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 흘리고 빼내고… 살벌한 ‘핵 핑퐁 게임’
  • 문정우 대기자 (mjw21@sisapress.com)
  • 승인 2006.10.16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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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폭에서 전술핵까지, 지구촌 핵무기 개발사

 
북한의 핵실험은 많은 논란을 빚고 있다. 일부에서는 아예 핵폭탄이 아니라 고성능 폭탄을 터뜨리고 허풍을 떠는 것 같다며 형편없이 폄훼하는가 하면, 한편에서는 핵무기를 소형화·경량화할 정도로 기술이 세련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이같은 논란을 이해하려면 세계 핵무기 개발사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핵무기 개발은 단계별로 이루어진다. 핵분열 폭탄(원자폭탄)의 연구와 실험에 이은 실전 배치, 핵융합 폭탄(수소폭탄)의 연구와 실험에 이은 실전 배치가 순서대로 진행된다. 이 과정에서 핵폭탄을 실어 나를 수 있는 운반체를 만들어야 핵무기 체계가 완성된다. 핵무기 운반체로는 전폭기, 잠수함, 탄도 미사일 등을 들 수 있다. 운반체에 실어 장거리를 이동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려면 핵폭탄의 무게와 부피를 최대한 줄여야 한다.
현재 수소폭탄의 실전 배치 단계까지 모두 끝내 국제적으로 핵병기 보유국으로 공인받은 나라는 미국·영국·프랑스·러시아·중국 5개국이다. 모두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이기도 하다. 이들 중 가장 마지막으로 프랑스가 1968년 핵융합 폭탄 실험에 성공한 이후 이들 5개국에 의한 핵병기 독점은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

미국은 1945년 영국과 공동으로 맨해튼 계획을 추진해, 그해 7월 뉴멕시코 주의 사막에서 세계 최초로 원폭 실험에 성공했다. 옛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 중 미국의 맨해튼 계획에 스며들어 정보를 수집한 뒤 핵분열 폭탄 개발에 박차를 가해 미국이 실험한 4년 뒤인 1949년 실험에 성공했다. 처음 소련은 핵실험 사실을 비밀에 부쳐 미국은 방사성 낙진 샘플을 수집한 후에야 소련의 원폭 실험 성공 사실을 알아냈다. 적어도 10~20년간은 핵을 독점하고 전세계를 호령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던 미국은 충격을 받고 핵융합 폭탄 개발에 열을 올려 원폭 실험을 한 지 7년 만인 1952년 수폭 실험에 성공했다. 하지만 미국과 소련의 기술 격차는 더욱 좁혀져 소련은 그로부터 1년 뒤인 1953년 수폭 실험 사실을 전세계에 알렸다.

미국의 핵 개발에 협력했던 영국은 미국이 핵무기를 독점해버리자 불만을 품고 미국과 협력하는 과정에서 습득한 기술을 밑천으로 독자적으로 개발에 착수했다. 1952년 세계에서 세 번째로 핵분열 폭탄 실험에 성공하고, 5년 뒤인 1957년에는 수폭 실험까지 마쳤다. 미국은 서유럽 각국에 미국의 핵우산 아래 있는 데 만족하고 핵 개발을 하지 말라고 종용해왔으나 이에 반기를 든 나라가 프랑스였다. 프랑스는 ‘미국이 워싱턴이 위험해지는 걸 감수하면서도 파리를 지키기 위해 핵 보복을 할 수 있을 것인가’에 의문을 품고 독자 개발을 시작했다. 프랑스는 1960년 원폭, 1968년 수폭 실험을 마쳤다. 한국과 일본을 포함한 미국의 핵우산 아래 있는 많은 나라도 프랑스와 같은 의문을 항상 품고 있었으며, 북한의 핵실험으로 그 의심은 더욱 짙어질 것이다.

중국은 소련으로부터 핵기술을 넘겨받을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으나 국익은 이념보다 진했다. 중국이 초강대국으로 커 나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소련이 1959년 핵기술 협정을 파기했던 것이다. 중국은 이때부터 ‘바지는 못 입더라도 원폭은 만들라’는 마오쩌둥의 지시에 따라 물불을 안 가리고 미국과 소련에서 핵기술 정보를 빼가기 시작한다. 중국의 스파이 활동에 흥분한 소련과 미국이 한때 손을 잡고 중국을 응징할 계획을 논의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중국은 1964년 원폭 실험에 성공한 뒤, 불과 3년 만인 1967년 프랑스를 앞질러 수폭 실험을 마쳤다. 백인·기독교 국가의 핵 독점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중국이 핵실험에 성공했다는 뉴스를 접한 일본의 정치인들이 공포에 떨기는커녕 환호작약했다는 사실은 핵 무기가 얼마나 미묘한 물건인가 하는 것을 잘 말해준다.

