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 한국의 가벌] #15. ‘구인회-구자경-구본무’ 장자 승계 전통 이어져
  • 소종섭│편집위원 ()
  • 승인 2015.02.11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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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구본무 양자로 입적된 구광모 상무 ‘후계자’ 수업

1969년 가을, LG그룹 창업주 구인회는 일본 도쿄 경찰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그해 봄부터 어딘지 모르게 머리가 아프고 무겁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그는 어느 날 출근길에 어지럼증과 구토 증세를 보였다. 크게 놀란 가족과 주치의 권유로 그는 정밀검사를 받기 위해 일본에 와 있었다. 죽음의 그림자가 서서히 그를 찾아왔다. 구인회도 자신이 다시 일어서기 쉽지 않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해 추석 이틀 뒤 빨리 오라는 연락을 받고 구인회의 장남 구자경은 일본행 비행기에 올랐다. 그날 밤 있었던 부자간의 대화를 LG가 펴낸 구인회의 전기 <한 번 믿으면 모두 맡겨라-LG창업회장 연암 구인회의 삶>에서는 이렇게 기록했다.

“한밤중 아버지는 살며시 눈을 떴다. 장남 자경의 걱정스러운 얼굴이 거기 있었다. ‘아버님, 뭐 좀 드시겠습니까?’ 아버지는 한참 지난 후에 입을 열었다. ‘너희 어머니는 연락됐느냐?’ ‘아마 곧 도착하실 겁니다.’ 아버지는 마른입을 물로 축인 다음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자극(구자경의 막내 동생)이는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으니 자기 좋다는 처녀하고 혼인시키고, 네 장남 본무는 아무것도 보지 말고, 오직 인물 본위로 사람을 골라서 혼인시켜야 한다.’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네 장녀는 김용관씨 막내 아들하고 얘기를 해놓았다. 짝 지어주거라. 돈만 많으면 뭐 하노, 돈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다.’

1986년 2월 구자경 LG 명예회장(가운데)의 고려대 명예 경제학 박사 학위 수여식장. 구 명예회장의 오른쪽은 부인 하정임 여사, 왼쪽은 구본무 LG그룹 회장. ⓒ 시사저널 포토
지금까지 이토록 부드럽고 인자하신 말씀을 드러내놓고 표현한 일이 없는 아버지였다. 마음속에는 철철 넘쳐흐르는 애정을 간직하면서도 겉으로는 항상 엄격하고 무표정했던 아버지였다. ‘너는 장남이라서 학교 선생 그만두고 공장에 와서 고생하게 했을 때 아버지 많이 원망했제? 그래서 니는 많은 것 안 배웠나. 이제 공장 돌아가는 일에 관해서는 니도 박사 다 됐제? 앞으로는 자신을 갖고 일하거라.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좀 쉴걸 그랬제. 내가 몸을 너무 혹사했다.’”

1970년 1월, 2대 회장 구자경 만장일치 추대

구인회의 상태가 날로 악화하던 어느 날 구인회의 첫째 동생 구철회 락희화학 사장은 자신이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이 다가왔음을 알았다. 그는 동생들과 조카들을 한자리에 모았다. “나는 이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날 생각이다. 내가 물러나는 것을 전제로 하고 너희들 각자가 허심탄회하게 생각하고 상의해서 앞으로 닥쳐올 일들을 헤쳐나가도록 해라. 진심으로 믿고 당부한다.” 구철회는 그렇게 말하고는 방에서 나가버렸다. ‘후계’ 자리에 욕심이 없다는 것을 가족들에게 선언한 것이다.

1969년 12월31일 LG 창업주 구인회는 63년의 생애를 마감했다. 1970년 LG의 시무식은 창업주의 장례식을 치른 뒤인 1월6일 열렸다. 이날 구철회는 신년사에서 LG의 전통이 된 ‘장자 승계 원칙’을 천명했다. “저는 경영 능력 면에서나, 연령 면에서나, 또 돌아가신 회장님의 뜻을 이어받아 펼쳐나가는 데 있어 그야말로 유일한 적임자라 할 수 있는 구자경 부사장을 제2대 회장으로 추대하는 것이 좋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여러분 의견은 어떤지 알고 싶습니다.” 1월9일 그룹 합동이사회는 구자경 부사장을 제2대 회장에 만장일치로 추대했다.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은 자전 에세이 <오직 이 길밖에 없다>에서 아버지에 대해 이렇게 술회했다.

