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라’가 북핵 압도하는 ‘비정상’ 바로잡아야
  • 고유환│동국대 북한학과 교수 ()
  • 승인 2014.11.17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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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관계 다시 경색…이희호 여사 방북, 현안 논의 없을 듯

북한의 실세 3인방 황병서·최룡해·김양건이 인천을 방문함으로써 극적으로 되살아난 남북 대화의 불씨가 대북 전단 살포 문제로 다시 사그라졌다. 남북 관계 복원을 위한 기 싸움을 펼치다 대화의 문을 열지도 못한 채 판이 깨질 위기에 처해 있다. 지금까지 남측은 헌법상 표현의 자유를 내세워 대북 전단 살포를 막을 수 없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이에 대해 북측은 지난 2월 제1차 고위급 접촉에서 상호 비방·중상 중지를 합의했기 때문에 대북 전단 살포를 중지해야 대화에 응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10월 말에서 11월 초 사이에 갖기로 한 제2차 남북 고위급 접촉이 이뤄지지 못할 것으로 보이자 통일부는 성급하게 제2차 남북 고위급 접촉이 ‘사실상 무산됐다’고 선언했지만, 정홍원 국무총리는 “완전 무산은 아니고, 북한의 태도로 인해 중단된 상태”라고 했다. 총리는 아직 대화 재개 가능성을 열어두고 봐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북측은 아직까지 공식으로 합의 파기를 선언하지 않았다. 아마도 북측은 미국인 억류자 석방을 또 다른 ‘반전 카드’로 활용해 대화의 끈을 이어가려는 것으로 보인다. 남측에서 ‘호국훈련’이 끝나면 다시 대화를 하겠다는 의도를 가지고 아직은 판을 깨지 않고 대화의 모멘텀을 유지하려 할 것으로 예상된다.

박근혜 대통령이 10월28일 청와대를 방문한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 이희호 여사를 접견하고 있다. ⓒ 연합뉴스
정 총리 “남북 대화, 완전 무산은 아니다”

지금 판이 깨지면 새로운 대화의 판을 짜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조만간 남북한이 관계를 복원하지 못하면 양측 모두 상처를 입게 될 것이다. 연초부터 남측은 통일대박론을, 북측은 중대 제안을 내놓고 관계 복원을 모색했다. 박근혜정부는 드레스덴 선언을 통해 한반도 평화통일 기반 구축을 위한 구상을 밝혔고, 8·15 경축사에서는 환경·민생·문화 분야에서 ‘작은 통로’를 열 것을 선언했다. 그럼에도 관계를 복원하지 못할 경우 정치적 부담을 안게 될 것이다. 남북 관계 개선이 뒷받침되지 않을 경우 박근혜정부의 신뢰 프로세스나 통일대박론에 회의를 품는 여론이 확산될 가능성도 있다.

북한의 김정은 정권도 올해 신년사에서 남북 관계 개선을 중요 국정 과제로 제시하고, 국방위원회 중대 제안과 특별성명, 공화국 성명 등을 연이어 발표하며 남북 관계 개선을 강하게 희망해왔다. 그럼에도 남북 관계 개선을 이루지 못할 경우 김정은 국방위 제1위원장의 리더십에 상처를 받게 될 것이다. 인민 생활 향상을 위한 대외 관계 확장 노력도 차질을 빚게 될 전망이다. 남북 관계 복원이 이뤄지지 못하면 남이나 북이나 모두 그 책임을 상대방에게 떠넘기며 비난 공세를 강화할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전단 문제에 가로막혀 남북 관계 개선 노력이 더 이상 진전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이번에는 미국 정보 총책임자인 제임스 클래퍼 국가정보국(DNI) 국장을 특사로 받아들여 미국인 ‘인질’ 2명을 전격적으로 석방하는 조치를 취했다. 지난 8월 미국 고위 인사의 방북설이 나온 것을 보면 이미 그 무렵부터 북·미 간에는 미국인 석방과 핵문제 등 기타 현안과 관련한 다양한 형태의 접촉이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미국 국무부 고위 관리는 11월12일 북한의 전격적인 미국인 인질 석방과 관련해 “우리는 미국인 석방을 대가로 북한에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며, 이 사건이 “유엔에서 논의 중인 북한 인권 결의안의 문안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보 총책임자의 방북과 관련해 미국 정부는 외교적으로 인질 석방 이외의 다른 확대 해석을 피하려 한다.

북한이 미국인 억류자들을 석방한 타이밍이 절묘하다. 북한은 남북 관계가 다시 꽉 막힌 지금이 ‘인질 카드’를 사용할 적기라고 판단했는지 모른다. 북한이 남북 대화 결렬을 선언하지 않았던 것도 북·미 접촉이 이뤄지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밖에 유엔에서의 북한 인권 결의안 채택,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와 미·중 정상회담 등을 앞두고 인도주의적인 모습을 보여주면서 대외 이미지를 개선하려는 복합적 의도가 깔려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무엇보다 중간선거 패배로 궁지에 몰린 오바마 행정부에 인질 석방이란 외교적 선물을 주고 북한이 원하는 북·미 관계 개선 분위기를 좋게 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피랍자 문제 해결을 위한 북·일 당국 간 대화가 이뤄지는 가운데 인질 석방을 위한 북·미 대화가 지속적으로 이뤄져왔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남북 대화 단절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남북 관계가 복원되지 않으면 향후 북한 문제를 둘러싸고 진행될 양자 및 다자 대화에서 한국이 주도권을 갖기 어려울 것이다.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정성제약종합공장을 방문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11월8일 보도했다. ⓒ 연합뉴스
대북 전단에 대한 정부 결단이 관건

남북 관계가 다시 경색되자 김대중 전 대통령 부인 이희호 여사의 방북이 남북 관계를 풀 또 하나의 계기가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높아지고 있다. 지난 10월28일 이희호 여사는 청와대에서 박근혜 대통령을 만났을 때 “북한을 한번 갔다 왔으면 좋겠는데 대통령께서 허락해줬으면 한다”고 요청했고, 박 대통령은 “언제 한번 여사님 편하실 때 기회를 보겠다”고 대답했다. 이 여사가 6·15 공동선언을 채택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영부인이란 점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망 당시 북한을 방문해 조문하고 권력 계승자 김정은을 만났다는 점에서 막힌 남북 관계를 푸는 데 역할을 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는 것 같다. 통일부가 방북 신청을 승인해 북측이 초청하게 되면 방북이 이뤄질 것이다.

이희호 여사의 방북이 이뤄진다고 하더라도 북한 어린이 돕기 등 인도적 목적 이외의 남북 현안 논의는 어려울 것이란 전망이 지배적이다. 지금은 당국 간 대화 채널이 열려 있기 때문에 북한이 이전 정부의 인사들을 통해 에둘러 말할 필요가 없다. 이미 지난 8월 김 전 대통령 서거 5주기 때 조화를 전달한 북측 김양건 부장 일행이 개성에서 임동원·박지원 등 김대중 정부의 주요 인사들과의 환담을 통해 남측 정부에 전달할 말은 다 했다. 열려 있는 대화 채널을 마다하고 이전 정부 인사들에게 ‘청탁 외교’를 요청하는 것도 모양새가 좋지 않다.

우리 정부가 진정으로 남북 관계 복원에 대한 의지를 가지고 있다면 대북 전단 문제에 결단을 내려야 한다. 대북 전단 문제가 핵, 미사일, 남북 교류 협력 등 남북 현안을 압도하는 ‘비정상’을 빨리 바로잡아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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