1965년부터 국제 사회는 핵확산 금지를 위한 논의를 시작했다. 1967년 핵확산방지조약(NPT) 초안이 마련됐으며, 1968년부터 세계 각국이 서명을 했다. 하지만 기왕에 핵을 갖고 있던 5개국 밖으로 더 이상 핵을 확산해서는 안 된다는 국제 사회의 다짐은 금세 빛이 바랬다. 인도가 1974년, 파키스탄이 1998년 공식적으로 핵실험 성공을 발표했으며, 이스라엘을 비롯한 많은 나라들이 핵무기를 보유 중이거나 핵기술을 개발하고 있는 것으로 의심을 받고 있다.

1963년 부분적핵실험금지조약(PTBT)이 발효되어 지표나 공중에서의 핵실험이 금지된 이후 핵무기 보유 여부를 가리는 일은 매우 불투명해졌다. 지하 핵실험을 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구구한 억측이 뒤따르기 마련이었다.

‘미국→인도’ ‘중국→파키스탄’ 기술 이전

인도는 1974년 핵실험 사실을 발표하면서 핵탄두가 아닌 평화적핵폭발장치(Peaceful Nucler Explosive) 실험이었다고 주장했다. 이 지하 핵실험에는 ‘미소 짓는 부처’라는 얄궂은 코드네임을 붙이기도 했다. 당시에는 폭주 원자로가 아닌가 추측되었지만 지금은 세련되지 못한 핵탄두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실험 이후 인도는 핵은 보유하지 않았지만 언제든 핵무장을 할 수 있는 나라라는 식으로 국제 사회에서 처신하며 핵기술을 발전시키고 핵 운반체인 탄도 미사일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인도의 핵기술은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이 흘려주지 않았는가 하는 의혹이 짙다.

인도는 첫 실험을 한 24년 뒤인 1998년 5월11일과 13일 본격적인 핵탄두 지하 핵실험을 두 차례 했다. 특히 11일의 실험에서는 핵분열탄두에 이중수소와 삼중수소를 불어넣어 핵융합 반응을 일으켜 위력을 키운 흔적이 보였다. 이는 수폭 개발의 전 단계라고 할 수 있다. 현재 앞서간 5개국 외에는 인도의 기술이 가장 높은 단계에 도달한 것으로 추정된다.

인도의 핵실험에 가장 크게 자극을 받은 나라는 파키스탄이었다. 1947년, 1965년, 1970년 세 차례나 인도와 전쟁을 벌인 적이 있는 파키스탄은 핵 개발에 사활을 걸었다. 미국은 1979년에 핵 개발 의혹을 이유로 전투기 수출을 끊고 통상 중단 압력을 넣었지만 파키스탄은 굴하지 않았다. 파키스탄은 처음 플루토늄 재처리 방식을 택했지만 프랑스 등 서방 국가들이 미국의 압력에 굴복해 등을 돌리는 바람에 좌절했다.

이처럼 갈팡질팡하던 파키스탄에 핵기술을 전수한 나라는 중국일 것이라는 의혹이 짙다. 중국이 우라늄 농축 기술을 전수하고 핵탄두를 설계도째로 넘겨주었다는 설도 있다. 미국의 지원을 받아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중국 본토의 태반을 핵공격 사정권에 둔 인도의 발목을 옭아매려는 계산이었다는 것이다. 파키스탄의 기술이 북한까지 흘러간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북한의 핵실험에 대해 미국과 중국이 흥분하는 것은 어처구니없는 일일 수도 있다. 아무튼 파키스탄은 인도가 2차 지하 핵실험을 한 2주일 뒤인 1998년 5월28일 핵실험에 성공했다. 핵 기술이 결국 이슬람 세계로까지 넘어간 것이다. 그런 점에서 국민의 절대 다수가 독실한 이슬람 교도인 파키스탄이 미국의 중동 침략 전초기지 노릇을 자처하는 것은 미국을 비롯한 기독교 국가들의 경계심을 누그러뜨리기 위한 고육책이란 설도 꽤 설득력 있다.

파키스탄의 지하 핵실험에도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다. 파키스탄은 딱딱한 암반에 수백m 길이의 수평 갱도를 파고 핵폭발 장치와 관측 장비를 설치해 실험했다고 주장했다. 또한 첫 회 한 발의 위력만 30~35Kt, 나머지는 모두 위력이 적은 것이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지진파 등으로 서방의 전문가들이 추정한 위력은 강한 것이 8~12Kt 정도였다. 파키스탄의 발표에는 거품이 많았다는 얘기이다.