“6·25 동란이 일어나기 직전인 1950년 5월, ‘교직을 그만두고 내 일을 도우라’는 창업 회장(구인회)의 말씀에 따라 럭키금성에서의 나의 새로운 인생은 시작됐다. 나는 당시 3년 동안 자청해 고학년 담임을 맡아 무거운 책임감을 갖고 우리 역사와 글을 공부하면서 가르쳤다. 6학년 담임을 맡아 진학 지도를 맡아 높은 진학률을 냈다고 해서 학교에서도 사표 제출을 극구 만류해 고민이 클 수밖에 없었다.

내게 맡겨진 일은 고향 선배 한 분과 함께 몰려드는 상인들에게 제품을 나눠주고 낮 동안에는 공장에서 일하다가 밤이면 하루씩 번갈아서 숙직을 하는 것이었다. 이런 생활이 4년 가까이 됐지만 창업 회장께서는 고생한다는 위로 한마디 없었다. 우습게도 30줄에 들어선 그때 내 간절한 소망은 창업 회장으로부터 칭찬 한마디 들어보는 것이었다. 창업 회장께서는 겉으로 표현만 하지 않았을 뿐 자식의 이런 심정을 헤아리고 계셨다.

병상에서 운명을 앞두고 투병하시던 어느 날 이렇게 나를 위로하시는 것이었다. ‘너 나를 원망 많이 했제. 기업을 하는 데 가장 어렵고 중요한 것이 바로 현장이다. 그래서 본사 근무 대신에 공장 일을 모두 맡긴 게다. 그게 밑천이다. 자신 있게 기업을 키워나가라.’ 병상을 지키고 선 나에게 하신 창업 회장의 이 한마디는 결국 유언이 되고 말았다.”

1970년대 부산 연지동 자택에서 찍은 가족사진. 뒷줄 왼쪽부터 구본준, 구본무 회장, 구자경 명예회장, 구본무 회장의 모친 하정임, 여동생 구훤미, 구본능. 앞줄 왼쪽부터 구본식, 조모, 증조모, 여동생 구미정. ⓒ 시사저널 포토
구자경, 일제 군대 모면하고자 17세에 결혼

“나는 창업 회장께서 럭키금성을 창업하기 이전,  몇 차례 사업에서 고전(포목상 시절의 대홍수, 목탄 사업 등)하시는 가운데 전 가족이 겪은 어려움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그때의 숱한 위기와 어려움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나는 하찮은 토끼 한 마리를 잡는 데도 최선을 다하는 호랑이처럼 ‘과연 지금 나는 이 의사결정에 최선을 다했는가?’ 하고 항상 자문해본다.”

구자경은 17세 때인 1942년 5월 고향인 경남 진주시 지수면 승산마을 인근 대곡면 단목리의 대지주 하순봉의 장녀 하정임과 결혼했다. 일제하에서 군대에 붙들려가는 것을 모면하고자 부친 구인회가 일찍 결혼시킨 것이다. LG가는 자손이 많기로 유명하다. 창업주인 구인회는 6남 중 맏아들이었고 6남 4녀, 즉 10남매를 낳았다. 구자경도 4남 2녀를 뒀다. 구자경은 진주고보(진주중)-진주사범을 마치고 고향인 지수보통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했다.

1950년 LG에 합류하기 전까지 부산의 부산사범대 부속국민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했다. 신상우 전 국회부의장, 권근술 전 한겨레 사장,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 부인 한인옥씨 등이 제자다. 신 전 부의장은 한 TV 프로그램에 출연해 ‘구자경 선생님’에 대해 ‘호랑이 선생님’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LG그룹 회장을 맡고 있는 구본무가 장남이다. 구자경이 50세이던 장남 구본무에게 회장직을 넘겨준 것은 1995년 2월이다. 구자경이 취임하던 첫해 LG 매출은 520억원이었는데 1994년에는 30조원을 넘었다. 당시 구자경은 언론 인터뷰에서 “구본무 회장이 15년을 넘기겠느냐, 육체적으로 힘들어 한계에 부딪힐 것이다. 4세 경영 체제에 들어서면 소유와 경영은 자동적으로 분리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구본무는 “좋은 사람이 나타난다면 15년이 아니라 10년 후에라도 물러날 수 있다”고 답했다. 그런데 어느덧 구본무는 올해로 70세가 됐다. 구자경이 은퇴한 시점도 70세였다. 이 때문에 재계 호사가들은 ‘70세 은퇴’가 LG의 전통이 될 것인지 주목하고 있다.

