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빛으로 동양인에 대한 편견을 깼다
  • 김진령 기자 (jy@sisapress.com)
  • 승인 2013.01.08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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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벽 넘어, 아시아 넘어 할리우드로 진출한 배두나

30대 이상에게 톰 행크스와 할 베리는 아카데미 주연상을 탄 최고의 톱스타로 기억될 것이다. 휴 그랜트는 로맨틱 코미디물의 황제였고, 짐 스터게스와 벤 위쇼는 지금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최고의 청춘 배우이다. 이들이 모두 <클라우드 아틀라스>에 출연했다. 게다가 감독이 <매트릭스> 시리즈의 워쇼스키 남매이다. 놀랍게도 충무로 여배우 배두나도 출연진에 끼어 있다. 그냥 끼어 있는 것이 아니라 “배두나는 이 영화의 영혼”(톰 행크스)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영화 <클라우드 아틀라스>를 보고 나면 왜 배두나(손미451 역)가 이 영화의 중심 캐릭터인지 알 수 있다. 배두나는 이 영화가 6개의 에피소드를 통해 전달하고 있는 메시지의 핵심 노릇을 하고 있다. 영화의 시작과 끝은 톰 행크스가 열고 닫지만, 영화 속의 불멸하며 끝없이 이어지는 고리의 한가운데에 배두나가 있다. 심지어 영화관 관객을 끌어들이는 로맨스의 주인공 자리까지 그의 몫이다.

영어가 유창하지도 않은 배우 배두나의 어떤 점이 <클라우드 아틀라스>의 공동 감독인 앤디와 라나 워쇼스키 남매와 톰 티크베르를 끌어당겼던 것일까. 굳이 비교를 하자면 배두나는 싸이의 ‘강제 해외 진출’ 경우와 비슷하다. 배두나는 이미 일본 영화에 출연한 적이 있다. 배두나가 출연했던 <고양이를 부탁해>나 <플란다스의 개>를 본 야마시타 노부히로 감독이 출연을 거듭 부탁해 그는 <린다 린다 린다>(2005년)에 출연했다.

ⓒ 시사저널 임준선
말하지 않아도, 말하지 못해도 전해지는 눈빛

칸 영화제와 베니스 영화제에서 수상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봉준호 감독에게 배두나에 대한 섭외를 부탁하고, 부산영화제에 올 때마다 배두나를 출연시키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다. 그는 결국 시나리오를 쓸 때부터 배두나를 염두에 두고 작업한 <공기인형>(2009년)을 만들었다. 두 작품 모두 비평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았고 <공기인형>을 통해 일본 아카데미상 여우주연상까지 탔다. 일본 영화 출연을 위해 배두나가 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전의 그의 출연 작품을 보고 감독들이 먼저 연락하고 출연을 간청했을 뿐이다.

그것이 이번에는 할리우드에서 일어난 것이다. 배두나에게 ‘<클라우드 아틀라스>에 왜 캐스팅되었다고 생각하느냐’라는 질문을 하자 촬영 중의 에피소드를 전해주었다.

“나도 잘 모르겠다. 내게 해외 매니저가 따로 있었던 것도 아닌데 임필성 감독을 통해 연락이 왔다. 시나리오를 받아보라고. 개인적인 연락망으로 이런 연락을 받으니까 너무 신기했다. 어떤 시나리오인지도 몰랐다. 받아보니 워쇼스키 감독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그중 어떤 캐릭터를 맡으라는 것인지 알려주지도 않았다. 할리우드에서는 시나리오를 철통 보안하기 유명한데 나에게 2백쪽짜리 시나리오가 통째로 건너와서 놀랐다.

시나리오를 받고 난 뒤 원작 소설도 읽어보고 라나 워쇼스키와 화상 채팅을 했다. 그때 라나가 손미 부분을 읽어보라고 하더라. 나는 손미는 (주연이라) 당연히 다른 할리우드 배우가 할 줄 알았다. 감독 말로는 내가 출연한 영화를 많이 봤다고 하더라. 복제 인간인 손미 역할이 상처받기 쉬운 면도 있지만, 그런 연약한 모습에서 혁명을 이끄는 강인함도 필요해서 캐스팅했다고 하더라. 내가 오디션을 볼 때 두 장면을 연기했다. 하나는 대사가 많은 장면이고, 또 하나는 감정적으로 힘든 장면이었다.

촬영이 거의 다 끝나갈 무렵 찍은 장면이 내가 침대에 누워서 ‘나는 반드시 싸울 것이다. 자궁에서 태어났던 자궁 탱크에서 태어났던 우리는 반드시 싸울 것’이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그 장면을 찍을 때 라나가 상대 역인 짐 스터게스에게 ‘잘 봐라. 이 장면으로 두나가 이 역을 따낸 것이다’라고 말하더라.”

라나 워쇼스키는 배두나 캐스팅에 대해서 “<고양이를 부탁해>를 보면서 ‘저 여자가 누구야’라고 물어봤다. 두나가 나오는 모든 영화를 다 봤다. 손미 역은 (원작처럼) 한국 사람이 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나가 영어 연기를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시카고에서 오디션을 했다. 연기 자체가 너무 놀라웠다. 손미를 순수하고 사슴같이 연기했다. 클론이지만 인간적인, 초인간적인 모습을 잘 표현했다. 아이 같은 어떤 순수함을 갖고 있는 어른이고, 동시에 혁명을 이끄는 강인한 캐릭터를 잘 소화했다. 그와 카메라 렌즈 사이에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나약함과 강인함을 너무나 잘 표현해주었다”라고 만족감을 표시했다.

