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부’를 떠나 ‘화성’을 개척하다
  • 허남웅 | 영화평론가 (.)
  • 승인 2015.10.07 18:36
  • 호수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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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션>과 <슬로우 웨스트>를 통해 본 미국의 개척정신

태초에 서부가 있었다. 지금은 우주가 그 역할을 대신한다. 리들리 스콧이 연출하고 맷 데이먼이 출연한 <마션>에 대한 인상이다. 이에 동의하기 힘들 독자가 많을 줄 안다. <마션>이 SF영화지 어찌 서부극이냐고? 이에 대해 같은 날 국내 개봉하는 서부극 <슬로우 웨스트>를 슬쩍 지렛대 삼아 설득해보려 한다.

마크 와트니(맷 데이먼)는 NASA(미국 항공우주국) 우주인 동료들과 함께 화성을 탐구하던 중 불의의 사고를 당한다. 모래폭풍에 휩싸여 정신을 잃고 만 것. 동료들은 그가 죽었다고 판단해 와트니를 화성에 남겨둔 채 떠난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지구의 NASA 수뇌부 또한 언론 브리핑을 통해 마크의 죽음을 공식화한다.

한편, 모래폭풍이 잠잠해진 화성에서 마크는 극적으로 되살아난다.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 주변을 둘러봐도 보이는 사람 하나 없이 화성에 설치한 거주 모듈, 즉 간이 기지만이 눈에 들어온다. 그곳으로 몸을 피한 마크는 야속한(?) 동료들을 탓하는 대신 화성에서 살아남을 방법에 몰두한다.

ⓒ (주)이십세기폭스코리아

얼마 전, NASA는 화성에 소금물 개천이 흐른다는 사실을 밝혀 놀라움을 주었다. 이는 화성에 외계 생물체가 존재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우주를 향한 인간의 열망은 호기심의 차원을 넘어 이제는 정착해 살 수 있는지 여부로까지 나아갔다.

그렇게 화성은 다른 행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지구와 환경이 비슷한 곳으로 평가받는다. 그래서인지 화성을 배경으로 한 영화와 소설은 꽤 익숙하다. 대표적으로 소설가 레이 브래드버리와 영화감독 브라이언 드 팔마는 제목에 ‘화성(Mars)’이 들어가는 <화성연대기>와 <미션 투 마스>를 각각 쓰고 연출했다.

<마션>의 경우, 워크래프트 2를 제작한 천재 프로그래머 앤디 위어의 동명 베스트셀러 소설을 <에이리언> <블레이드 러너> <프로메테우스> 등 SF영화에 일가견이 있는 리들리 스콧이 영화화했다. 또한 <마션>의 와트니 역할을 맡은 맷 데이먼은 <인터스텔라>에서 한 행성에 따로 떨어져 수십 년을 살아온 만 박사를 연기한 적이 있다.

<마션>의 화성, 서부극 배경과 흡사

화성은 외계 생명과 조우할, 혹은 지구를 대체해 정착할 공간으로 영화와 소설을 비롯한 많은 문화 매체에 영감을 주었다. 여기서 방점은 바로 ‘개척’이다. 외계 생명을 만나 함께 문명을 건설하기 위해 선행돼야 할 것은 우주로 나아가 목표한 행성에 터를 마련하고 살아갈 수 있는지를 시험하며 새로 길을 닦는 일이다.

의도치 않게 화성에 거주하게 된 <마션>의 와트니는 거주 모듈을 터전 삼아 먹는 일부터 해결하기로 한다. 거주 모듈에 비축된 비상식량만으로는 지구와 교신이 끊어진 상황에서 장기간 버티기가 불가능하다. 낮에는 영상 35도, 밤에는 영하 63도까지 떨어지는 기후에서 와트니는 거주 모듈 안에 10평 남짓한 땅을 일궈 감자를 기르는 데 성공한다.

미국인은 개척에 익숙한 민족이다. 역사 자체가 그렇다. 콜럼버스가 우연히 신대륙을 발견하자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이민자들이 유럽과 아프리카, 아시아에서 건너왔고 그렇게 미국의 역사가 시작됐다. 특히 모뉴먼트 밸리로 상징되는 척박한 미국의 서부는 철도가 놓이고 사람이 대거 유입되면서 살기 좋은 곳으로 변모했다.

흥미롭게도 <마션>의 화성은 서부극에서 묘사했던 바위산과 모래로 뒤덮인 개척 시대의 미국 서부와 무척이나 닮았다. <마션> 제작진은 화성의 환경과 최대한 닮아 있는 지역에서 촬영했다고 하지만, 우주복을 입고 있는 극 중 와트니 대신 말을 탄 총잡이를 갖다 놓으면 이곳은 영락없는 서부다.

