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 노릇 못했어도 자식 의무 다해라”
  • 강성운│독일통신원 ()
  • 승인 2014.04.02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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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자녀와 연락 끊은 아버지 요양비 청구소송 화제

“까마귀 부모도 자녀가 부양해야 한다.” 독일의 일간지인 ‘타게스차이퉁(Tageszeitung)’에 도발적인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브레멘 시가 2012년 요양시설에서 사망한 한 노인의 아들 A씨를 상대로 제기한 요양비 지급 청구소송에 관한 기사다. 여기서 ‘까마귀 부모(Rabeneltern)’란 자식에게 매정하게 대하는 부모를 비꼬는 말이다.

이 사건은 43년 전인 197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피고인 A씨는 1953년 한 부부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부는 A씨가 만 18세가 되기 전인 1971년 이혼했고, 아버지는 가족을 떠났다. 이듬해 A씨가 김나지움(독일의 중등 교육기관) 졸업시험을 치르고 성년이 되자 아버지는 A씨와의 연락을 일방적으로 끊었다. 1998년 아버지는 “이미 27년간 왕래가 전혀 없다”는 이유로 ‘의무적으로 줘야 하는 최소한의 유산’만을 아들인 A씨에게 남기는 대신 자신의 새 배우자를 상속 제1순위로 정한다고 유서를 쓰고 공증을 받았다.

사회안전망이 잘 갖춰진 독일이지만 고령화된 부모 세대를 국가가 떠맡는 것과 관련해서는 논란이 많다. ⓒ EPA 연합
80대 노인이 된 아버지는 2008년 4월 브레멘 시의 한 요양시설에 들어갔다. 처음에는 요양비 중 본인 부담금을 직접 냈지만 모아둔 재산은 10개월 만에 소진됐다. 그가 2012년 1월 만 89세의 나이로 숨을 거둘 때까지 브레멘 시 사회복지국은 총 9000유로가량을 대신 지불했다. 그리고 2012년 3월 그동안 왕래가 없던 A씨에게 ‘아버지가 내지 못한 요양비 일부를 아들이 부담하라’는 청구서를 발송했다.

“연락 끊었다고 부양 의무 상실되지 않아”

A씨는 일방적으로 자식과의 인연을 끊은 아버지의 요양비용을 낼 수 없다며 올덴부르크 주 고등법원에 항소했다. 재판부는 A씨의 손을 들어줬다. 그러나 브레멘 시 사회복지국은 연방대법원에 항소했고, 독일 연방대법원은 지난 2월12일 고등법원의 판결을 뒤집었다. “부모가 자녀와 연락을 끊는 것은 법이 정한 민법상 후견과 보호의 의무를 위반한 것에 해당하지만, ‘중대한 위반’이 아닐 경우에는 부양 의무가 상실되지 않는다”는 이유를 들었다.

연방대법원은 판결문에서 “아버지는 성년인 아들과 가족으로서의 연을 끊었지만 아들이 만 18세가 될 때까지 돌봤다. 따라서 부모의 보호가 필요한 이 기간 동안 부모로서의 의무를 대체로 충족시켰다고 볼 수 있다”고 밝혔다. 이 부분에 언론과 전문가들의 관심이 집중됐다. 그동안 기준이 없던 문제를 명확하게 해준 ‘원칙 결정(Grundsatzentscheidung)’이었기 때문이다. 이 판례는 앞으로 유사한 소송이 있을 경우 판단의 기준이 된다. 이런 중요성 때문에 독일 언론과 시민들은 연방대법원의 판결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

사안의 성격상 감정적인 반응도 많았다. 특히 재판이 세 차례 진행되는 동안 아버지의 야속한 언행들이 언론에 알려지면서 아들 A씨에 대한 동정 여론이 우세했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독일 본 대학 법대의 한 재학생은 “아버지가 자식과의 연을 끊은 것을 두고 ‘위반은 위반이지만 엄중한 위반이 아니다’라는 것은 말장난”이라며 “대법원의 논리를 그대로 적용해 요양비도 아버지가 아버지 노릇을 한 기간에 해당하는 만큼만 청구해야 하지 않겠나”라고 반문했다.

연방대법원의 판결은 독일 정부가 아직까지 부양 의무를 개인과 가족의 몫으로 보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헤리베르트 프란틀 독일 빌레펠트 대학 법대 교수는 ‘쥐트도이체차이퉁’에 쓴 칼럼에서 “노인 부양 의무는 자녀가 아닌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복지 국가에서 가족의 규모가 축소되면서 간병, 양육, 노인 부양 등 전통적인 가족의 기능이 점차 국가의 몫으로 전환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얘기다. 프란틀 교수는 “통념과 달리 부모에 대한 부양 의무가 가정의 화목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하며, 오히려 노인들이 복지 혜택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게 만든다”고 주장했다. 많은 노인이 자식들에게 청구서가 날아갈까 봐 마땅히 받아야 할 혜택을 포기한다는 것이다. 그는 “자녀에게 부양비를 청구하는 것은 가족을 결속시키기 위한 조치가 아니라 국가가 짐을 덜기 위한 조치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한국에 비해 사회안전망이 탄탄하다고 평가받는 독일에서도 정부가 노인 인구 부양 등 전통적인 가족의 기능을 완전히 넘겨받기까지는 해결해야 할 숙제가 많다. 고령화 문제는 독일에서도 골칫거리다. 부양을 받아야 하는 노인 인구는 늘어나지만 그 비용을 대야 하는 청·장년층 인구는 감소하기 때문이다. 도리스 베르베-슈흐트 독일 연방보건부 대변인은 시사저널과의 통화에서 “현재 요양 서비스를 필요로 하는 인구는 240만명가량인데 2030년에는 350만명으로 증가할 것으로 예측된다”고 말했다.

사회학자인 슈테판 흐라딜은 20~65세 인구 대 65세 이상 인구 비율이 2010년에는 3 대 2였지만 2060년에는 3 대 3이 될 것이라는 비관적인 예측을 내놓고 있다.

자녀 키우며 부모 봉양하는 샌드위치 세대

독일 정부는 이미 노인 부양에 대해 개인의 부담을 충분히 나눠서 지고 있다고 볼지도 모른다. 단적인 예로 독일에서는 개인이 내야 하는 본인 부담금을 정부가 대신 내주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독일 시연합(DST) 자료에 따르면, 이런 목적으로 편성되는 예산은 매해 40억 유로가량인데 지난해의 경우 37억 유로가 실제로 지출됐다. 예산의 90% 이상을 소진할 정도인데, 이대로라면 정부도 곧 한계에 부닥치게 된다. 각 지방자치단체 사회복지처가 소송까지 불사하며 자식들에게 밀린 요양비를 청구하는 데는 이런 속사정이 있다.

그렇다고 노인 부양을 전적으로 자녀의 몫으로만 남겨둘 수는 없다. ‘쥐트도이체차이퉁’은 “자녀를 키우면서 동시에 부모를 봉양해야 하는 ‘샌드위치 세대’가 너무 큰 부담을 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자녀가 경제적으로 자립하는 데 더 긴 시간이 소요되고 있는 데다 부모 세대의 기대수명이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샌드위치 세대는 앞뒤 세대를 돌보느라 정작 자신의 노후를 제대로 준비하지 못하는데 그 때문에 또 다른 노인 빈곤 문제를 우려해야 할 판이다. 여론조사 기관인 알렌스바흐의 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독일의 30~59세 성인 중 절반가량이 “노후에 매우 허리띠를 졸라매야 한다”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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