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는 자연 아닌 느끼는 자연 그리다
  • 정준모│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
  • 승인 2015.01.29 1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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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망디>전과 영화 <미스터 터너>로 우리 곁에 온 윌리엄 터너

화가 조지프 말로드 윌리엄 터너(Joseph Mallord William Turner·1775~1851년)가 뒤늦게 우리 곁에 찾아왔다. 그의 작품을 포함한 <노르망디>전이 열리고 있고 그의 삶을 다룬 영화 <미스터 터너>가 곧 개봉된다. 터너는 프랑스 인상파 화가에게 영향을 미친 영국 인상파 화가다. 그를 알려면 오늘의 영국을 봐야 한다. 우리가 ‘문화융성’을 기치로 문화복지와 창조적 산업으로서의 문화에 집중하는 것처럼 영국은 1997년 음악·미술·패션 등 예술 분야를 선도하는 분야를 창조 산업으로 지정했다. 그리고 이를 적극 지원해 영국의 이미지로 사용하고 문화적 자산으로 활용하는 ‘쿨 브리타니아(Cool Britannia)’ 사업을 전개했다. 그들은 단순히 보조금을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타 산업의 비즈니스 효율성을 키워주는 핵심 산업으로 위상을 높여 명실공히 문화 콘텐츠 강국으로 자리 잡았다.

태양을 태운 사나이 터너, 인상파의 비조

영국의 문화적 이미지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영국은 보수의 상징이었다. 이런 보수적인 이미지의 영국이 일탈과 도발을 일삼는 뮤지컬과 영화, 소설 그리고 현대미술의 강국으로 부상했다. 그들은 1960년대 대중문화의 아이콘으로 등장한 비틀즈 이후 대중문화와 고급문화의 경계를 넘나드는 새로운 문화, 소비되는 문화를 창조했다. 사실 문학사나 미술사를 살펴보면 영국은 역사와 세계사적 지위에 비해 유명한 예술가를 찾아보기가 어렵다.

① 터너 ② 터너 (1812) ③ 영화 의 한 장면 ⓒ 정준모·진진 제공
하지만 터너가 영국인의 자존심을 세워주고 있다. 터너는 인상파 화가에게 많은 영향을 미친 화가다. 그는 빛을 그리고자 했던 인상파 화가에게 슬쩍 답안지를 보여준 사람으로, 전 세계가 열광하는 인상파의 인기가 더해질수록 그의 가치는 더욱 빛을 발한다.  

이발사로 일하던 아버지 밑에서 태어난 그는 어렸을 때 누이를 잃고 이에 상심한 어머니마저 정신 이상으로 병원에 입원하는 등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의 아버지는 말년에 독신인 아들을 위해 집사처럼 집안을 돌봤고 물감을 준비하거나 캔버스 밑칠을 하는 조수 역할을 하기도 했다. 14세에 로열아카데미에 입학한 터너는 전통적이며 아카데믹한 미술 수업을 받았다. 27세의 젊은 나이에 아카데미 정회원이 되면서 일찍이 작가로서의 성공을 약속받았다. 5년 후인 32세에 예술적 업적을 인정받아 왕립 아카데미 원근법 교수가 됐다. 당시는 이상적이고 영웅적인 주제에 종속된 풍경화가 주종을 이루던 시기로 터너는 이러한 전통과 연결선상에 있는 프랑스 화가 클로드 로랭(Claude Lorrai·1600~1682년)의 풍경화에 경도됐다. 하지만 터너는 곧 로랭의 정적인 세계에서 동적이며 현란한 색채를 지닌 화풍으로 옮겨갔다.

영화 <미스터 터너>(2014년)의 감독 마이크 리는 작가로서 어느 정도 입지를 다졌던 1820년부터 터너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의 인생 후반부를 영화에 담았다. 고집스럽게 본능적으로 자신의 회화를 고집했던 터너 역의 티모시 스폴은 2014년 칸 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거머쥐었다. 폴 제슨이 그의 아버지 역을, 그리고 터너의 추종자이자 하녀인 한나 역의 도로시 앳킨슨은 묘한 백치미와 섬뜩할 만큼의 표정 연기로 영화의 긴장감을, 때로는 실소를 낳게 하는 광폭 연기를 펼친다. 실제로 한나는 터너가 죽은 지 2년 후에 세상을 떠났다. 터너의 연인이었던 과부 소피아(마리온 베일리)는 화가로서의 터너의 삶을 내조한다. 그리고 터너가 변화한 화풍으로 인해 ‘환상’ ‘신비’ ‘수수께끼’ 등의 비난을 감내해야 했을 때 유일하게 그를 방어해준 미술평론가, 예술 후원자, 수채화가, 저명한 사회사상가이자 자선사업가인 존 러스킨 역은 조슈아 맥과이어가 맡았다. 러스킨은 작가의 주요 역할은 ‘자연의 진실’을 드러내는 것이라는 주장을 통해 궁지에 몰린 터너를 변호해줬다.

