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 회장님도 빈방 없어 돌아갑니다
  • 김민신 인턴기자 ()
  • 승인 2013.12.03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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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적거리는 대형 병원 ‘VIP 병실’…‘범털’ 휴양소로 악용 가능성

지난 11월10일 종로구 서울대병원에서 작은 소동이 일었다. 이재현 CJ그룹 회장이 바이러스 감염으로 서울대병원 본관 특실에 재입원하고자 했으나 빈방이 없었던 것이다. 이 회장이 불과 한 달 전 신장 이식 수술을 받았을 때 입원해 있던 방에는 그새 다른 환자가 들어와 있었다. 결국 그는 암 병동 특실로 옮겨가야 했다. 지난 8월 노태우 전 대통령도 갑작스런 혈압 상승으로 서울대병원을 찾았지만 본관 특실에 방이 없어 암 병동 6층에 있는 특실로 가야 했다.

전직 대통령도 대기해야 하는 서울대병원 본관 특실은 이른바 ‘VIP 병실’로 불린다. 그만큼 정·재계 거물들이 자주 찾아 ‘회장님 병실’ 혹은 ‘대통령 병실’이란 수식어가 붙었다. 대형 병원 특실은 병원 내에서도 베일에 싸여 있다. 같은 건물에서 근무하는 간호사들조차 쉽게 접근하지 못한다. 서울대병원 중환자실에서 근무하는 한 간호사는 “특실에는 지정된 담당 간호사들만 들어갈 수 있다”며 “그 외의 간호사들은 특실 사정에 대해 거의 모른다”고 말했다. 외부인의 출입도 엄격하게 제한한다.

2011년 당시 오른쪽 폐에서 발견된 침을 제거하기 위해 서울대병원에 입원한 노태우 전 대통령. ⓒ 연합뉴스
하루 입원비 최대 200만원 이상

국회 보건복지위 소속 김성주 민주당 의원이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2010년부터 지난해까지 최근 3년간 대형 병원 특실은 연평균 6만7000여 명의 환자가 이용했다. 이 중 가장 많은 사람이 이용한 병원은 삼성서울병원이다. 2010년부터 2012년까지 4만4000여 명이 찾은 것으로 조사됐다. 홍보팀 관계자에 따르면, 삼성서울병원 특실의 하루 이용료는 최소 50만원에서 최대 70만원 수준이다. 하지만 이는 일반인도 이용할 수 있는 보통의 특실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특실 중의 특실인 ‘VIP 병실’은 평수가 넓고 보안이 철저해 거물들이 자주 찾는 곳이다. 이곳과 관련된 정보에 대해서는 병원 관계자들도 언급을 피하고 있다. 특히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주로 이용하는 곳으로 알려진 20층 병실은 전용 엘리베이터 외에는 올라가지 못하는 절대 출입 통제 구역으로 ‘VVIP 병실’로 불린다. 삼성서울병원 ‘VIP 병실’에는 2009년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이 입원했다. 2010년엔 천신일 세중나모 회장이, 지난해엔 최시중 전 방송통신위원장이 이 병원 특실을 찾았다.

본관 20층에 위치한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세브란스병원 ‘VIP 병실’은 고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등이 이용했다. 2006년엔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새누리당의 전신) 대표가 입원하기도 했다. 이곳의 하루 이용료는 최소 100만원에서 최대 200만원 정도다. 세브란스병원 관계자는 “시설 및 방 크기, 창문 방향 등에 따라 가격이 달라진다”고 전했다. 하루 200만원을 호가하는 특실의 경우 병상과 분리된 응접실이 따로 마련돼 있다. 입원 중에도 손님을 맞거나 업무를 볼 수 있게 한 것이다. 병실 내에는 주방과 욕조, 회의실까지 호텔 못지않은 시설이 갖춰져 있다. 병원 관계자는 “특실이라고 해서 회진을 더 자주 하는 건 아니다”라며 “시설에 차이가 있을 뿐 의료 서비스는 특실이나 일반실이나 동일하다”고 강조했다.

