘쳤다. 뭔가 확실히 손에 쥐었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행동이었다. 대체로 올 4월에서 6월 사이에는 북한이 소형화 기술을 확보한 것으로 국내의 극소수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반면 워싱턴의 한 전문가는 “지난해까지만 해도 미국 정보기관이 북한의 핵능력에 대해 의구심을 나타냈으나, 올해 초부터 그런 얘기가 사라졌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어쨌거나 북한이 소형화 기술을 손에 넣은 것은 비교적 최근이라는 것이다.  북한이 지난 7월5일 전격적으로 미사일 실험을 단행할 수 있었던 것도 김정일 위원장이 나름으로 확신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냐는 얘기가 나오기도 했다. 아무리 김위원장이 대담한 사람이라도 뭔가 믿는 구석이 없이 국가의 운명을 거는 도박을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북한이 미사일 발사를 단행한 직후 미국 정보기관 들이 총력을 기울인 것도 역시 북한의 탄두 소형화기술 확보였다. 정보기관의 총수인 네그로폰테 국가정보국장이 미사일 발사 직후인 7월11일 ‘북한 미사일 능력도 염려스럽지만 핵탄두 탑재 능력 때문에 더욱 심각한 상황’이라고 말한 데서도 그들의 관심사가 뭔지 잘 드러난다. 또한 지난 8월 중순 워싱턴 타임스가 운영하는 외교안보 전문 인터넷 주간 매체인 <인사이트>는 미국 정보당국 소식통의 말을 인용해 북한이 이미 미국의 핵 공격에도 살아남아 동북아 주둔 미군기지와 미국 서부 일부에까지 핵 보복을 단행할 수 있는 2격 능력을 확보한 것으로 정보 당국이 보고 있다고 전하기도 했다.

이런 많은 사실들이 있음에도 미국 언론들이 북의 핵실험 내용을 폄하고 부시 행정부는 아예 인정을 못하겠다는 식으로 나오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간단하다. 북한의 핵 능력을 인정하는 순간 그 책임이 바로 부시 행정부 내의 강경파들에게 있다는 점이 분명해지기 때문이다. 이미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인 니컬러스 크리스토프 씨가 ‘북한의 플루토늄은 모두 클린턴 행정부 시절이 아닌 부시 행정부 들어 확보한 것’이라며 부시 정권이야말로 북한의 핵무장화에 책임이 있다는 점을 지적했지만, 문제는 그보다도 훨씬 극명하다.

최소한 지난해 9·19 공동성명 시점까지 핵무기 소형화 기술을 확보하지 못했던 북한이, 미국 강경파들이 시간을 벌어준 덕택에 곧바로 핵탄두 소형화 기술을 확보하는 위험한 상황에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지게 되면, 당장 코앞에 닥친 11월 중간선거에서 책임론이 확대될 것은 뻔한 이치다. 아마도 이라크 전쟁 실패에 버금가는 외교 스캔들이 벌어질 지도 모를 일이다. 따라서 미국 언론을 동원한 어설픈 진실 덮기가 대대적으로 펼쳐지고, 국내 언론은 늘 그랬던 대로 그 뒤를 쫓아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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