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리더십] ‘유럽의 아버지 왕’ 서유럽 탄생시키다
  • 김경준 | 딜로이트 컨설팅 대표 (sisa@sisapress.com)
  • 승인 2016.05.05 17:52
  • 호수 13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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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크 황제 샤를마뉴, 서유럽 정치·경제 통합 초석 마련

476년 서로마 멸망 후 정치·경제·군사·종교 등 모든 분야의 주도권은 동로마로 넘어가고 서유럽은 야만족이 각축을 벌이는 변방으로 전락해 300년이 흐른다. 프랑크 왕 샤를마뉴(742~814)는 고대 서로마 지역 대부분을 군사적으로 정복해 정치적으로 통일된 영토국가를 성립시켰고, 당시 동방교회 대비 약체였던 로마 교회의 수호자를 자처하고 서유럽 지역의 기독교 전파에 적극적인 입장을 취해 후일 로마 가톨릭이 동방교회와의 주도권 경쟁에서 승리해 기독교의 중심으로 자리 잡는 기초를 닦았다. 통치체제로서는 왕, 귀족, 기사로 이어지는 중세 봉건제를 확립하고 카롤링거 르네상스로 일컬어지는 문화예술 진흥에도 노력했다.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서유럽의 영토·제도·종교·문화의 유산을 남겨서 ‘유럽의 아버지 왕(Rex Pater Europae)’으로 일컬어진다.

프랑크 황제 샤를마뉴 상(像) ⓒ EPA 연합


교황, 샤를마뉴에게 황제의 관 씌워주다

서로마 제국 멸망은 250년 후 예기치 않은 지역에서 새로운 세력을 성장시켰다. 로마 제국 권역 밖에 있던 변방의 오지 아라비아 지역에서 등장한 예언자 무함마드는 610년 이슬람을 창시하고 세력을 키워 아라비아를 정치적으로 통일하고 대외확장에 나섰다. 아프리카 북단의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711년 에스파니아를 정복한 후 피레네 산맥을 넘어 서유럽 중앙부로 진출한 이슬람 군대는 732년 프랑스 중서부의 투르에서 맞붙었다. 이슬람과 기독교 양대 문명의 운명이 걸린 한 판에서 샤를 마르텔이 이끄는 프랑크 군대가 승리를 거두었고, 이후 15세기까지 700여 년간 이슬람과 기독교의 서부 경계선은 피레네 산맥으로 확정됐다.

구국의 명성을 얻은 샤를 마르텔은 프랑크 메로빙거 왕조의 신하로 죽었으나, 아들 피핀은 751년 메로빙거 왕조를 폐하고 왕위에 올라 카롤링거 왕조의 시조가 됐다. 당시 로마 교황은 동방교회와 기독교회의 주도권을 둘러싼 경쟁을 벌이고 있었으나 세속의 정치적 기반이 약했다. 로마 교황은 신흥세력으로 부상한 피핀과 제휴해 연합전선을 펼쳤다. 당장 이탈리아 북부에 자리 잡고 교황을 위협하는 롬바르드 왕국을 피핀의 군대를 불러들여 제압했고, 신을 표현한 조각상인 성상(聖像) 숭배를 둘러싸고 동방교회와 격렬하게 대립하고 있던 상태에서 정치·군사적인 지지기반으로 피핀을 활용했다. 피핀의 입장에서는 왕위를 찬탈한 정당성을 보완하기 위해 로마 교회가 필요했고, 로마 교회는 동방교회 대비 약체였던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피핀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할아버지 샤를 마르텔이 기반을 닦고 아버지 피핀이 개창한 왕조를 이어받아 768년 왕위에 오른 샤를마뉴는 46년간 프랑스·이탈리아·독일·오스트리아·헝가리를 아우르는 권역으로 영토를 확장하고 정치적 통합을 이뤄내는 역량을 발휘한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서 정복지 민족들에게 기독교로의 개종을 요구했던 샤를마뉴의 정복사업 성공은 로마 가톨릭 교회의 입지를 크게 강화시켰다. 당시까지 기독교의 최고 권위는 콘스탄티노플의 동로마 제국 황제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던 상황에서 성상 숭배를 둘러싼 갈등을 계기로 로마 교회는 독자노선을 걷고 있었다. 로마 교회는 세속적 배경이 절실한 입장에서 샤를마뉴의 기독교 후원으로 천군만마를 얻었다. 더욱이 샤를마뉴는 아버지 피핀이 교황에게 기증한 영지인 최초의 교황령을 더욱 확대해 이탈리아 중부지역 전역을 교회에 기증해 로마 교황은 영토적 근거지를 확보했다.

