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많던 구로의 ‘공순이’는 어디로 갔을까
  • 이은선│매거진 M 기자 (.)
  • 승인 2015.08.19 16:38
  • 호수 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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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니스비엔날레 수상으로 한국 다큐 새 지평 연 <위로공단>

1970년대 구로공단을 가득 채웠던 여공들은 어디로 갔을까. 임흥순 감독의 <위로공단>은 그때 그 시절의 이야기에서부터 여성 노동자들의 현재까지를 연결하는 다큐멘터리다. 카메라 앞에 앉은 다양한 연령과 직군의 여성들로부터 흘러나온 이야기를 듣다 보면 한국 현대 노동사 그 자체를 되짚게 된다. 그것은 1978년 동일방직 사측이 노동조합 대의원 선거를 방해하려 여공들에게 똥물을 끼얹은 동일방직 오물 투척 사건, 1979년 생존권 보장을 요구하며 농성하던 여성 노동자 중 한 명이 사망한 YH무역 사건, 2005년 비정규직 노동자 해고로부터 촉발돼 오랜 투쟁이 이어졌던 기륭전자 사태, 그리고 삼성반도체 사태까지 노동자들이 착취당하고 투쟁했던 그 모든 시간의 기록이다.

다큐는 여성 노동자들이 고된 육체노동을 견디던 시절부터 감정노동까지 강요받도록 교묘하게 확장되는 노동 시장의 변화와 부조리하게 외연을 확장해가는 자본의 이동을 그린다. 과거 그들은 평범하게 “(내가 만드는) 나이키 신발을 신고 싶은” 노동자였으며, “하루 온종일 다리가 퉁퉁 붓도록 일하고 또 일터로 나가도 방세조차 제대로 내기 어려웠던” 불합리한 노동 구조의 피해자였다.

ⓒ (주)엣나인필름

작업복 입은 소녀를 더 어린 소녀가 이끌다

성실하게 일하면 정당한 대가를 얻고 사람답게 살 수 있다고 믿었던 그들이 묻는다. 그 시절, 성실하게 일하지 않았던 노동자가 어디 있느냐고. 이들이 겪었던 고통은 현재 캄보디아와 베트남에서 고스란히 재연되고 있고, 당시 구로공단 여공들이 채웠던 자리는 오늘날 조선족 여성이 메우고 있다. 항공사 승무원과 콜센터 직원이 겪어야 하는 수치심과 모멸감, 견디기 힘든 노동 강도의 문제는 비단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그 형태만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변했을 뿐 부조리한 노동의 역사는 지금 이 시간에도 반복되고 있다.

<위로공단>은 단순히 과거 이런 일들이 일어났다는 정보 전달이나 현 상황을 고발하는 차원에 머무르지 않는다. 이 다큐는 여성 노동자들의 얼굴을, 내면을, 그들이 겪었던 시간을 들여다보고 기억하려는 시도라는 점에서 특별하다. 동일방직 앞에서 사진관을 운영하던 사진사가 그날의 투쟁을 기억하며 “그렇게 맑은 얼굴은 어디에서도 보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이 인상적인 고백 중 하나로 기억되는 건 그래서다. 한진중공업 사태의 상징적 인물인 김진숙씨가 카메라 앞에서 “내가 한 번도 선택한 적이 없었던” 자신의 삶을 회고할 때, 어느 누가 이 읊조림을 단순한 역사의 기록으로만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형식적으로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위로공단>은 영화적 형식으로 보면 실험 다큐, 미술 장르의 분류로 보면 영상 설치라 할 수 있는 작품이다. 카메라 앞에 선 여성 노동자들의 이야기가 이어지는 중간중간, 그들의 이야기를 잇고 봉합하는 것은 시적인 이미지다. 영상은 때때로 하늘을 뒤덮은 까마귀 떼, 바닥을 기는 개미의 모습으로 이어진다.

