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가 꾹꾹 눌러도 ‘개헌 화산’ 터진다
  • 양정대│한국일보 정치부 기자 ()
  • 승인 2014.10.30 1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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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무성의 ‘치고 빠지기’…연말 박 대통령과 정면충돌 예고

10월23일 새누리당에는 한바탕 소용돌이가 몰아쳤다. 김무성 대표의 ‘개헌 봇물’ 발언을 두고 ‘친박(親朴)계’ 핵심인 홍문종 의원은 이날 한 라디오방송 인터뷰에서 “김 대표가 욕심을 못 참고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다”고 비난했다. 반면 ‘비박(非朴)계’인 조해진 의원은 다른 라디오방송에 출연해 김 대표를 정면으로 비판한 청와대를 향해 “국정의 중요한 파트너인 여당 대표에 대한 불신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맞받았다.

여권은 물론 정치권 전체에 평지풍파를 일으킨 김 대표의 지난 10월16일 ‘상하이 발언’의 요지는 크게 두 가지다. 우선 “올해 정기국회가 끝나면 개헌 논의에 봇물이 터지고, 그렇게 되면 막을 길이 없을 것”이라며 연말 개헌 논의를 기정사실화했다. 그러면서 오스트리아식 이원집정부제에 대한 지지 의사를 적극 표명했다. 사실 김 대표는 7·14 전당대회 출마 당시부터 개헌의 필요성을 줄곧 주장해왔다. 다만 이번 발언은 그간 김 대표가 해온 얘기와 두 가지 점에서 상당한 차이가 있다. 당장 개헌 논의의 시점을 분명히 밝혔다. “정기국회 동안에는 개헌 얘기를 꺼내지 말아야 한다”에서 “정기국회가 끝나면 개헌 논의가 봇물을 이룰 수밖에 없다”로 바뀐 것이다. 결론이야 마찬가지겠지만, 뉘앙스 자체가 전혀 다르다.

정의화 국회의장이 9월1일 열린 제329회 정기국회 개회식에서 장관들이 참석한 가운데 개회사를 하고 있다. ⓒ 연합뉴스
또 하나는 권력 구조 개편안에 대한 자신의 구상을 적시했다는 점이다. 그동안에는 기존의 여론조사 결과를 거론하며 “많은 국민이 4년 중임 정·부통령제를 바라는 것 같다”는 정도였지만, 이번엔 아예 대통령제가 아닌 분권형 제도 도입을, 그것도 오스트리아식 이원집정부제를 선호하고 있음을 명시적으로 언급한 것이다.

김무성 ‘새판 짜기’의 한 축은 바로 개헌

문제는 김 대표의 개헌 관련 언급이 박근혜 대통령과 정면으로 부딪치는 모양새가 됐다는 점이다. 박 대통령은 국회에서 거론되는 개헌론을 거듭 ‘블랙홀’에 비유하며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해왔다. 그런데 집권 여당 대표가 박 대통령의 해외 순방 와중에, 그것도 본인 역시 해외에 체류하는 동안 공개적으로 이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사실 김무성 대표 입장에선 이번 중국 방문 결과에 적잖이 고무될 만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면담했고, 중국 내 차기 주자로 손꼽히는 한정 상하이 총서기도 만났다. 42명에 이르는 동행취재단 규모도 대통령 해외 순방 못잖은 매머드급이었고, 국정감사 기간이었지만 현역 의원 9명이 방중 길에 동행했다. 대표 취임 이후 국제무대에 첫선을 보이는 자리였는데 나름의 성과가 있었던 것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평소 고심해오던 개헌 관련 질문이 나오자 특별한 경계심 없이 편하게 얘기를 쏟아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분명한 건 개헌에 대한 김 대표의 의지가 상당하다는 점이다. 김 대표는 자신의 이번 발언 파동 때도 “개헌 얘기를 당분간 하지 않겠다”며 사과는 했지만, 관련 보도 내용 자체를 부인하지는 않았다. 정치인들이 대체로 자신의 발언을 번복하거나 사과할 때면 “진의가 잘못 전달됐다”고 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는 실수라고만 했다. 그러면서 개헌 논의 중단 시점을 정기국회가 끝날 때까지로 못 박았다. 정기국회 이후 개헌 논의를 다시 시작하자는 것과 분권형제 개헌이 자신의 입장임을 재확인한 셈이다.

