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개위, 재벌 로비 창구로 전락하나
  • 이석 기자 (ls@sisapress.com)
  • 승인 2012.11.20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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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험·증권·카드사 대주주 심사 강화 법안 삭제 논란

새누리당 경제민주화실천모임이 지난 8월28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금산 분리 관련법 개정안 공청회’를 개최했다. ⓒ 연합뉴스
“규제개혁위원회(이하 규개위)가 신자유주의적 사고에서 서둘러 탈피할 필요가 있다.” 김대중 정부 시절 규개위 공동위원장을 지낸 강철규 우석대 총장의 말이다. 그는 지난 11월15일 기자와의 전화 통화에서 “규제를 완화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시장을 교란시키는 기업 집단(재벌)은 과감히 규제할 줄도 알아야 한다. 규개위가 제 역할을 못 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특히 금융회사는 고객 돈을 운영하는 만큼 높은 수준의 도덕성이 요구되고 있지만, 현실은 달랐다. 금융 당국의 묵인 속에 막대한 부를 쌓아가고 있다. 지난 2008년 터진 글로벌 금융 위기 역시 느슨한 규제가 원인이었다고 강총장은 설명한다. 그는 “정치권을 중심으로 경제 민주화 논의가 확산되면서 재벌 계열 금융회사를 규제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시장을 교란시키는 금융회사가 있다면 과감하게 규제할 수 있도록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지난 2010년 발생한 태광그룹 사태와 관련해 오너 일가를 엄중 처벌해달라고 관련 노조가 촉구하고 있다. ⓒ 뉴시스
강철규 전 위원장 “푸는 것만 능사 아니다”

강총장이 규개위와 함께 국내 금융권을 상대로 쓴소리를 내뱉은 데는 이유가 있었다. 금융위는 지난해 말 ‘금융회사 지배 구조에 관한 법률’(이하 금융회사지배구조법) 제정안을 입법 예고했다. 증권·보험·신용카드 등 제2 금융권의 대주주 요건을 은행권과 마찬가지로 까다롭게 심사한다는 것이 골자였다. 지난 2월 규개위가 이를 심사하는 과정에서 변수가 발생했다. 금융회사지배구조법의 핵심이 되는 대주주 적격성 심사 조항을 통째로 들어낸 것이다.

규개위측은 금융위에 책임을 떠넘긴다. 규개위의 한 관계자는 “입법 예고한 법안 자체가 형식에 맞지 않았다. 내용 자체를 철회한 것은 아니다”라고 해명했다.

하지만 심사 과정이 석연치 않다. 김기식 민주통합당 의원(국회 정무위원회 소속)이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규개위는 지난 2월23일과 3월8일 두 차례에 걸쳐 심사를 진행했다. 1차 회의에서는 대주주 적격성 심사에 대한 논의조차 하지 못했다. 2차 회의에서 총리실의 권고에 따라 관련 조항을 삭제 의결한 것이 전부였다. 금융위는 다시 반쪽짜리 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정치권이나 시민단체 일각에서는 “규개위가 금융회사지배구조법에 대해 제대로 검토했는지 의구심이 든다”라는 불만이 끊이지 않고 있다. 

실제로 은행권에 대한 금융 당국의 규제는 현재 상당히 까다로운 편이다. 일정 지분을 초과하는 주주에 대해서는 반기마다 적격성 심사를 하고 있다. 저축은행 역시 2년 주기로 대주주의 적격성 여부를 심사한다. 나머지 제2 금융권은 예외였다. 대주주의 배임이나 횡령 사고가 발생해도 규제할 장치가 없는 것이 사실이다. 금융 당국의 한 관계자는 “금융회사를 설립하거나 인수할 때만 승인을 받으면 더는 간섭받지 않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이다”라고 귀띔했다. 삼성생명 대주주인 이건희 회장과 한화생명의 실질적 소유주인 김승연 회장 등이 계열사에 막대한 손실을 입히고도 대주주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규개위측 “법안 자체가 형식에 안맞아”

