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양건 부인을 어린 김정은이 ‘이모’라고 불러
  • 이영종│중앙일보 통일전문기자 (.)
  • 승인 2015.09.09 16:05
  • 호수 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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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전부 수장으로 건재 과시한 김양건, 김영남 이어 대외적 국가원수 물망

김양건 노동당 중앙위 비서 겸 통일전선부장이 평양 권력의 핵심으로 뜨고 있다. 김정은 국방위 제1위원장의 두터운 신임을 바탕으로 승승장구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그의 약진은 다소 의외라는 게 대북 정보를 다루는 관계자들의 평가다. 남북 관계가 수년째 풀리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대남 문제를 담당하는 통일전선부장이 잘나가는 건 뜻밖이란 점에서다.

8월 말 판문점에서 열린 남북 고위급 접촉의 전면에 나서면서 그의 건재는 다시 한번 확인되었다. 오히려 주가는 껑충 뛰었다. 위기 국면에서 소방수로 김양건을 투입하려 했다는 점에서 그를 각별하게 챙기는 김정은의 의중을 읽을 수 있다. 대남 라인의 잇단 숙청과 퇴출로 인해 몰락 위기에 빠진 상황에서도 김양건의 입지만은 흔들리지 않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자칫 그의 자리를 넘볼 수 있는 통전부의 2인자들이 연이어 숙청당하는 가운데서도 수장인 김양건은 굳건히 자리를 지켜왔다. 반면 김대중·노무현 정부 10년의 대북 햇볕정책이 문을 닫은 직후인 2008년부터 대남 핵심 간부들은 하루아침에 비참한 운명을 맞았다. 대대적인 검열 열풍을 피하지 못한 것이다.

북한 김양건 당 비서(오른쪽)가 8월25일 무박 4일 동안의 마라톤 협상을 통해 남북 고위급 접촉에서 6개 항에 합의하고 홍용표 통일부장관과 악수하고 있다. ⓒ 통일부제공

통전부 2인자 최승철·원동연 등 줄줄이 숙청

최승철 당 통일전선부 부부장은 대남 정책에서의 과오를 책임지고 처형당했다. 회담을 위해 남측과 접촉하는 과정에서 뇌물과 향응을 받았거나 남한 사회에 대한 환상을 심었다는 게 이유로 알려져 있다. 보수 정권인 이명박 정부의 등장 등 정세에 기민하게 대처하지 못했다는 혐의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승철 숙청은 그가 2차 남북정상회담 당시 노무현 대통령의 방북 영접을 맡은 북한 최측근 실세였다는 점에서 충격을 줬다. 남북 장관급 회담 북측 단장을 맡아 남한에도 수차례 왔던 권호웅 내각 책임참사도 비슷한 이유로 숙청됐다는 게 관계 당국의 파악 내용이다.

지난 2월 발간된 이명박 전 대통령의 회고록이 북한 대남 라인의 부적절한 처신을 폭로했지만 김양건은 끄떡없었다. 회고록 <대통령의 시간>은 김양건이 2009년 10월 임태희 당시 노동부장관과의 싱가포르 접촉 때 “합의문도 없이 돌아가면 죽는다”고 언급한 것으로 설명한다. 회고록 발간 이후 김양건의 심복이자 대남 2인자인 원동연 통일전선부 부부장이 숙청당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렇지만 이 와중에도 김양건은 건재했다. 김정은의 변함없는 신임 때문으로 풀이된다.

김양건이 외풍을 맞지 않는 배경을 두고 김정은의 후계자 시절 세운 공훈 때문이란 분석이 나온다. 대북 정보 당국자는 “김정은이 권력을 거머쥐는 데 김양건이 상당한 기여를 했다는 첩보가 있다”고 귀띔했다. 2010년 가을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셋째 아들인 김정은을 후계자로 추대하는 과정에서 줄을 댔다는 얘기다. 김정은의 생모인 고영희(2004년 사망)와의 각별한 인연 때문이란 첩보에도 당국은 주목한다. 김양건 비서의 부인이 고영희와 가깝게 지냈고 이 때문에 어린 김정은이 ‘이모’라고 불렀다는 얘기다.

