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금 한 푼 안 내고 상속하려고?
  • 이유영│조세정의네트워크 동북아 대표 ()
  • 승인 2013.07.02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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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영 회장 부부·조욱래 회장 부자, 조세 회피처에 소유권 자동 이전 법인 설립

조세 회피처에 숨어든 비밀스런 돈의 이력이 제대로 공개된 적은 한 번도 없다. 하지만 2012년 말 호주 언론인 제럴드 라일이 영국령 버진아일랜드(BVI)를 종착지로 하는 역외 서비스 관리회사 PTN과 CTL의 클라이언트 정보를 입수하면서 조세 회피처 불패 신화는 끝났다. 메일 정보에 기반을 둔 이 ‘데이터 덩어리’는 오랜 분류 작업(데이터마이닝) 끝에 2013년 3월을 기점으로 국제탐사보도연맹(ICIJ)과 각국의 파트너 언론기관을 통해 그 면모가 공개되기 시작했다.

국내 정·관계에도 비상이 걸렸다. 한국계 기업인들이 PTN과 CTL을 많이 이용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데이터 덩어리’ 속에 국내 기업인의 자료가 들어 있었다. ICIJ는 한국측 파트너로 <뉴스타파>를 선택했고 <뉴스타파>는 이 자료에서 한국인 이름이 등장하는 자료를 분석해 지난 5월22일부터 공개했다. 마침 새로 출범한 박근혜정부는 ‘경제민주화’ ‘지하경제 양성화’ ‘역외 탈세 근절’을 내세우고 있었기에 어떤 기업들이 조세 회피처에 딴살림을 차렸는지 큰 관심이 쏠렸다.

대부분 역외 트러스트 아닌 회사법인 형태

이번 자료를 통해 전두환 전 대통령의 큰아들 재국씨 이름이 드러났다. 1997년 외환위기 직후 한국 금융 시장에서 역외 스트럭처링을 통한 탈세 전략을 기반으로 성공 신화를 쓴 김석기 전 중앙종금 사장, 대기업과 중견기업 사주 및 관계자, 심지어 평양에 주소를 둔 북한 인사들까지 비밀스런 역외 비즈니스 행각의 일단을 드러냈다.

특기할 만한 것은 ICIJ를 통해 공개된 자료 중 한국 관련 문건의 경우 대부분 역외 트러스트 형태가 아닌 limited나 company와 같은 회사법인(corporate entity)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회사법인을 통해 조세 회피처에 회사를 세운 경우(역외 스트럭처링) 초기 자본금 이외에는 영업 관련 정보나 재무 정보가 나오지 않아 은닉된 자산 규모가 등록 서류에는 드러나지 않는다. 반면 역외 트러스트의 등록 서류에는 설립자·수익자·보고자 등 3인이 등장한다. 또 현금성 자산을 얼마나 갖고 있는지가 등록 서류에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이번에 공개된 한국계 페이퍼컴퍼니(유령 회사) 중 역외 트러스트 형태는 황용득 한화역사 사장이 세운 파이브 스타 아쿠 트러스트가 유일하다.

5월22일 최초로 공개된 인사 중에는 이수영 OCI 회장 부부, 조중건 전 대한항공 부회장 부부, 조욱래 DSDL 회장 부자 등이 있다. 이 중 2008년 부인을 주주 및 등기임원으로 등재해 BVI에 지주회사를 설립한 조중건 전 부회장의 경우 이미 한국 납세자 신분이 아닌 미국 거주자로 확인된 터라 논란거리가 되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부부와 부자가 주주로 동시에 등재된 이수영 회장 부부와 조욱래 회장 부자의 경우 주목할 만한 점은 관련 역외 법인을 상대방에게 상속권을 부여하는 공동 소유(Joint Tenants with Rights of Survivorship)로 설립했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어느 일방이 사망할 경우 유언 검증 절차 없이 생존한 상대에게 자동으로 소유권이 이전될 수 있다. 이는 법인 설립 사실을 파악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한 당국의 눈을 피해 드러나지 않은 자산을 증여 또는 상속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

