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리더십] 인도 최초 통일제국의 ‘불교왕’
  • 김경준 | 딜로이트 컨설팅 대표 (sisa@sisapress.com)
  • 승인 2016.02.04 11:31
  • 호수 13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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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소카의 포교로 불교가 세계 3대 종교로 발전

인도 최초의 통일제국인 마우리아 왕조의 3대 왕인 아소카(B.C. 304~B.C. 232)는 인도 역사상 영토를 최대 권역으로 확장한 정복 군주였으나 만년(晩年)에 불교의 가르침에 따라 비폭력과 자비에 의한 통치를 펼쳤고 불교가 세계적인 보편 종교로 도약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해 유대교의 솔로몬, 기독교의 콘스탄티누스처럼 불교를 상징하는 군주로 지금까지도 추앙받는다.

인더스 강 유역의 모헨조다로 유적에서 확인되는 인더스 문명은 B.C. 3000년경부터 시작돼 높은 수준으로 발전하고 있었으나, B.C. 1500년경 중앙아시아에 거주하던 아리안 족의 일파가 남하하면서 기존 원주민인 드라비다 족을 정복했다. 아리안 족은 사회를 4대 계급으로 구분하고 상위 3개 계급은 자신들이 차지한 채 최하층인 4계급에는 원주민을 편입시키고 이러한 질서를 브라만교라는 종교 형태로 고정시켰다. 아리안 족의 지배가 1000년 이상 계속되면서 카스트는 직업적 구분으로 변화했고, B.C. 4세기까지 10여 개의 도시국가가 일종의 춘추전국시대처럼 각축을 벌이고 있었다. 그중에서 마가다가 강력한 세력으로 떠오르면서 북인도 통일국가로 나아가고 있던 시점에서 B.C. 327년에 그리스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왕이 인도 서부를 침공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인도의 도시국가들은 10만명의 연합군으로 대응했으나 참패하고 인도 전역이 정복될 위기에서 오랜 원정으로 피로에 지친 그리스 군대가 페르시아로 돌아가버리는 행운이 따른다. 알렉산드로스의 인도 원정은 실패로 끝났지만 인도가 처음으로 외부 세계와 접하는 계기가 돼 인도의 정치·사회 세력을 각성시켰으며, 정치적 통합의 에너지는 더욱 강해지는 결과를 낳았다.

ⓒ 일러스트 임성구

알렉산드로스 군대가 철수한 후 인도 연합군의 주력이었던 마가다 왕국에서 내분이 일어나고 크샤트리아 계급 출신 찬드라굽타가 권력을 장악하고 마우리아 왕국을 세운다. 찬드라굽타는 60만명의 대군을 이끌고 20년간의 정복전쟁을 벌여 인더스 강 유역의 북인도를 석권하고 인도 최초의 통일제국을 수립한다. 찬드라굽타의 손자로 3대 왕에 오른 아소카는 정복전쟁을 지속해 오늘날의 파키스탄·아프가니스탄 영역과 당시 페르시아 제국의 서쪽에서 인도 대륙 최남단 일부 지역과 실론 섬을 제외한 인도 전역을 석권했다. 아소카 통치 시절의 마우리아 왕국은 인도 대륙 역사상 최대 판도의 대제국으로 오늘날 인도보다도 더 넓은 크기였다.

찬드라굽타, 인도 최초의 통일제국 수립

그러나 아소카는 정복전쟁의 최정점에서 극적인 심경 변화를 일으킨다. 오늘날 오리사 주가 위치한 인도 동남부 해안 칼링가 왕국과의 전쟁(B.C. 265~B.C. 263)에서 승리했으나, 전쟁 중에 10만명이 살상되고 15만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백성 수십만 명이 질병과 고통으로 사망하는 현장을 목격하고 더 이상의 전쟁은 무의미하며 무력이 아닌 법(darma·佛法)으로 통치해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는다. 당시 불교와 자이나교는 B.C. 6세기 무렵 카스트 제도를 근간으로 하는 브라만교가 약화되면서 생겨난 신흥 종교로 카스트를 부정하고 만민 평등에 기초한 혁명적 종교였다.

