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찬 영화’ 쏟아지는데 누가 ‘비수기’라 말하나
  • 라제기│한국일보 문화부 기자 ()
  • 승인 2011.02.21 22:1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만추> <사랑한다…> 등 작품성 있는 영화들 잇달아 개봉

설 연휴 끝나니 볼 영화가 없다는 말이 나온다. 그리 틀린 말도 아니지만 맞는 말도 아니다. 상업성 강한 영화는 없지만, 작품성 있는 영화가 줄지어 개봉하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극장가는 설 연휴 이후부터 4월까지 비수기이다. 대형 스타와 물량 공세를 앞세워 대중을 사로잡을 만한 한국 영화는 개봉을 꺼린다. 할리우드도 5월에 개막할 블록버스터 대전을 앞두고 숨 고르기에 들어가는 시기이다. 오직 완성도에 기댄 알짜만 모이는 시장이기도 하다. 영화광에게 1년 중에 갖은 산해진미를 즐기는 것과 같은 기쁨을 느낄 수 있는 때이다.

올해에도 작지만 단단한 영화가 비수기 극장가를 장식하고 있다. 15편이나 새롭게 쏟아져나온 지난주부터 예사롭지 않은 분위기이다.

현빈이 각기 주연한 <만추>와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가 우선 눈에 띈다. 베를린 국제영화제 포럼 부문과 경쟁 부문에 각기 진출한 두 영화는 섬세한 연출력이 돋보인다. <가족의 탄생>의 김태용 감독과 <멋진 하루>의 이윤기 감독의 재능을 새삼 절감케 하는 수작이다. 현빈의 매력을 뒷받침하는 탕웨이와 임수정의 연기는 역시나 수준급이다.

이순재·윤소정 등 노장의 연기가 빛나는 <그대를 사랑합니다>도 놓치기 아까운 영화이다. 20대 관객 위주로 재편된 국내 영화 시장에서 영화화가 쉽지 않은 ‘실버 로맨스’를 다룬다. 강풀 원작의 동명 만화에 못지않은 감동을 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90년대 개구리 소년 실종 사건을 소재로 삼은 <아이들>(이상 상영 중)도 주목해야 할 영화이다. 휴머니티와 서스펜스를 큰 이물감 없이 접목했다. 한국 영화계의 거목 임권택 감독의 1백1번째 영화인 <달빛 길어올리기>도 3월17일 개봉을 확정 지으며 수작 개봉 릴레이 대열에 합류했다.

▲ ⓒ인디스토리 제공

<혜화, 동> <파수꾼> 등 잘 만든 독립영화도 ‘눈길’

보석 같은 독립영화도 잇달아 선보인다. 혼전 임신과 이별의 아픔을 지닌 한 젊은 커플의 이야기를 담담한 어조로 그려낸 <혜화, 동>이 2월17일에 테이프를 끊은 데 이어 <파수꾼>이 3월3일 개봉한다. 2월 세계 최대 독립영화 축제인 로테르담 국제영화제에서 최고상인 타이거상을 수상한 <무산일기>는 4월7일 극장을 찾는다. <혜화, 동>과 <파수꾼> <무산일기>는 지난해 부산영화제 상영 뒤 많은 갈채를 받으며 올 독립영화계 기대주로 꼽혔다.

완성도 높은 외화도 요즘 집중 개봉되고 있다. 특히 미국 아카데미 영화상 시상식과 맞물린 탓인지 미국 영화들이 우열을 겨룬다. 아카데미상 효과를 흥행에 끌어들이려는 수입사의 전략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아카데미상 주요 후보작으로는 <127시간>이 지난 2월17일 먼저 포문을 열었다. 당초 2월10일 개봉 예정이었던 이 영화는 제임스 프랭코의 남우주연상 수상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오스카 효과’를 더 보기 위해 개봉을 1주일 미뤘다. 2008년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로 아카데미 작품상을 거머쥔 코엔 형제의 서부극 <더 브레이브>와 나탈리 포트만의 열연이 화제를 모은 <블랙 스완>은 2월24일 나란히 개봉한다. 복싱 세계챔피언을 꿈꾸는 형제의 애증을 그린 <파이터>(3월10일)와 영국 왕의 말더듬 치료를 다룬 <킹스 스피치>(3월17일)도 극장행을 기다리고 있다. 아카데미상은 2월28일 시상식을 갖는다.