2차 공개에 등장하는 파이브 스타 아쿠 트러스트는 한화역사 황용득 사장이 1996년 2월 뉴질랜드계 조세 회피처인 쿡아일랜드에 설립한 역외 트러스트다. 이 트러스트는 투자 수단으로 설립된 파이브 스타 아쿠 리미티드를 통해 하와이 소재 아파트 두 채를 1997년 8월에 사들인 뒤 2002년 한화재팬에 매각한다. 해당 거래를 통해 상당한 매매 차익이 발생했으며, 매입 조건 또한 동종의 유사 부동산 거래보다 규모가 컸다. 투자 내역과 실현된 차익이 관련 당국에 제대로 신고됐는지, 해당 트러스트의 실소유주가 누구인지 의문이 든다.

전재국은 전형적인 역외 스트럭처링

1996년 조민호 전 SK케미칼 부회장을 등기임원으로 해서 BVI에 설립된 크로스브룩 Inc의 경우 ‘Bearer Shareholder’, 즉 무기명 주주가 주주로 등재돼 있는 점이 특이하다. 이 경우 해당 법인의 실제 주주가 누구인지 관련자를 제외하고는 알 수가 없다.

대우 관련 인사들이 설립한 콘투어 퍼시픽(2005년)과 선 웨이브 매니지먼트(SWM)(2007년)도 눈길을 끈다. 특히 유춘식 전 대우폴란드자동차 사장을 주주로, CayDa Capital Group(CCG)을 등기임원으로 등재한 SWM은 CCG가 베트남 등 세계 도처에 투자 자산(investment interests)을 소유하고 있음이 드러났다. 때문에 외환위기 때 공중분해 된 대우그룹 및 김우중 전 회장과의 관련성 여부가 주목받고 있다.

최은영 한진해운홀딩스 회장은 본인을 주주로 하고 조용민 전 대표이사를 등기임원으로 BVI에 페이퍼컴퍼니 와이드 게이트 그룹을 설립한 것으로 확인됐다. 역외 조세 회피처 설립 법인 운용이 글로벌 해운업계의 관행이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회사 명의가 아닌 회장 개인이 90% 상당의 소유권을 갖는 페이퍼컴퍼니를 설립한 것은 의혹을 살 만하다.

5월30일 공개된 3차 명단은 해외 도피 중인 김석기 전 중앙종금 사장이 1990년, 1993년, 2001년, 2005년에 걸쳐 BVI에 설립한 복수의 역외 법인을 망라하고 있다. 배우자인 윤석화씨, 이수형 삼성전자 준법경영실 전무 등이 등기임원으로 등장한다. 휴면 법인이라는 당사자의 해명과 달리 해외 도피 중에도 지속적으로 한국 내의 IT 관련 업계에 투자해왔음이 밝혀졌다. 해당 법인이 역외에서 정체를 감춘 후 역내 투자 수단으로 활용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받고 있다.

같은 날 공개된 전성용 경동대 총장의 경우 등기임원 또는 차명 주주로 역외 관리회사를 올리고 본인은 실제 소유주(beneficial owner)로 등재한 4개 법인을 싱가포르와 BVI에 설립했다. 이처럼 역외 관리회사를 차명으로 동원한 경우에는 역외 금융 비밀주의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려 했다는 의혹이 제기되는 게 일반적이다.

시공사 대표인 전두환 전 대통령의 장남 재국씨는 싱가포르 로펌(PKWA)의 자문을 받아 PTN(역외 서비스 관리회사)을 통해 BVI에 블루 아도니스라는 페이퍼컴퍼니를 설립했다. 이 회사는 법인 연결 계좌를 싱가포르 현지 아랍은행 지점에 개설하려 했다는 점에서 전형적인 역외 스트럭처링 형태를 띠고 있다. 게다가 계좌 정보, 자금 거래 내역, 회의록 등 내밀한 문건을 은행 금고에 보관하려 한 데서 역외 자금 은닉 전략의 치밀성이 엿보인다. 여기에 잠들어 있는 관련 문건이 입수되지 않는 한 관련된 자금이 당사자의 해명처럼 미국 유학 후의 잔금인지, 다른 은닉 자산의 저수지로 연결된 꼬리인지 밝혀지기 어렵다.

