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리더십] 동아시아 법체계의 근간을 만들다
  • 김경준 | 딜로이트 컨설팅 대표 (sisa@sisapress.com)
  • 승인 2016.03.24 21:14
  • 호수 13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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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문제, 율령격식 도입·과거제 실시·대운하 건설 등 치적

후한(後漢) 멸망 후 삼국시대, 5호16국과 남북조 시대 370년간 분열됐던 중국을 재통일하고 수나라를 건국한 수문제 양견(隋文帝 楊堅·541~604)은 역사상 최초로 과거제를 실시하고 율령에 의한 통치를 확립했다. 남북을 이어주는 대운하를 착공하고, 북방의 돌궐을 분열시켜 내정과 외치에 모두 성공했다. 후계자인 양제의 무능으로 수나라는 40년도 유지하지 못한 채 2대로 패망했으나 수문제는 뒤이은 당나라 번영의 물적·제도적 토대를 닦은 문무겸전(文武兼全)의 군주다.

 

수문제, 문무겸전의 준비된 군주


한무제 재위 기간(B.C. 141~B.C. 87)은 한나라의 전성기이자 쇠퇴의 시작이었다. 대외 정복 사업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재정 파탄에 외척과 환관의 발호로 체제의 근간이 흔들리더니 급기야는 외척 왕망이 황제를 폐하고 신(新)나라(8~23)를 세우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유씨 황족이 복귀한 후한 시대에도 외척과 환관의 세력 다툼이 계속되면서 중앙권력이 약화되자 지방 호족들이 문벌귀족으로 성장해 강력한 세력을 구축했다. 후한 멸망의 결정타는 184년 발발한 황건적의 난이었다. 당초 삼황오제 숭배와 도교를 혼합한 황로(黃老)사상에 근거해 장각이 출범시킨 태평도라는 종교 교단이 농민층의 지지를 바탕으로 병력 36만명의 대규모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지방 호족들의 도움으로 반란을 가까스로 진압한 후 호족 간 쟁투를 거쳐 위·오·촉의 삼국시대가 시작됐다. 껍데기만 남은 후한은 220년 조조의 아들 위나라 문제(文帝) 조비에게 선양의 형식으로 왕위를 넘기고 410년간의 역사를 마감한다.

 

수문제 양견(隋文帝 楊堅) ⓒ 위키피디아

삼국 중에서 가장 강했던 위나라는 263년 촉나라를 멸망시킨 후 실력자 사마염(236~290)이 선양의 형식으로 왕위에 올라 진(晉)나라가 출범하고 초대 황제 무제(武帝)가 됐다. 진나라는 280년 양자강 이남의 오나라까지 정복해 중국 대륙을 다시 통일했으나 유지 기간은 10년에 불과했다. 초대 황제 사망 후 후계를 둘러싼 격심한 내분인 16년간의 ‘팔왕(八王)의 난’을 거치면서 극도로 쇠약해진 틈을 타 북방의 이민족들이 화북 지방의 주도권을 잡았고, 흉노·갈·선비·저·강 등 5개 이민족이 16개국을 번갈아 세우는 5호16국(五胡十六國) 시대가 100여 년간 이어지다가 439년 북위가 화북을 통일한다. 한편 316년 흉노에게 멸망당한 진나라의 잔존 세력은 과거 오나라 지역인 양자강 이남으로 이동, 진나라를 복원해 서진(西晉) 시대를 시작한다. 서진은 북방에서 유입된 노동력과 기술을 강남 개발에 효과적으로 활용해 경제적 부흥을 이루지만 정치적 불안을 해소하지 못하다가 유력한 장군 유유(363~422)에게 선양의 형식으로 제위를 넘기고 420년 송(宋)이 건국된다. 팔왕의 난 이후 100여 년간의 각축전 끝에 북쪽의 북위, 남쪽의 송이 병립하면서 150년간의 남북조 시대가 시작된다. 이 기간 동안 단일 왕조는 아니고 북부에서는 북위·동위·서위·북제·북주의 5개 나라, 남부에서는 송·제·양·진의 4개 나라가 혼재하지만 더 이상 분열되지는 않기에 초기 왕조인 북위·서진의 이름을 붙여 위진남북조 시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수나라 문제 양견은 북부 지역의 상층 귀족 가문 출신이다. 부친 양충은 선비족의 실력자 독고신의 부하였고, 독고신과 양충은 우문각의 정변을 지원해 북주(北周)를 성립시키면서 실권자로 부상했다. 양견의 딸이 북주 황실에 시집간 후 사위 우문윤이 황제에 올랐고(선제·宣帝 559~580) 당시 화북 지방을 반분하던 경쟁자인 북제(北齊)를 양견이 정복해 중국 북부를 통일하면서 양견의 입지는 확고해졌다. 이후 양견의 황제 등극과 수나라 건국은 비교적 순탄하게 진행됐다. 사위인 황제 선제가 재위 1년 만에 일곱 살 장남에게 왕위를 물리고 이듬해 병사하면서 섭정이 된 양견은 양위의 형식으로 북주를 폐하고 581년 수나라를 건국해 스스로 황제에 올랐다. 북부를 장악한 수문제는 8년 후인 589년 남조의 진(陳)을 함락시키고 370년 만에 중국 대륙을 재통일하는 위업을 완성한다.