미국 영화 외에도 상차림은 풍성하다. <나 없는 내 인생>으로 세계 영화계의 주목을 받은 스페인 여성 감독 이사벨 코이셋의 <센티미엔토: 사랑의 감각>, 이라크 내 쿠르드인의 서글픈 삶을 할머니와 손자의 사연으로 전하는 <바빌론의 아들>(이상 24일), 지난해 일본 영화계 최대 화제작이었던 <고백>(3월) 등이 잇달아 개봉한다.

여느 해보다 우수한 작은 영화가 쏟아지면서 영화사들도 극장 잡기에 비상이 걸렸다. 한 영화사 관계자는 “2월에 개봉할 영화를 3월로 미뤘는데도 아직 개봉일을 잡지 못하고 있다. 좋은 영화들이 많다 보니 극장 잡기 경쟁도 치열한 상태이다”라고 밝혔다.   



ⓒ CJ엔터테인먼트 제공

코엔 형제가 돌아왔다. 이번에는 서부극이다. ‘악인은 쫓는 자가 없어도 도망한다’라는 경구로 시작한 영화 <더 브레이브>에는 도망치는 악인, 추격하는 짝패가 등장한다. 그런데 역시나 조금 남다르다. 그리고 즐겁고 씁쓸하다. 그들의 영화가 늘 그랬듯이.

무법자 톰 채니(조쉬 브롤린)에게 아버지를 잃은 열네 살 소녀 매티(헤일리 스타인펠드). 복수를 다짐한 그녀에게는 두 개의 선택지가 있다. 한때 잔인하기로 악명 높았던 연방보안관 카그번(제프 브리지스) 그리고 현상금을 노리고 접근한 텍사스 레인저 라 뷔프(맷 데이먼). 복수가 목적인 매티는 카그번을 고용하지만 술에 찌든 그는 어째 믿음직스럽지 않다. 경쟁 상대인 라 뷔프도 다를 건 없다. 지나치게 번듯한 라 뷔프의 수다에는 허세가 가득하다. 곡절 끝에 시작된 추격은 불안해 보이지만, 무법천지로 변한 인디언 보호 구역에서 매티가 의지할 것은 두 사람뿐이다. 기구하기도 하지.

찰스 포티스의 소설 <진정한 용기>를 각색한 영화 <더 브레이브>는 일종의 리메이크 작품이다. 그러나 1969년 만들어진 존 웨인 주연의 <진정한 용기>가 전형적 영웅담이었다면 <더 브레이브>는 무미건조한 유머와 아이러니한 위트로 이를 살짝 비튼다. 서부극 특유의 드라마적 공식은 <더 브레이브>에서도 엄수되지만, 코엔 형제의 손을 거친 캐릭터는 전형성을 벗어나 있다. 그들은 유치하고 우스꽝스럽고 고집스럽지만 인간적이고 따뜻하다. 그리고 성장한다. 복수라는 냉혹한 목표를 향해 달린 뒤 영웅의 퇴장이라는 씁쓸한 결말을 그리는 영화가 유쾌할 수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세련된 화면 연출과 군더더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깔끔한 전개, 이야기에 서정미를 더하는 음악 역시 영화의 장점이다. 더불어 각 역할을 똑 따먹었다고 해야 할 배우들의 연기도 훌륭하다. 주연에서 단역까지 어느 한 명 모자람도, 넘침도 없다. 특히 맹랑한 소녀 매티를 연기하는 헤일리 스타인펠드는 놀랍기 그지없다. <더 브레이브>가 데뷔작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 그녀의 연기는 영화가 선사하는 큰 즐거움 중 하나이다.

원제는 ‘트루 그릿’(True Grit). 2011년 제83회 아카데미 시상식 10개 부문 후보에 올랐으며, 제61회 베를린 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되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