6월6일 공개된 5차 명단에는 북한 관련 인사로 보이는 이들이 등기임원으로 등재된 복수의 역외 법인들이 포함됐다. 이들이 북한 현지인인지 아니면 현지에서 투자 관련 사업을 진행하는 북한 또는 남한계 외국인인지는 불분명하다.

6차 명단 공개에 등장하는 김성권 씨에스윈드 회장은 2008년 에보니골드 매니지먼트를 BVI에 설립했다. 특히 골드만삭스가 운용하는 사모 펀드에서 472억원을 투자받은 직후 아들을 합유 재산권자(joint tenants)인 주주로 등재해 설립한 점이 특이하다. 골드만삭스의 투자는 호재성 정보(material information)이며 이를 통해 향후 상당한 차익 실현이 가능하고, 실현된 차익이 역외로 이전된 후 아들에게 증여 또는 상속될 수 있다는 점에서 관심을 끈다.

DKNY·GAP·ZARA 등 글로벌 패션 브랜드 납품업체인 노브랜드의 김기홍 회장은 BVI에 3개의 페이퍼컴퍼니를 설립하고, 영국 근교의 조세 회피처 저지 섬에 설립한 윈넷홀딩스를 통해 노브랜드를 지배하고 있음이 밝혀졌다. 특히 페이퍼컴퍼니 명의로 개설한 UBS 홍콩 지점의 계좌 인출권이 김기홍 회장과 배우자에게 있다는 사실이 공개됐다. 이는 역외 스트럭처링을 통해 역외로 이전 또는 유보된 법인 자금을 사주이자 계좌의 실소유주가 자의로 처분 또는 활용할 수 있게 하는 전형적인 역외 거래 수법이라 할 수 있다. 특히 Win Harvest Consultants, Ltd.라는 회사는 회사명에 컨설턴트라고 나와 있어 ‘경영 자문료’ 명목으로 수익을 이전받는 전형적인 페이퍼컴퍼니일 가능성이 크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예보 전 임직원들도 유령 회사 설립

2012년 9월 부도가 난 코스닥 상장 기업 SSCP의 창업 2세인 오정현 대표이사는 2006년부터 2008년까지 BVI에 4개의 페이퍼컴퍼니를 설립했다. 부도 당시 소액주주들이 입은 피해액이 2000억원을 상회할 것이라는 주장이 나왔었다. 그동안 등락을 거듭하던 주가를 고려하면 역외 법인을 통해 지분 투자·매각을 한 후 실현된 차익을 역외로 유출했다는 의혹을 살 수 있다. 게다가 오 전 대표는 주력 사업부를 매각한 후 받은 대금 중 상당액을 횡령한 혐의로 검찰에 고발된 상태다.

6월15일 7차 명단 공개에서는 예금보험공사 및 산하의 정리금융공사 전직 임직원 6명이 외환위기 직후인 1999년 BVI에 2개의 페이퍼컴퍼니를 설립한 사실이 드러났다. 퇴출된 금융기관의 해외 자산을 회수하기 위한 목적이라는 해명이 있었지만, 해당 법인과 관련해 공식 문서가 전혀 존재하지 않고 있어 이는 설득력이 떨어진다. 더구나 관련 인사들이 기관의 실소유권(beneficial ownership)이 부재한 상태에서 해당 법인의 모든 보통주를 보유하고 있는 사실을 고려하면 관련 기관이 실제 지배력을 제대로 행사해 자산 환수 목적을 달성했는지 의문이다.

<뉴스타파>는 관련 자료를 모두 공개하고 일반인들의 참여를 유도하는 ‘크라우드 소싱’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대중의 집단 지성을 이용해 미진한 의혹의 연결 고리를 찾겠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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