터너는 그림을 위해 자연을 관찰하고 연구했다. 그의 작품은 보수적인 아카데미즘으로부터 변화를 시도하는데 그 바탕은 단순히 그의 상상력에 기반을 두기보다는 자연에 대한 충실한 관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는 인위적으로 그림을 그리기보다는 화면에 등장하는 소재들이 어떤 역동적인 힘 또는 세력에 의해 그 모습을 드러내는 긴장감을 보여준다. 그는 더 이상 서사적인 서술에 매달리기보다는 ‘상황’ 그 자체와 자연 현상의 ‘전달’에 집중한다. 

“내가 눈보라를 그린다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것을 이해하게끔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다. 나는 그 장면이 어떤 느낌이었는지를 보여주고 싶을 뿐이다”는 그의 말에서 보듯 그는 보이는 자연이 아니라 느끼는 자연을 그리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미술학도에게 남긴 그의 이 조언은 그의 미술세계를 여는 키워드가 될 수 있다. 화면에 전개된 빛과 색채의 운동과 거기에서 발산하는 강한 에너지에 더 비중을 두었다. 그에게 자연은 역동적이며 유기적이다. 그래서 눈이 부셔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강한 빛 아래서는 보이지 않는 것을 기억이나 지식을 통해 그려내는 사실주의를 넘어 눈에 보이지 않는 그대로 그리는 방법을 택했다. 그래서 그는 때로는 작열하는 빛으로 인해 아무것도 없는 빛으로 가득 찬 흰색 그림을 그렸다.

터너는 자연에서 보이는 현상보다는 스스로가 느끼는 역동적이고 유기적인 성질에 집중했다. 그는 자연에 대한 관찰을 통해 느낄 수 있는 우주적 질서가 자신의 마음에 형성된 표현 욕구를 화면에서 조형적으로 결합시켰다. 그는 자연과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해 비관적이었다. 이런 정서는 그의 미완성 시집 <덧없는 희망>에서도 드러난다. 그의 화면은 아는 것, 본 것 등 인위적인 것보다는 스스로 체득한 자연을 묵묵히 자신의 질서를 통해 대자연의 숭고함과 거기에서 드러나는 힘의 조화들로 채워진다.

터너는 로랭에게서 영향을 받았고 모네에게 영향을 끼쳤다. ① 클로드 로랭 (1642) 유화 105X152cm ② 모네 (1872) 캔버스에 유채 48×63cm 마르모탕 미술관
풍경화가에서 휘몰아치는 구름, 바람의 세계로 

이런 그의 자연을 대하는 태도는 고전주의와 자연주의, 낭만주의를 넘어 1870년 보불전쟁 때 영국으로 몸을 피했던 모네·피사로 등 프랑스 인상파 좌장들에게 많은 영향을 줬다. 터너는 여행을 통해 자연을 몸으로 겪은 ‘장소의 특수성’을 중시했다. 자연의 위대한 힘과 특질에 몰두하면서 이탈리아, 프랑스, 스코틀랜드는 물론 플랑드르 지방까지 두루 여행하면서 많은 풍경화를 그렸다. 그리하여 느끼는 자연을 빛과 색을 통해 보이는 대로 그리는 새로운 사실주의를 실천한다.

그는 수많은 곳을 직접 여행하고 스케치를 하면서, 60년 이상 쉬지 않고 노예처럼 그림만 그렸다. 항상 아무도 보지 못하도록 한 채 혼자 작업하고 작품을 잘 팔지도 않았다. 사생활도 잘 알려지지 않아 죽은 후에야 그에게 숨겨놓은 여자와 딸 둘이 있다는 것이 알려졌다. 자신의 작업에 대한 자신감으로 가득 찼던 그는 자신의 작품을 전시할 미술관을 세운다는 조건으로 국가에 스케치 1만9000점과 스케치북 200여 권을 기증해 현재 테이트 브리튼에 11개의 전시실이 마련돼 있다.

그런 점 때문에 영화는 아쉬움이 많다. 터너의 관점이나 미학보다는 데카당스한 예술가의 한 사람으로 그리고 있다. 자연에 대한 그의 탐구와 태도를 보여주기 위해 네덜란드에서 돌아오는 돛대에 스스로 묶여 그가 매혹됐던 폭풍우 치는 바다의 대기와 하늘을 현장에서 직접 관찰했지만 영화 속의 그 장면은 예술가의 열정보다는 객기와 허세로 보이게 만들었다. 영화 속 터너가 괴짜에다 독선적이며 괴팍하고 산만한 사람으로 그려져 그의 예술에 대한 열정을 가리고 있는 점은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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