판문점 고위 접촉에 나온 김양건과 황병서 모두 김정은을 후계자로 옹립하는 과정에서 일등공신이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김정은도 이런 측면에서 가장 믿을 만한 두 사람을 남한에 파견한 것이란 얘기다. 노동당 핵심 부서인 조직지도부에서 잔뼈가 굵은 황병서도 김정은의 생모 고영희 쪽에 줄을 섰다. 김양건과 황병서 모두 김정은 정권의 탄생 과정에 상당한 지분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두 사람 모두 김정은 정권 들어 특별히 부침을 겪지 않은 걸 두고도 같은 분석이 나온다.

김양건이 김정은 권력을 지탱하는 핵심으로 존재를 과시한 건 장성택 처형 과정에서의 역할 때문이다. 김정은 제1위원장이 고모부인 장성택 국방위 부위원장을 전격 체포하고 재판을 거쳐 처형하는 과정을 사전에 기획하고 실행한 그룹에 김양건이 포함됐다. 김정은 체제의 신권력으로 꼽히는 이른바 ‘삼지연 8인방’이다. 2013년 11월 백두산 지역인 삼지연을 찾은 김정은 수행 그룹에는 김원홍 국가안전보위부장, 황병서 당시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 등과 함께 김양건이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이들은 평양 귀환 직후 장성택 세력을 거세하는 작전을 펼쳐 김정은 권력의 기반을 더욱 공고히 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부드러운 성품에다 신사 스타일의 외적 틀까지 갖춘 점도 최고 권력자의 신임을 얻는 데 일조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아들뻘인 김정은에게 깍듯하게 대하는 모습도 마찬가지다. 2013년 12월에는 마식령스키장에서 김정은의 지시로 스키를 타다 다리에 골절상을 입기도 했다. 지도자의 말에 복종하는 스타일을 과시한 것이다.

북한 김양건 당 비서(오른쪽)가 8월25일 무박 4일 동안의 마라톤 협상을 통해 남북 고위급 접촉에서 6개 항에 합의하고 홍용표 통일부장관과 악수하고 있다. ⓒ 통일부제공

김정은의 대남 전략 최전방에서 임무 이행

김일성종합대에서 프랑스어를 전공한 김양건 비서는 본래 노동당의 국제부에서 잔뼈가 굵었다. 국제부 부부장과 부장을 거치면서 외교협회 부회장과 북·일우호친선협회장도 지냈다. 그가 대남 분야를 맡은 건 2007년 3월 노동당 전문 부서인 통일전선부의 부장을 맡으면서다. 이후 대남 사업을 관장하며 능력을 인정받았다. 김정일 체제 말기에는 조선대풍국제투자그룹의 이사장을 맡는 등 활동 폭을 넓혔다.

김정은 체제 들어 김양건의 약진이 계속되면서 북한의 대외적 국가원수 역을 맡고 있는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을 대신하게 될 것이란 전망도 힘을 얻고 있다. 올해 87세인 김영남의 퇴진이 임박했다는 점에서다. 김영남도 김일성대를 나와 노동당 국제부장을 거치는 등 김양건과 유사한 프로필을 갖고 있다.

김양건 비서는 판문점 고위 접촉 합의를 이행하기 위한 당국회담의 대표로 나서게 된다. 홍용표 통일부장관과 이른바 ‘통-통(통일부와 통일전선부) 라인’을 가동해야 한다. 김정은 제1위원장의 대남 전략을 최전방에서 이행하는 임무를 통해 더욱 입지를 다질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큰 돌출 변수만 없다면 김양건이 조만간 북한의 국가수반 격인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자리를 차지할 가능성이 크다는 전망에 힘이 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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