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연휴 끝나니 볼 영화가 없다는 말이 나온다. 그리 틀린 말도 아니지만 맞는 말도 아니다. 상업성 강한 영화는 없지만, 작품성 있는 영화가 줄지어 개봉하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극장가는 설 연휴 이후부터 4월까지 비수기이다. 대형 스타와 물량 공세를 앞세워 대중을 사로잡을 만한 한국 영화는 개봉을 꺼린다. 할리우드도 5월에 개막할 블록버스터 대전을 앞두고 숨 고르기에 들어가는 시기이다. 오직 완성도에 기댄 알짜만 모이는 시장이기도 하다. 영화광에게 1년 중에 갖은 산해진미를 즐기는 것과 같은 기쁨을 느낄 수 있는 때이다.
올해에도 작지만 단단한 영화가 비수기 극장가를 장식하고 있다. 15편이나 새롭게 쏟아져나온 지난주부터 예사롭지 않은 분위기이다.
현빈이 각기 주연한 <만추>와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가 우선 눈에 띈다. 베를린 국제영화제 포럼 부문과 경쟁 부문에 각기 진출한 두 영화는 섬세한 연출력이 돋보인다. <가족의 탄생>의 김태용 감독과 <멋진 하루>의 이윤기 감독의 재능을 새삼 절감케 하는 수작이다. 현빈의 매력을 뒷받침하는 탕웨이와 임수정의 연기는 역시나 수준급이다.
이순재·윤소정 등 노장의 연기가 빛나는 <그대를 사랑합니다>도 놓치기 아까운 영화이다. 20대 관객 위주로 재편된 국내 영화 시장에서 영화화가 쉽지 않은 ‘실버 로맨스’를 다룬다. 강풀 원작의 동명 만화에 못지않은 감동을 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90년대 개구리 소년 실종 사건을 소재로 삼은 <아이들>(이상 상영 중)도 주목해야 할 영화이다. 휴머니티와 서스펜스를 큰 이물감 없이 접목했다. 한국 영화계의 거목 임권택 감독의 1백1번째 영화인 <달빛 길어올리기>도 3월17일 개봉을 확정 지으며 수작 개봉 릴레이 대열에 합류했다.
<혜화, 동> <파수꾼> 등 잘 만든 독립영화도 ‘눈길’
보석 같은 독립영화도 잇달아 선보인다. 혼전 임신과 이별의 아픔을 지닌 한 젊은 커플의 이야기를 담담한 어조로 그려낸 <혜화, 동>이 2월17일에 테이프를 끊은 데 이어 <파수꾼>이 3월3일 개봉한다. 2월 세계 최대 독립영화 축제인 로테르담 국제영화제에서 최고상인 타이거상을 수상한 <무산일기>는 4월7일 극장을 찾는다. <혜화, 동>과 <파수꾼> <무산일기>는 지난해 부산영화제 상영 뒤 많은 갈채를 받으며 올 독립영화계 기대주로 꼽혔다.
완성도 높은 외화도 요즘 집중 개봉되고 있다. 특히 미국 아카데미 영화상 시상식과 맞물린 탓인지 미국 영화들이 우열을 겨룬다. 아카데미상 효과를 흥행에 끌어들이려는 수입사의 전략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아카데미상 주요 후보작으로는 <127시간>이 지난 2월17일 먼저 포문을 열었다. 당초 2월10일 개봉 예정이었던 이 영화는 제임스 프랭코의 남우주연상 수상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오스카 효과’를 더 보기 위해 개봉을 1주일 미뤘다. 2008년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로 아카데미 작품상을 거머쥔 코엔 형제의 서부극 <더 브레이브>와 나탈리 포트만의 열연이 화제를 모은 <블랙 스완>은 2월24일 나란히 개봉한다. 복싱 세계챔피언을 꿈꾸는 형제의 애증을 그린 <파이터>(3월10일)와 영국 왕의 말더듬 치료를 다룬 <킹스 스피치>(3월17일)도 극장행을 기다리고 있다. 아카데미상은 2월28일 시상식을 갖는다.
미국 영화 외에도 상차림은 풍성하다. <나 없는 내 인생>으로 세계 영화계의 주목을 받은 스페인 여성 감독 이사벨 코이셋의 <센티미엔토: 사랑의 감각>, 이라크 내 쿠르드인의 서글픈 삶을 할머니와 손자의 사연으로 전하는 <바빌론의 아들>(이상 24일), 지난해 일본 영화계 최대 화제작이었던 <고백>(3월) 등이 잇달아 개봉한다.
여느 해보다 우수한 작은 영화가 쏟아지면서 영화사들도 극장 잡기에 비상이 걸렸다. 한 영화사 관계자는 “2월에 개봉할 영화를 3월로 미뤘는데도 아직 개봉일을 잡지 못하고 있다. 좋은 영화들이 많다 보니 극장 잡기 경쟁도 치열한 상태이다”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