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능인가 부패인가"...배임죄 또 다시 논란
  • 한광범 기자 (totoro@sisapress.com)
  • 승인 2016.01.12 10:58
  • 호수 13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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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 2인자 직접 나서 강영원 판결 비판...배임죄 판결에 불만 누적
무리한 해외 자원개발 회사 인수로 회사에 5500억원의 손해를 끼친 혐의로 기소된 강영원 전 한국석유공사 사장은 지난 8일 1심에서 무죄를 선고 받았다. 검찰은 11일 이영렬 서울중앙지검장이 직접 브리핑에 나서 법원 판결을 맹비난했다. / 사진=뉴스1

이영렬 서울중앙지검장이 검사장으로는 이례적으로 직접 브리핑에 나서 강영원 전 한국석유공사 사장 1심 판결을 작심 비판했다. 서울중앙지검장은 검찰 수사 분야에서 검찰총장에 이어 2인자다. 검찰 2인자가 직접 나서 법원을 비판하고 나선 데에는 협소해지는 법원의 배임죄 적용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다는 판단이 작용했다는 분석이다.

이 지검장은 11일 서울 서초동 서울고검 기자실에서 긴급 브리핑을 열고 "재판 과정에서 손실이 발생한 사실이 인정됐는데도 무리한 기소이고 형사책임을 물을 수 없다고 하니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1심 판결을 거세게 비난했다.

강 전 사장은 2009년 석유공사의 캐나다 하베스트사와 노스아틀랜틱리파이닝(NARL) 인수 당시 석유공사 사장으로 근무했다. 석유공사의 하베스트와 날 인수는 이명박정부의 대표적인 해외자원외교 실패 사례로 통한다. 그는 인수당시 시장가격보다 훨씬 높은 가격을 지불해 회사에 5500여억원의 손해를 끼친 혐의(특정경제범죄가장처벌법상 배임)로 지난해 7월 구속 기소됐다.

◇법원 "과오 있으나 배임죄 아냐" vs 검찰 "제멋대로 경영하면 안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5부(김동아 부장판사)는 지난 8일 강 전 사장에 대해 "배임 행위를 저지른 것으로 보기 어렵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강 전 사장이 손해를 감수해서라도 경영평가를 좋게 받으려 이 거래에 나아갔다고 보기 어렵다"며 "다소 과오가 있다고 평가할 수는 있으나 형법상 배임죄에 해당할 만큼 혐의가 증명됐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강 전 사장 측 변호인은 지난달 열린 결심공판에서 "실패와 부패는 엄연히 다르다"며 "부패는 엄히 처벌해야 하지만 실패는 방향을 조정해 개선해야 한다"고 항변한 바 있다.

이 지검장은 "경영평가 점수 잘 받으려고 나랏돈을 아무렇게나 쓰고, 사후에는 경영판단이었다는 이유로 처벌할 수 없다면 회사 경영을 제멋대로 해도 된다는 말이냐"며 "아무 실사 없이 3일만에 묻지마식 계약을 하고 이사회에 허위 보고해 1조원이 넘는 손해를 입혔는데 이 이상으로 무엇이 더 있어야 배임이 되느냐"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어 "1심 판결처럼 경영판단을 지나치게 폭넓게 해석하기 시작하면 책임자에게 면죄부를 주게 된다"며 "그나마 유일하게 존재하는 검찰 수사를 통한 사후 통제를 질식시키는 결과가 된다"고 법원 무죄 논리를 반박했다.

검찰은 이 지검장 긴급 브리핑이 대검찰청과 조율 후 진행됐다고 밝혔다. 김수남 검찰총장의 뜻이 반영됐다는 의미다. 임관혁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장은 "강 전 사장 사건은 자원개발비리에서 상징적이다. 피해규모도 1조원 이상으로 중요한 사건이다. 납득할 수 없이 무죄가 돼 검찰 내부에서 심각히 받아들이고 있다"고 설명했다.

임 부장은 "(앞서) 구속영장이 발부됐던 사안이고 피해 규모도 컸다. 정유공장 인수는 누가 보더라도 졸속이어서 유죄가 나야 한다고 생각했다"며 "이마저 무죄가 난다면 M&A(인수합병)에서 유죄가 날 사안은 없다"고 강조했다.

◇검찰 2인자 직접 브리핑 두고 해석 분분

검찰이 법원을 정면으로 겨냥한 것은 그동안 기업인 판결에 대해 쌓였던 불만이 폭발한 결과로 보인다. 그동안 검찰 내부에선 지속적으로 "법원이 기업인 배임죄에 대해 너무 협소하게 판단한다"는 불만이 흘러나왔다.

여기에 더해 반부패 태스크포스(TF)를 출범시키고 강력한 사정 드라이브를 거는 상황에서 법원을 미리 압박하겠다는 의도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앞서 검찰은 포스코 비리 수사 당시 법원의 잇단 영장 기각에 대해 수사방해라며 불만을 터뜨리곤 했다.

앞서 이석채 전 KT 회장, 강덕수 전 STX 회장, 황기철 전 해군참모총장이 잇따라 배임 등에 대해 무죄를 선고받았다. 한 검사는 이와 관련해 "법원에겐 증거나 논리가 무의미한 것 같다. 무죄로 판단을 내놓고 시작한 것 같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이밖에도 도박·횡령 등의 혐의로 1심에서 실형을 선고받은 장세주 동국제강 회장도 배임혐의 세개 중 두개에서 무죄로 판단 받았다. 파기환송심에서 실형을 선고받은 이재현 CJ그룹 회장은 앞선 대법원 상고심에서 형법상 배임죄보다 형량이 높은 특경가법상 배임죄가 파기되기도 했다. 검찰은 이 회장 파기환송심 결심공판에서 대법원 판결에 동의하지 않는다며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검찰이 수사 실패 책임을 법원에 전가시키려 하는 게 아니냐는 비판도 제기된다. 한 지법 부장판사는 "법원의 배임죄 판단은 그동안 크게 달라진 게 없다"며 "법원한테 결과를 책임지라는 게 말이 되느냐"고 말했다.

◇배임죄, 법조계·재계 뜨거운 감자

배임죄는 그동안 끊임없이 논란이 돼 왔다. 재계는 그동안 배임죄가 올바른 경영판단마저 가로막는다며 끊임없이 개정을 주장해왔다. 주요 기업인들이 배임 혐의로 수사나 재판을 받게 될 때마다 재계에선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같은 법"이라고 비판을 했다. 여권 일부에서도 이에 동조해 개정안을 내기도 했다.

하지만 검찰 내부의 시각은 전혀 다르다. 고의성이 있는 잘못된 경영 행태를 바로 잡을 수 있는 법이라고 옹호한다. 평소 검찰에 비판적인 야당이 이 같은 입장을 지지한다.

한 특수통 부장검사는 "제왕적 경영행태를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라고 주장했다. 또 다른 검사는 "법원은 내부 의사결정 절차를 거쳤다는 이유로 배임행위를 경영 판단으로 면죄부를 줬다"며 "총수 경영을 견제할 장치가 미진한 우리 기업 현실을 모르는 것 같다"고 꼬집었다.

대법원은 현재 경영 판단 원칙을 수용해 업무상 배임 행위의 고의성이 인정될 때만 이를 유죄로 판단하고 있다. 하지만 여기에 더해 업무상 배임이 인정되더라도 회사 경영을 위한 목적이 인정될 경우에는 실형을 선고하지 않는 추세다. 수도권에 근무하는 한 판사는 "배임 같은 재산범죄의 경우 피해를 변제했다면 유리한 정상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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