 

수문제는 문무겸전의 준비된 군주였다. 유력한 귀족 출신의 막강한 배경에 높은 교육 수준을 갖추고 전장에서도 탁월한 성과를 거뒀으며 개인적으로도 사치를 멀리하고 실용을 중시하는 품성이었다.

 

30만 대군으로 고구려 침공했으나 패배

 

왕권 강화를 위한 법적 장치로 율령에 의한 통치를 확립하기 위해 자신의 연호를 딴 개황률(開皇律)을 582년 편찬해 율령격식(律令格式)의 성문법 체계를 도입했다. 형법 관련 규정인 ‘율’과 행정법 관련 ‘령’, 황제의 명령인 ‘격’과 시행 세칙인 ‘식’의 법령 체계는 당나라에 그대로 계승됐고, 우리나라를 비롯해 일본 등 아시아 각국 법체계의 근간이 됐다. 율령에 따라 진나라 이후 전통적 중앙 관제인 3공9경을 3성6부(三省六部)로 개편하고 지방 조직은 한나라 이후 유지되던 주-군-현(州-郡-縣)에서 군을 폐지해 행정 조직을 간소화했다.

 

과거제 실시는 역사적 사건이다. 진시황이 중앙집권제를 도입한 이후 외양은 유지됐으나 제도의 핵심인 관료 충원은 유력 가문의 자제 중심으로 이뤄져 문벌 지배가 계속되고 있었다. 삼국시대에 위나라가 도입해 남북조시대에 이르기까지 9품중정제(九品中正制)라는 제도가 있었으나 근본적으로 추천 제도이기에 효과에도 한계가 있었다. 그나마 혼란기에 유명무실해진 상태였다. 수문제는 시험을 통해 고득점자를 선발하는 과거제도를 587년 역사상 최초로 실시했고, 이후 청나라 말기까지 1300년 동안 중국 관리 임용제도의 근간이 된다. 남북을 통일한 국가로서 물류 간선도로 격인 양자강 이남과 화북 지역을 연결하는 대운하 건설에 착수해 아들인 수양제가 완공한다. 대운하는 당나라 이후 중국 물류에서 1300년 동안 핵심 인프라로 기능한다. 외부적으로는 북방의 돌궐을 분열시켜 위협을 감소시켰고, 돌궐과 우호 관계이자 중국 질서에 편입되지 않았던 동북 방면의 강자 고구려를 598년 30만 대군으로 침공했으나 패배했다.

 

수문제는 평천하(平天下)는 했으나 제가(齊家)에 실패해 자신의 마지막도 편안하지 못하고 왕조도 단명으로 끝났다. 장남을 태자에서 폐하고 차남을 태자로 지명했으나 말년의 권력 다툼으로 수문제가 살해됐다는 설(說)이 유력하다. 차남은 수양제가 돼 무리한 대규모 토목 사업을 벌이고 고구려 정벌에 실패하면서 왕조를 패망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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