감독이 더욱 적극적인 오브제로 활용하는 것은 눈을 가린 소녀의 모습이다. 작업복을 입고 눈을 가린 소녀를 더 어린 소녀가 끌고 숲길을 헤쳐 간다. 소녀는 앞이 보이지 않는 상태로 자신이 있는 공간을 더듬거리며 나아간다. 숲길에서 옥상으로, 다시 재개발 지역 공간으로…. 묻히고 가려졌던 것들은 영화가 포착한 ‘앞이 보이지 않는 소녀’라는 이미지를 통해 하나의 구체적인 형태로 구현된다. 그리고 그 이미지를 지켜볼 때 느끼는 심상 자체가 이 다큐를 보는 체험의 결과로 남는다.

“울고 짜고 해봐야 소용 있나요 / 막노동판에라도 나가봐야죠 / 불쌍한 언니는 어떡하나요 / 오늘도 철야 명단 올렸겠지요” 아득한 숲을 헤매는 소녀들의 모습 위로 이 노래가 흐를 때, 여성 노동자가 가족을 먹여 살리며 시대 자체를 위로했듯 이제 우리가 그들을 위로해야 한다는 영화의 제목이 온전한 의미로 다가온다. 이는 관객의 해석을 요구하고 좀 더 적극적으로 이 작품에 동참하기를 요구하는 장치들이다. 수동적으로 이야기를 듣는 대신, 관객은 여성과 노동이라는 화두를 마치 하나의 전시를 체험하듯 탐험하게 된다. 이 다큐의 이미지들이 결코 아름다운 상징에만 그치지 않는 이유다. <위로공단>은 지난 5월 열린 세계 최대 규모의 미술 행사인 제56회 베니스비엔날레에서 한국 영화 최초로 은사자상을 받으며 작품의 의미를 온전히 담아낸 미학적 성취를 인정받았다.

한국 다큐, 상업적 성공과 작품성 모두 잡다

임흥순 감독은 평생 노동자로 살아온 자신의 가족 이야기를 시작으로 노동자 계층과 여성 공동체 문제 등에 꾸준히 관심을 갖고 문제제기를 해온 예술가다.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에게 헌정한 단편 <긴 이별>(2011년), 제주 4·3 항쟁과 오늘날 강정마을 이야기를 미술로 재현한 다큐멘터리 <비념>(2012년) 등을 연출했다. 임 감독의 작업은 한국 현대사의 상흔과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문제들을 들여다보려는 시도다.

<위로공단>은 그가 옛 구로공단 지역을 둘러보다가 문득 과거 그곳에서 일하던 여공들의 존재를 떠올리며 시작된 프로젝트다. 여기에 봉제공장에서 40년 넘게 일한 어머니, 백화점 매장에서 일용직으로 일해온 여동생, 보험설계사인 형수의 삶을 지켜봤던 감독의 개인사가 자연스럽게 겹쳤다. 그러면서 임 감독은 구로공단에서 실제로 일했던 여성 노동자들과 나눈 인터뷰를 시작으로 3년간 다양한 직군에서 일하는 여성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담기 시작했다. 다큐에 등장하는 여성 노동자 중에는 임 감독의 어머니도 있다.

임 감독 같은 미술가 출신 감독들이 만드는 실험 다큐는 최근 몇 년 사이 한국 다큐계에 나타난 중요한 경향 중 하나다. <만신>(2013년)을 만든 박찬경 감독이 <다시 태어나고 싶어요, 안양에>(2010년)를 통해 다큐의 형식을 띤 영상 작업을 시도한 것이 미술가들이 만든 실험 다큐의 시작으로 꼽힌다. 새로운 작업 환경 만들기를 꾸준히 시도하는 영상 예술가들과 영화 매체의 작업 방식이 자연스럽게 연결되기 시작한 것이다.

최근 한국 다큐멘터리는 상업적 성공과 작품성을 동시에 거머쥐는 비약적 성취를 거두고 있다. 지난해 개봉한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는 480만 관객을 동원했고, <위로공단>의 베니스비엔날레 수상은 세계의 이목을 끌었다. 다큐 제작 지원 투자도 늘어나는 상황이다. <두 개의 문>(2010년) 같은 행동주의(액티비즘) 독립 다큐, TV 다큐를 만들던 이들이 만드는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와 같은 방송 다큐, 그리고 <만신> <위로공단> 같은 실험 다큐 등 장르 내 영역이 한층 풍성해진 덕분이다. <위로공단>은 현재 한국 다큐가 어디까지 그 형식을 넓혀가고 있는지를 알려주는 좋은 지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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