사실 현대의 관객은 서부 사나이가 장총을 쏘아대는 광경보다 화려한 도심에서 벌어지는 자동차 추격전에 더 열광한다. 전통적인 서부극은 대중적인 관심이 끊긴 지 오래다. 그렇다고 할리우드가 서부극을 포기할 리 만무하다. 할리우드는 미국의 긍정적인 이미지를 세계 곳곳에 전파하는 첨병이다.

서부극이 쇠퇴한 그 자리를 우주 배경의 SF가 대신해 개척정신을 이어가고 있는 셈이다. <마션>의 경우처럼 카우보이 복장은 우주복으로, 갈기 휘날리는 전마(戰馬)는 첨단의 화성 탐사 차량으로 바뀌었지만, 인류의 새로운 터전 확보를 위한 미국인의 개척정신 발현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아니,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다.

수정주의 서부극이라는 게 있다. 미국의 개척정신이 실은 원래 미국 땅의 주인이었던 인디언 학살과 같은 폭력의 역사를 은폐하고 있음을 폭로해 기존의 서부극을 수정한 장르다. 존 포드의 <수색자>, 세르지오 레오네의 <석양의 무법자> 등이 이에 속하고 <슬로우 웨스트> 또한 수정주의 서부극이라고 할 만하다.

<슬로우 웨스트>의 주인공 제이(코디 스밋 맥피)는 16세 소년이다. 앳된 얼굴에서는 서부 사나이의 카리스마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아닌 게 아니라, 제이는 스코틀랜드에서 연인 사이였던 로즈를 찾아 멀고 먼 미국 땅까지 건너왔다. 그녀와 만나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을 함께 감상하고 싶지만 제이의 눈에 들어온 서부는 낭만과는 전혀 딴판이다.

미국의 군인들은 죄 없는 인디언을 쫓아 살육을 일삼고, 새로운 삶을 찾아 미국 땅을 밟은 이주민들은 편하게 몸을 누일 곳도, 마땅한 식량을 확보할 길도 없어 서부의 여기저기를 들고양이처럼 방황하기 일쑤다. 하물며 제이처럼 제 한 몸 가누기 힘들 만큼 연약한 영혼을 보호하겠다며 서부 사나이 사일러스(마이클 패스벤더)가 의도적으로 접근해온다.

서부극은 신화의 세계다. 수정주의 서부극은 아름답게 포장된 미국 개척정신의 신화를 깨는 장르다. 새로운 땅을 향해 달려가는 경쾌한 스피드의 서부 사나이는 <슬로우 웨스트>의 제목처럼 자신의 목숨을 앗아갈지도 모르는 공격을 대비하고 감시하기 위해 ‘느리게(Slow)’ 몸을 움직이고 숨긴다.

의 한 장면 ⓒ 더 픽쳐스

서부극 쇠퇴한 자리 우주 SF로 ‘개척’

<슬로우 웨스트>와 같은 수정주의 서부극을 통해 위험한 곳으로 전락한 서부의 대체지를 물색하던 할리우드가 찾은 신세계가 바로 ‘우주’다.

<인터스텔라>부터 <마션>까지, 할리우드가 우주 개척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머나먼 행성으로 탐험을 떠난 이들의 이야기를 계속 물색하고 개발하는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하지만 아직 행성은 인간이 정복하지 못한 미지의 땅에 가깝다. <마션>의 마크 와트니는 어떻게든 목숨을 보전해 지구로 귀환하기 위해 갖은 수를 짜낸다. 그래서 <마션>의 홍보 문구는 다음과 같다. ‘반드시 돌아갈 것이다.’ <마션>뿐일까, <인터스텔라>의 쿠퍼(매튜 매커너히)도, 또 하나의 우주 배경 걸작인 <그래비티>의 스톤(산드라 블럭)도 신비한 우주를 뒤로하고 마지막에는 익숙한 지구의 땅을 밟는다.

지구로의 귀환은 단순한 해피엔딩을 의미하지 않는다. 개척을 사명으로 삼는 서부의 사나이는 어딘가에 정착하는 법이 없다. 집으로 돌아와 잠시 몸을 가눈 뒤 다시 미지의 곳을 찾아 떠나는 것이 서부극의 일반적인 스토리다. 마크 와트니는 무사히 지구로 돌아오는 데 성공하지만, 그를 추종하는 또 다른 ‘화성인(Martian)’들은 떠날 채비를 서두른다. 와트니가 터를 다진 화성으로, 새로운 행성으로 ‘반드시 돌아가’ 개척정신을 이어가기 위해서다. 그리고 할리우드는 수정주의 서부극으로 체면이 깎인 개척정신의 긍정성 복원을 우주 배경의 SF를 통해 이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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