사실 핵실험을 해서 세계를 놀라게 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라고 한다. 일정량의 핵분열 물질(우라늄 235 혹은 플루토늄 239)을 모으면 손쉽게 핵폭발을 일으킬 수 있다. 무겁든 덩지가 크든 작동이 되든 안 되든 지하 갱도에 밀어넣고 터뜨리면 되는 것이다. 인도가 1974년에 했던 실험이 그런 수준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인도는 그같은 실험을 한 뒤 24년이 지나 제대로 된 실험을 하고나서야 핵 보유국으로 비로소 잠재적으로 인정을 받게 되었다(인도는 지금도 핵무기 보유 사실을 부인하고 있다). 1998년 파키스탄의 핵실험은 1974년 인도의 핵실험보다는 더 진전된 것으로 보인다.

“북한 핵, 파키스탄과 비슷한 수준일 수도”

북한이 이번에 실험한 것으로 알려진 플루토늄 고폭식은 거의 완벽한 구형의 금속 플루토늄에 균질의 폭발 압력을 가해 핵분열을 일으킨다. 이때는 다른 종류 폭약의 조합, 성분의 조정, 정밀한 가공과 조립이 중요한 열쇠이다. 대량의 폭약을 터뜨려야 하기 때문에 실내나 밀폐된 공간에서 실험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따라서 핵 개발 사실은 이 고폭 실험 흔적으로 대개 드러난다. 북한의 영변 원자로 부근에서는 이 고폭 실험에 의해 생긴 분화구가 70여 개 관측된 바 있다. 고폭 실험에 북한이 상당히 힘을 기울였다는 얘기이다.
따라서 북한의 핵 기술 수준은 고폭 기술이 조악했던 1974년 인도의 핵실험보다는 좀더 앞서고, 파키스탄과는 비슷하거나, 1998년의 인도보다는 한참 떨어지는 수준일 것이라고 추정하는 사람들이 많다. 지난번 대포동 2호 발사에서 드러났듯이 핵 운반체 개발 수준도 아직은 주목할 만한 것은 못 된다.

물론 이것은 핵 개발사에 비쳐본 추정일 뿐이다. 북한이 핵 개발의 상식을 뛰어넘는 성과를 거두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북한이 소련 붕괴 당시의 느슨한 틈을 타서 전술핵 무기 제조 기술까지 갖추었다는 정보가 미국 정보 관계자들의 신경을 끊임없이 건드리고 있다.

북한이 1974년 인도의 수준에 머물렀다 해서 폄할 일은 못 된다. 핵 개발사에서 보듯 핵분열 실험을 한 뒤 짧으면 3년, 길면 24년 안에 원폭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위력을 가진 수폭 개발 단계로 들어가는 것이 상례이기 때문이다. 

 
미국
원자폭탄 실험:1945년
수소폭탄 실험:1952년
2차대전 중 영국과 공동으로 핵 개발을 추진해 최초로 실전에 사용. 소련의 추격에 충격을 받아 핵융합 연구로 치달아 수소폭탄 시대도 열어젖혔다.

 
러시아
원폭 실험:1949년
수폭 실험:1953년
2차대전 중 미국과 영국에 스파이를 파견해 핵기술을 수집한 뒤 맹렬히 미국을 추격해 미국에 불과 1년 뒤진 시기에 수폭 실험까지 성공 했다.

 
영국
원폭 실험:1952년
수폭 실험:1957년
미국과 공동으로 핵 개발 계획을 추진했으나 미국이 성과물을 독점하자 불만을 품고 독자적으로 개발하기 시작해 수폭 실험까지 성공적으로 마쳤다.

 
프랑스
원폭 실험:1960년
수폭 실험:1968년
미국이 파리를 핵무기로부터 보호해주지 않을 것이라며 미국의 핵우산 아래 있기를 거부하고 서유럽 국가 중 유일하게 독자적으로 핵무기를 개발했다.

중국
원폭 실험:1964년
수폭 실험:1967년
미국과 소련의 거센 견제를 받으면서도 핵무기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원폭 실험을 한 뒤 다른 보유국 중에서 가장 빠른 3년 만에 수폭 실험에 성공.

 
인도
원폭 실험:1974년
수폭 전 단계 실험:1998년
중국과 종교적 앙숙인 파키스탄을 견제하기 위해 핵무기 개발. 평화적 이용을 명목으로 내세우면서 핵 운반체 개발도 게을리 하지 않는 이중적 전략을 채택.

 
파키스탄
원폭 실험:1998년
20세기 들어 세 차례나 전쟁을 벌인 인도의 원폭 실험에 자극을 받아 국가의 사활을 걸고 핵무기 개발. 미국의 방해와 프랑스의 배신으로 좌절을 맛보았으나 중국의 지원을 받아 원폭 실험 성공.

 
이스라엘
암암리에 미국의 지원을 받았거나, 비밀경찰인 모사드가 다른 나라에서 핵기술을 훔쳐와 미국이나 러시아 못지않은 핵 능력을 갖추었다고 국제 사회에는 널리 알려져 있지만 정작 당사국은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는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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