배두나의 상대역인 한국인 장혜주 역의 짐 스터게스는 배두나에 대해 “내가 아는 게 없어서 좀 긴장했다. 영어 구사가 제한적이고, 한국에서는 유명 배우라는 정도만 알고 있었다. 극 중에서 연인 사이로 나오는데 공감대를 어떻게 이끌어내나 하고 걱정도 했다. 두나가 혼자 촬영장에 왔다. 처음 만남부터 자연스럽게 대화가 되어서 잘될 것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영화를 촬영하면서 우리 둘이 각자 출연했던 영화를 보고 함께 밥이나 술을 먹으면서 공감대가 넓어졌다. 그러면서 두나가 조용한 내면 뒤에 각기 다른 캐릭터를 표현하는 배우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처음 본 두나의 영화가 <괴물>이었고, <복수는 나의 것>에서 두나는 굉장히 파워풀했다”라고 평했다.

할리우드에는 동양계 배우가 널려 있지만 여전히 동양계가 맡을 수 있는 역은 제한적이다. 특히 젊은 동양 여배우를 블록버스터급 영화의 중심축에 놓은 경우는 전무했다. 배두나는 어떻게 그 문턱을 넘었을까. “언어라는 게 중요하고 언어를 통해 문화가 전달되지만, 배우의 배경에는 살아왔던 흔적이 중요하다고 본다. 사람이 느끼는 것은 비슷하다. 내가 진심으로 연기를 하고 그게 내 눈을 통해 읽힐 때 언어와 상관없이 어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배우는 몸이 고된 직업”이라고 덧붙였다. “배우는 화려한 직업이 아니다. 어느 직업이든 고생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배우는 몸 고생도 많이 하고, 마음을 쓰는 직업이라 마음고생도 당연하다. 그래도 배우이니까, 밖에 나가서는 아닌 척하는 것이다.”

“외국 작품이라고 덥석 잡지는 않는다”

배두나가 <클라우드 아틀라스>의 촬영을 위해 베를린으로 떠난 때는 2011년 9월17일이었다. 9월15일 하지원과 공동 주연의 <코리아> 촬영이 끝나자마자 떠난 것이다. <코리아>에서 이분희 역을 맡았던 그는 상반기 6개월 내내 탁구 연습을 했고, 그와 병행해 영어 공부를 해 <클라우드 아틀라스>의 오디션을 보았다. 몸과 머리를 모두 써버려야 하는 강행군을 한 것이다. <클라우드 아틀라스>의 촬영은 2011년 12월23일 끝났지만 이후 후반 작업에 참여하면서 그는 계속 베를린을 오갔다. “사실 캐스팅이 확정되고 나서 내가 이런 영화에 이런 역할을 맡은 것을 자랑하고 싶었지만 <코리아>에 집중해야 하는 시기여서 한동안 비밀로 했었다.”

배두나는 <클라우드 아틀라스>까지 세 편의 외국 영화에 출연했지만 교섭이 왔던 작품은 꽤 많았다고 한다. “덥석 잡지는 않는다. 안 잡은 영화도 꽤 있다. 미국 영화에 대한 환상도 없고, 욕심도 없다. 진짜 좋은 배우와 좋은 감독과 하는 작품이라고 생각하면 한다. 내가 섣불리 도전할 수 없거나 민폐를 끼칠 것 같으면 사양한다. <클라우드 아틀라스>는 도전해보고 싶은 욕심이 났다. 언어가 약점이었지만 그걸 극복하려고 노력했다.”

재미있는 점은 그가 해냈던 <공기인형>에서의 노조미 역이나 <클라우드 아틀라스>의 손미451 역이 인조인간이라는 공통점을 가졌다는 것이다. 그는 “노조미와 손미는 인간이 아닌 존재, 인간의 필요에 의해서 생긴 존재, 인간의 마음을 갖게 되고 일탈을 하는 일직선에 자리 잡고 있기는 한데 의식적으로 차별화시키려고 하지는 않았다. 내가 노조미 역을 안 했다면 손미의 연기 톤을 잡는 데 더 힘들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했다. 지나고 나서 든 생각이지만 노조미보다 손미가 좀 더 적극적이고 인간적인 캐릭터 같다”라고 말했다.

한국 관객들에게 <클라우드 아틀라스>는 조금 특별하다. 할리우드 영화에서 비록 2144년이긴 하지만 서울이라는 도시가 주요 배경으로 등장하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그 미래에는 많은 나라가 온난화로 물에 잠기고 동북아에서는 네오 서울이 물에 잠기지 않은 중심 도시로 자리 잡고 있다. 그때 지구에는 한글과 변형된 영어 등 몇몇 언어만 살아남았다. 손미와 그의 동료 클론이 일하는 ‘파파송’이라는 레스토랑은 어딘가 키치풍으로 버무린 한국 음식점 또는 일본 음식점 같기도 하다. 파파송 이야기를 하자 배두나가 말했다. “나도 전해 들은 이야기인데, 그게 원작 소설가가 우리나라 종묘 앞을 가보고 영감을 얻어서 만든 설정이라고 하더라.”

1979년생 배두나는 명일동과 삼청동에서 초등학교를 다니고 흑석동에서 중학교를 다니고 도곡동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다. 그는 가회동과 성북동, 황학동 같은 곳의 도가니탕 집이나 돼지불백, 삼겹살 집을 잘도 찾아다닌다. 그런 그가 2144년 네오 서울의 ‘파파송’에서 일하는 복제인간 손미451로, 1846년 샌프란시스코에서 배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 오고 있는 애덤 어윙(짐 스터게스)을 기다리는 틸다로, 1975년 캘리포니아의 원자력발전소가 있는 스와네크 섬에 사는 멕시코 여인으로 등장해 길고 긴 인연의 세계로 관객을 인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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