서울대병원 특실은 본관 12층에 있다. 하루 입원비는 최소 49만원에서 110만원쯤이다. 30개의 특실 중 4곳이 100만원 안팎이며 ‘VIP 병실’로 불린다. 암 병동의 ‘VIP 병실’ 한 곳까지 포함해 5곳을 서울대병원에서는 통상 ‘VIP 병실’로 부르고 있다. 그중 병상과 응접실이 분리된 병실은 두 곳이며, 크기에 따라 가격이 다르다. 병원 관계자에 따르면 현재 ‘VIP 병실’ 모두 환자가 입원 중이고 당분간 퇴원 계획은 없다고 한다. 현재 본관 ‘VIP 병실’에는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이 입원해 있다. 김 회장은 올해 초 조울증과 호흡곤란 증세를 호소하며 서울 신대방동 보라매병원에 입원했다가 서울대병원 특실로 옮겼다. 김영삼 전 대통령 역시 폐렴으로 4월부터 장기 입원 중이다. 최근엔 조석래 효성그룹 회장이 입원했다. 조 회장은 고혈압·부정맥 등 건강 악화로 지난 10월 말에 입원했다가 얼마 전 퇴원해 현재 자택에서 요양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조 회장이 떠난 병실을 포함한 두 곳의 환자에 대해서는 개인정보라는 이유로 병원 측이 함구하고 있다. 암 병동 ‘VIP 병실’에는 8월까지 노 전 대통령이 입원했고, 현재는 이재현 회장이 입원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8월 노태우 전 대통령이 입원한 서울대 병원 암병동 특실 입구. ⓒ 연합뉴스
‘VIP 병실’ 환자, 구속집행정지 상태 많아

최근 서울대병원 ‘VIP 병실’에 정·재계 거물급 인사들이 몰려들었다. 서울대병원 홍보팀 관계자는 “유명 인사가 입원해 화제가 됐을 뿐 VIP실은 일반인도 사용할 수 있다”며 “(유명 인사들이) 과거 우리 병원에서 진료를 받았거나 입원한 전력이 있는 경우, 진료 기록이 남아 있거나 주치의가 있어서 이왕이면 (우리 병원을) 찾는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그는 “담당 의사에 대한 환자 개인적인 선호나 신뢰도 작용한다”고 덧붙였다.

그런데 ‘VIP 병실’에 입원한 거물급 인사 중엔 교집합으로 겹치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구속집행정지다. 구속집행정지는 피고인에게 질병 등 중대한 사유가 있을 때 잠시 석방하는 제도다. 피고인의 인권을 고려한 제도지만 사실상 ‘범털’들의 도피처가 됐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이재현 회장은 지난 7월 횡령 및 탈세 혐의로 구속 기소됐으나 만성신부전증으로 구속집행정지를 받았다. 이후 신장 이식 수술을 받고 퇴원한 뒤 바이러스 감염이 확인돼 재입원한 상태다. 법원은 이 회장에 대해 구속집행정지 기간을 3개월 연장했다. 김승연 회장은 2011년 기소됐다. 하지만 올해 초 건강 악화로 구속집행정지 처분을 받아 지금까지 총 4차례 연장했다. 2011년 아산병원에 입원한 이호진 태광그룹 회장도 간암 수술 후유증으로 구속집행정지를 받은 바 있다. 그 밖에 박연차 회장이 2009년 구속집행정지를 받고 여러 차례 연장하다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구속 수감되는 재벌 회장들이 밟는 수순이다.

구속집행정지는 피고인의 신청에 따라 검사가 사유를 조사해 이뤄진다. 필요에 따라 검찰청 소속인 구속집행정지심의위원회를 개최하며, 의사의 감정서를 첨부한 결과보고서를 작성해야 한다. 의사의 직업적 소신이 강하게 요구되는 만큼 순수한 치료 목적으로 구속집행정지 여부가 결정된다. 하지만 매번 중대한 검찰 조사를 앞두고 병실을 찾는 재계 인사들의 모습에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구속집행정지는 기간 및 횟수에 사실상 제한이 없다. 김성주 의원은 “구속집행정지 제도가 법의 취지와 국민의 법 정서에 맞게 운영될 필요가 있다”며 “악용될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심사위원회 기능을 강화하고, 지정 병원을 두어 VIP 병실에서 형 집행을 피하려는 시도 자체를 막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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