아소카는 불교의 비폭력과 자비를 통치의 기본 개념으로 수용하고 먼저 자신이 불경을 공부하면서 불교에 기반한, 완전히 새로운 개념의 왕권을 주창했다. 그는 통치자의 합법성이 신성한 신의 너그러움이 아니라 부처의 가르침에 따르고 절을 세우고 승려를 지원하고 백성들의 갈등을 불법의 윤리로 해소하는 데서 나온다고 믿었다. 그는 인도 전역에 수많은 불탑과 순례자들을 위한 숙소를 건축했고 백성들에게 불교를 권장하고 교육기관을 세워 승려를 배출하는 등 포교를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또한 제국 전역에서 돌로 만든 기둥에 당시 평민들이 쓰던 프라크리트라는 언어로 불교의 가르침과 자신의 믿음을 새긴 석주(石柱) 조칙(詔勅·임금의 명령서)을 30여 군데에 세워 일반 백성들을 교화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인도 북부에 제한돼 있던 불교가 인도 남부 지역에도 확산됐다.

나아가 다른 왕국에도 불교를 전파하기 위한 포교단을 파견하는 일종의 국제적 선교 사업을 대대적으로 전개했다. 포교단은 스리랑카·그리스·레바논·이집트까지 진출했으며, 알렉산드리아에 이집트 최초의 불교공동체가 형성되기도 했다. 특히 스리랑카에는 두 차례나 왕자 마헨드라(Mahendra)와 딸 산가미트라(Sanghamitra)를 파견해 포교에 성공했다. 이후 스리랑카를 기점으로 미얀마·태국·수마트라·자바 등 동남아시아 지역으로 불교가 전파됐다. 아소카의 적극적 포교로 인도 대륙 밖으로 전파된 불교는 이후 동남아시아와 중국, 우리나라와 일본으로 전해지면서 오늘날 세계 3대 종교로 발전하는 토대가 만들어졌다.

인도 뉴델리에 있는 아소카 사자상. ⓒ AP연합


인도에서 ‘가장 이상적인 왕’으로 추앙받아

아소카의 이러한 정책 변화는 자신의 심경 변화와 함께 이를 가능하게 한 당시의 국내외 정치 상황이 뒷받침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칼링가 왕국을 정복하면서 사실상 인도 대륙 정복 사업은 종료됐고, 인도 내의 대항 세력은 소멸됐다. 북서쪽 국경 지역에서 수백 년간 괴롭히던 페르시아와 그리스 세력들도 알렉산드로스 사후 내분이 일어나 인도를 침략할 여유가 없었다. 이런 상황이었기에 무력이라는 하드파워 대신 종교와 윤리라는 소프트파워에 의한 통치가 가능했던 것이다. 이러한 노선 전환 없이 확장을 위한 정복전쟁을 지속했다면 불가피하게 페르시아 지역의 그리스 세력과 맞붙을 수밖에 없었던 상황에서 아소카는 확립된 제국의 안정적 통치라는 현실적 목표를 추진하는 차원에서 현명하게 정책을 변화시켰다. 그러나 아소카가 유능한 후계자 없이 사망함으로써 마우리아 왕국은 통합을 유지하지 못해 150년 만에 수명을 다한 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다.

불교에 기반한 제국의 영속이라는 아소카의 원대한 이상은 실현되지 않았지만, 아소카는 인도 역사상 최초로 자비와 포용, 비폭력에 근거한 통치 이념을 제시하고 현실에서 실천한 군주였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인도에서 ‘가장 위대한 왕’ ‘왕 중의 왕’ ‘가장 이상적인 왕’으로 추앙받으며 불교 권역에서 이상세계를 구현하는 전륜성왕(轉輪聖王)으로 숭배되고 있다. 피비린내 나는 정복 군주로 각인됐을 운명이 전쟁터에서의 깨달음과 노선 전환으로 인류사에 빛나는 성군(聖君)의 모델로 후세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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