종교적 권위에 세속적 영토까지 확보한 교황 레오 3세는 800년 12월25일 크리스마스에 로마에서 샤를마뉴에게 직접 황제의 관(冠)을 씌워주었다.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나서 300년 만에 탄생한 황제를 계기로 로마 교회와 게르만의 협력은 이후 중세를 거쳐 르네상스에 이르기까지 서유럽의 기본질서가 됐다. 특히 동로마가 황제 우위의 제정(祭政)일치로 유연성이 떨어졌던 반면, 서유럽의 종교 수장 교황과 정치 수장 황제가 병립하는 체제는 협력과 갈등을 거듭하면서도 저력을 발휘해 후일 서유럽을 문명의 중심으로 발전시키는 토대가 된다.

프랑크 황제 샤를마뉴 상(像) ⓒ EPA 연합


프랑크 왕국은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로 발전

서로마 제국에 버금가는 영토를 확보하고 황제 칭호를 받았지만 샤를마뉴의 통치방식은 로마식이 아니라 고대 중국과 흡사한 봉건제도였다. 기병을 활용한 기동전술을 구사해 승리를 거뒀고, 전투에서 기병의 역할이 커지는 추세를 반영해 말과 갑옷으로 무장할 수 있는 재원과 인력의 확보를 위해 권력관계를 수직적으로 구성했다. 먼저 프랑크 출신의 30개 귀족 가문과 왕실을 혼맥으로 결합시켜 수도의 중앙귀족층을 구성하고, 전국에 250개의 백작령(伯爵領)을 설치했으며 백작령에 교회의 주교를 임명해 세속과 종교의 지배를 통합했다. 하위에는 기사단을 구성해 지배층 모두에게 왕에 대한 복종과 충성을 맹세시키고 대가로 토지를 하사해 정치·군사적 관계를 경제적 관계로 뒷받침했다.

샤를마뉴의 사회 재편으로 중세의 지배층은 지배하는 사람인 귀족, 기도하는 사람인 성직자, 싸우는 사람인 기사의 3종류가 생겨났고, 나머지는 일하는 사람인 농민들로 구성됐다. 중세의 골격이 확립된 셈이다. 정치통합에 이은 경제적 통합을 위해 도량형과 화폐단위의 통일에 착수해 금화에 기반을 둔 화폐제도를 폐지하고 은화를 기준으로 삼았다. 로마의 법치를 참고해 학문과 예술을 존중한 그는 칙령을 내려 전국의 교구와 수도원에 학교를 설립해 라틴 문학, 논리학, 수학, 고전 및 음악, 시 등 예술활동을 적극 장려했다.

대외적으로는 이슬람 아바스 왕조의 칼리프 하룬 알 라시드와 우호적 관계를 구축했으며, 동로마의 여자 황제 이레네와 혼인을 추진하기도 했다. 이레네와의 혼인은 기득권 상실을 우려한 동로마 제국 신료(臣僚)들이 정변을 일으키는 바람에 무산됐지만, 만약 성사됐다면 동서가 통합된 고대 로마 제국이 재현돼 이후 세계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768년에 프랑크 카롤링거 왕조의 왕으로 출발한 샤를마뉴는 814년에 서로마 제국의 황제로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사후 프랑크 왕국은 프랑크족의 관습에 따라 3명의 아들에게 분할 상속됐고 이어진 권력투쟁으로 제국의 위상은 급락했다. 그러나 생전에 정복한 광대한 영토에 확립한 정치·사회적 지배구조와 종교체제는 이후 중세의 기본질서로 자리 잡았고, 분할된 프랑크 왕국은 각각 프랑스·독일·이탈리아로 발전하면서 근대 유럽의 기본질서로 발전해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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