이호진 태광그룹 회장은 금융 당국의 적격성 심사까지 피해갔다. 이호진 회장이 대주주인 태광산업은 지난 2006년 쌍용화재(현 흥국화재)를 인수했다. 당시 이회장은 불법 대출 혐의로 법원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지만,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았다. 이후 이회장은 가족이 지분 74%를 보유한 흥국생명에 다시 쌍용화재 주식을 매각했다. ‘장하성 펀드’로 불리는 라자드한국기업지배구조펀드는 “당시 태광산업의 손실액이 2백억원이 넘는다”라고 설명했다. 특히 흥국생명 역시 불법 대출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음에도 금융 당국의 제재를 받지 않았다는 점에서 논란이 많았다. 최근 규개위가 대주주 적격성 심사 항목을 삭제한 것을 두고 뒷말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경제개혁연대는 “규개위가 재계의 로비 창구로 전락하고 있다”라고 쓴소리를 내뱉기도 했다. 강정민 경제개혁연구소 연구원은 “규개위가 제대로 된 논의 없이 정부 발의 법률안을 삭제하고 있다. 결국 재벌 기업은 규개위에 소속된 위원들만 포섭하면 기득권을 유지할 수 있다”라고 지적했다.

규개위가 여론의 도마에 오른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규개위는 지난 2010년 3월 공정거래법 시행령 개정안을 통과시킬 때도 재벌의 손을 들어주어 논란을 빚었다. 공정위는 당시 대기업 집단 회사가 동일인 및 친족 지분 50% 이상인 계열사와 대규모 거래를 할 경우 이사회 의결을 거친 후 공시하도록 한 규정을 30%로 확대했다. 이 법이 통과되면 재벌 계열사 간 밀어주기가 상당 부분 해소될 것으로 공정위는 예상했다. 하지만 규개위가 ‘재심사’ 결정을 내리면서 공정위뿐 아니라 시민단체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금융권은 현재 제2 금융을 규제하려는 움직임에 강한 불만을 내비치고 있다. 보험·증권·카드사에도 대주주 적격 심사를 도입할 경우 은행과 형평성을 맞추는 것으로 비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금융권의 특성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업계에서는 말하고 있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제2 금융권을 은행과 똑같은 잣대로 규정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 일부의 문제를 가지고 대주주를 내친다면 누가 투자를 하겠나. 결국은 제2 금융권의 투자를 감소시켜 토종 금융기관의 경쟁력을 약화시키게 된다”라고 말했다.

시장 경제를 지향하는 학자 모임인 바른사회시민회의도 최근 ‘제2 금융권 적격성 심사, 과연 적격한가’라는 주제의 토론회를 통해 반대 의견을 내비쳤다. 전삼현 숭실대 법학과 교수는 “배임죄 처벌을 받는다고 해서 경영권을 박탈하는 것은 재산권 침해 행위로 관치 금융을 심화시킬 수 있다”라고 우려를 표시했다.

그럼에도 제2 금융권의 규제를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좀처럼 가라앉지 않고 있다. 정치권에서는 독자 행보 움직임까지 감지되고 있다. 김기식 민주통합당 의원 등은 지난 8월 규개위에서 삭제되었던 조항을 포함한 금융회사의 지배 구조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최근 발의했다. 김의원은 “정부 안에 관련 조항이 사라진 것은 결국 해당 업계의 로비에 굴복한 것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 국회 차원에서라도 관련 법안을 통과시킬 예정이다”라고 말했다. 새누리당 경제민주화실천모임도 최근 비슷한 내용의 경제 민주화 4호 법안을 발의했다. 때문에 향후 추이에도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국회에서 발의되는 법안은 규개위의 심사를 받지 않는다. 관련 법안이 통과되면 금융권의 구도가 바뀔 수 있다는 점에서 추이를 지켜보고 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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