김 대표 주변에선 향후 여권의 권력지도를 다시 그리는 과정에서 개헌이 중요한 요소가 될 것이란 기류가 강하다. 개헌 자체가 워낙 휘발성이 큰 사안인 만큼 당연한 얘기지만, 여기엔 김 대표의 불안한 위치도 한몫하고 있다. 새누리당의 수장이지만 아직은 박 대통령의 정치적 영향력이 큰 상황이라 사실상 비주류 대표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권 내 ‘친박 vs 비주류’ 구도를 넘어서면서 자신을 중심으로 새판을 짤 수 있는 계기 중 하나로 폭발력이 큰 개헌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현재 권력은 개헌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다. 당장의 국정 운영에서 성과를 내는 게 중요한 만큼 각종 현안과 이슈를 모두 끌어당기는 개헌 논의가 달가울 리 없다. 하지만 개헌 논의는 언제든 현실화할 수 있는 휴화산이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1987년 헌법 체제’가 현실의 변화를 반영하지 못한다는 국민적 인식이 확인됐고, 특히 정의화 국회의장과 함께 김 대표와 새정치연합 문희상 비상대책위원장, 우윤근 원내대표 등 여야 지도부의 상당수가 적극적인 개헌론자다. 또 18대 국회 당시 국회의장 자문기구에서 몇 가지 헌법 개정안을 성안해놓은 상태다. 불씨만 댕겨지면 활화산이 되는 건 시간문제다.

문재인 의원(왼쪽), 문희상 비대위원장 등 야권 지도부는 박 대통령의 ‘개헌 블랙홀’ 발언을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 시사저널 이종현
“자신이 약점 많은 사람이라는 걸 잊은 모양”

김 대표가 상하이 발언을 한 이튿날 곧바로 한 발짝 물러선 건 이 같은 저간의 사정을 감안한 것이기도 하다. 설령 자신이 진화에 나서더라도 이미 정기국회 이후 올 연말이나 늦어도 내년 초에는 개헌 논의가 본격화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된 만큼 굳이 지금 자신이 나서 당·청 갈등으로 비화하는 상황까지 갈 필요는 없었던 셈이다.

물론 김 대표의 의중대로 판이 온전히 흘러갈지는 미지수다. 무엇보다 임기가 아직 3년 넘게 남은 박 대통령과의 헤게모니 쟁탈전에서 승리한다는 보장이 없다. 개헌 논의가 본격화하면 실질적인 레임덕에 빠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청와대·친박계가 김 대표와 적극적으로 각을 세울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여기엔 양측이 서로를 향해 가진 불신의 깊이가 상당하다는 점도 한몫한다. 한 친박계 핵심 의원은 김 대표의 상하이 발언 직후 “자신이 알게 모르게 약점이 많은 사람이라는 점을 잊은 모양”이라고 혀를 찼다.

표면적으로는 김 대표가 ‘치고 빠지기’로 나가면서 개헌을 둘러싸고 양측이 당장 충돌할 가능성은 크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한번 불이 붙기 시작하면 생사를 건 싸움이 될 수밖에 없다. 현재 권력과 미래 권력이 맞붙을 경우 장기전으로 가면 미래 권력으로 무게추가 기우는 게 일반적이지만, 이는 미래 권력이 나름의 맷집을 갖고 있을 때의 얘기다. 새누리당의 한 중진 의원은 “박 대통령의 임기가 아직 한참 남은 상황이라 활용할 수 있는 권력 수단이 무궁무진하다”며 “김 대표로서는 청와대와 정면충돌하는 시점을 최대한 늦추고 싶겠지만, 이미 자신의 상하이 발언으로 개헌 화살은 시위를 떠났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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