‘후계자’ 수업을 받고 있는 구광모 LG그룹 상무 ⓒ 시사저널 포토
구본무, 김태동 전 장관 딸 김영식과 결혼

구본무는 삼성고를 졸업하고 연세대 상대에 다니다가 육군에 현역으로 입대한 후 제대해 미국 애슐랜드 대학 유학을 마친 1972년 김태동 전 보건사회부장관의 딸 김영식과 결혼했다. 이화여고를 나와 이화여대 영문과를 다닌 김영식은 미국에서 도자기를 공부하던 중 한국 민화에 빠져들었는데 현재는 수준급 실력파로 알려졌다. 김씨는 미국에서 귀국한 후 이화여대 색채디자인연구소 전통채색화 전문 과정에 다니며 해마다 민화작가 그룹전에 참여해왔고, 개인전도 몇 차례 가졌다. 2013년에는 둘째 딸 구연수(당시 고2)와 함께 ‘김영식-구연수 모녀전’ 미술 전시회를 열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구본무-김영식은 원래 1남 2녀를 뒀다. 친아들인 구원모씨는 1994년 19세의 나이로 유명을 달리했다. 당시 불의의 사고를 당했다는 소문만 전해졌을 뿐 정확한 사망 원인은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고 있다. 큰딸 구연경은 연세대 사회복지학과와 미국 워싱턴 대학 사회사업학과 대학원을 졸업했다. 2006년 곤지암컨트리클럽에서 가까운 친인척들만 참석한 가운데 윤관 블루런벤처스 사장과 조촐하게 결혼식을 올렸다. 윤관은 미국 스탠퍼드 대학에서 경제학과 심리학을 복수 전공하고 경영공학 대학원을 졸업한 후 2000년 블루런벤처스의 전신인 노키아벤처파트너스에 입사했다. 블루런벤처스는 노키아가 최대주주인 회사로 운영자금만 1조원에 이르는 다국적 벤처캐피털이다. 윤관은 고 윤태수 대영 알프스리조트 회장의 차남이다.

주목되는 사람은 2004년 구본무의 양자로 입적된 ‘후계자’ 구광모 LG그룹 상무다. 구광모는 구본무의 아랫동생인 구본능 희성그룹 회장의 장남이었는데 구본무가 딸만 둘이어서 대를 잇기 위해 장남의 양자로 간 것이다. 경복초등학교, 영동고를 졸업한 구광모는 미국으로 가 로체스터 공대를 나왔고 스탠퍼드 대학에서 경영학 석사(MBA)를 취득했다. 2009년 가까운 친인척들만 참석한 가운데 중소 식품회사 보락 정기련 대표의 장녀인 정효정과 결혼식을 올렸다. 재계에서는 1978년생인 구광모의 나이로 볼 때 ‘장자 승계 원칙’을 지키는 차원에서 승계 시기가 좀 늦춰질 가능성도 있다고 보고 있다. LG그룹에는 ‘구인회 창업 회장-구자경 명예회장-구본무 회장’으로 이어지는 장자(長子) 승계 원칙이 있다. 또 여성을 경영에 참여시키지 않고 있다.

구자경의 장녀 구훤미는 1970년 김용관 전 대한보증보험 사장의 4남인 김화중과 혼인했다. 김용관은 전경련 회장과 (주)경방 회장을 지낸 김용완의 넷째 동생이다. 2004년 세상을 떠난 김화중은 희성금속 사장을 지냈다. 구훤미-김화중 부부는 두 딸을 뒀는데 둘째 딸 김선혜가 대림그룹 이준용 명예회장의 맏아들인 이해욱 대림산업 부회장과 결혼했다. 구자경의 차남 구본능 희성그룹 회장은 희성금속 사장·회장을 지낸 강세원의 딸 강영혜와 결혼했다가 사별한 뒤 1998년 17세 아래인 차경숙과 재혼했다. 아들 구광모는 구본무의 양자로 보냈고 딸 구연서가 있다. 희성그룹은 희성전자·희성정밀·희성금속·한국잉겔아드·희성화학·삼보지질 등 6개 계열사를 거느리고 있다. 1995년 분가했다.

구자경의 3남 구본준 LG전자 부회장은 사업가 김광일의 딸 김은미와의 사이에 1남 1녀를 뒀다. 아들 구형모는 미국 코넬 대학 경제학과를 나와 2014년 4월 LG전자 대리로 입사했다. 경영전략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딸 구연제는 학업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구자경의 차녀 구미정은 대한펄프 창업주인 고 최화식 회장의 아들 최병민 깨끗한나라 회장과 결혼했다. 두 사람은 2남 1녀를 뒀다. 큰딸 최현수는 깨끗한나라 경영기획실장을 맡고 있다. 구자경의 4남 구본식 희성그룹 부회장은 조경아와 결혼해 딸 구연승·구연진 그리고 아들 구웅모를 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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