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걸까> 인문학 화두 던진 유창선 시사평론가
  • 조철 문화칼럼니스트 (sisa@sisapress.com)
  • 승인 2016.05.20 18:34
  • 호수 1387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정치도 인간에 대한 사랑에서 출발했어야”

20여 년간 정치평론가로 활동해온 유창선 박사가 지난 몇 년 동안 방송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다가 책 한 권을 들고 불쑥 나타났다. 이번에 펴낸 책은 정치평론집이 아니라 인문학 책이어서 의외다. 아니, 이번 20대 총선 결과와 현 정국을 설명하는 자리에 그가 자주 등장하지 않았던 터라 이해가 갈 듯도 하다.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당당한 모습으로 정치 현실에 대해 말하던 사람이 스스로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거냐”고 반문하니 말이다.

 

 

“정치적 상황에 휘둘리지 않는 삶 찾으려 공부”

 

유창선 박사는 오랫동안 정치평론가 생활을 하면서 정치적 상황에 따라 자신의 활동이 좌우되는 일을 많이 겪었다. 그러나 자신의 삶이 외부에 의해 휘둘리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는 상황이 더 나빠질수록 내 삶의 주인은 그 누구도 아닌 내 자신이라고 생각했다. “이럴 때일수록 나는 오히려 자신을 위로하고 격려할 필요가 있다. 그래도 애썼고 노력하며 살아왔다고 스스로를 지지하고 나서자. 어떤 상황에서도 내가 간직할 것은 자신에 대한 믿음이요 사랑이다. 그래야 주저앉지 않고 앞길을 갈 수 있다. 내가 나를 신뢰하지 않는데, 누가 신뢰하겠는가.”

 

어떻게 하면 그 어떤 상황에서도 자기의 모습을 잃지 않고 자신의 삶을 지킬 수 있을까 고민이 깊어갔다. 그래서 인문학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하지만 인문학을 공부하면서 나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우리 인간이 과연 자유를 누릴 자격이 있는가에 대한 물음이었다. 도스토옙스키가 대심문관의 입을 통해 말했듯이, 인간은 자유보다는 빵을 원했다. 그 빵은 때로는 욕망이었고, 때로는 우상이었다. 저마다의 욕망과 우상을 지키려는 인간들은 서로 할퀴며 상처를 주었다.”

 

유 박사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철학·문학·역사·예술 분야의 수많은 텍스트들을 읽어나갔다. 그 속에서 우리 시대의 어려운 삶을 감당해나갈 지혜와 통찰을 찾으려 했다. 소크라테스와 니체와 톨스토이와 고흐가 당대에 느꼈던 고통과 번민이 오늘날 자신의 고민과 손을 잡으며 잃어버린 자신을 찾도록 도와주었다. “영화를 보며 정의롭지 못한 역사에 분노하고 정의로운 사람들의 활약에 공감했던 사람들은 그토록 많았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어째서 달라지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영화 속에서의 불의에는 분노했던 우리가 막상 나의 삶으로 돌아와서는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공존과 연대, 그것을 위한 유연한 사고를 말하던 신영복 선생의 책에는 감명을 받았다고 하면서, 막상 현실로 돌아와서는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공격하고 배타적 태도를 취하는 모습 또한 마찬가지의 자기 균열이다. 그렇다면 그 모든 감명들은 정작 나의 변화가 따르지 않는 무의미한 인식에 그칠 뿐이다.” 

 

“인문학은 지친 이들과 손 맞잡게 하는 등대”

 

 유창선 박사는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걸까>를 통해 많은 사람이 ‘고전 100권의 힘’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란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에서부터 칸트와 니체를 거쳐 푸코와 데리다에 이르는 철학, 소포클레스와 오비디우스에서 시작해 단테·도스토옙스키·톨스토이·카프카·카뮈에 이르는 문학, 그리고 다윈·윌슨·도킨스의 과학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에서 인간의 삶을 이해할 수 있는 다양한 통찰들을 만났기 때문이다. 그는 정치보다도, 어떤 이념보다도 우선해야 할 것은 인간에 대한 사랑이며, 그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우리는 더 넓고 깊어져야 한다고 깨달았다. 그런 깨달음을 정치평론보다 앞세우지 못한 지난날이 부끄러웠다. 

 

“나의 부끄러움은 ‘타자 앞에서 자기에 대한 수치’이다. 그래서 부끄러움은 나를 자신의 세계에만 갇혀 있는 존재로 놓아두지 않고,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반성 작용을 통해 자아를 만들어가는 긍정적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것은 나에게는 타자와의 관계를 맺어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따라서 부끄러움은 단순히 창피한 감정에 사로잡혀 어쩔 줄 몰라 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다. 부끄러움은 나와 타인, 나와 세상을 연결시켜주는 다리 같은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부끄러워할 줄 아는 사람은 이미 혼자가 아니다.”

 

유 박사가 결국 말하고 싶었던 것은, 자기배려를 통해 나를 새롭게 만들어갈 때, 그리하여 다른 사람들과 손잡을 수 있을 때, 비로소 잃어버린 나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잃어버린 나를 찾는 일의 완성은 세상 사람들과 아름다운 연대를 하는 일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몸은 벽 안에 갇혀 있지만, 그래도 마지막 순간까지 인간으로서의 품격을 지키며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내 스스로의 힘을 기르는 것. 그리하여 상황이 더 나빠지지는 않도록 삶의 참호를 파고 진지전(陣地戰)을 벌여나가는 것. 없는 희망을 억지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견뎌야 할 시간이 앞으로도 길다는 것을 냉정하게 받아들이고 삶의 비극성을 넘어설 용기를 만들어내는 것. 그리고 이 시대 속에서 지쳐가는 사람들과 손을 맞잡는 것. 이 시대의 인문학은 그 등대가 되어야 한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