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로에서]홍만표 게이트의 해법은 한국판 이시다 바이간이다
  • 박영철 편집국장 (everwin@sisapress.com)
  • 승인 2016.06.10 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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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 사장을 지낸 홍만표 변호사의 전관로비 의혹으로 세간이 떠들썩합니다. 오죽했으면 정운호 네이처리퍼블릭 대표의 이름을 딴 정운호 게이트에서 홍만표 게이트로 중심축이 옮겨가는 양상입니다. 

 

두 사건 모두 공통점이 있습니다. ‘직업윤리 부재’가 그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이 두 사람에 국한된 일도 아닙니다. 한국의 이른바 ‘사회지도층’은 특권의식은 강하면서 책임감은 약한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이 또한 직업윤리가 없는 탓입니다.

 

저는 법대를 나왔습니다. 대학 시절을 돌이켜보면 법조인으로 돈 버는 데 당장 도움이 되는 지식은 많이 배웠는데 직업인으로서의 법조인을 기르는 윤리교육은 별로 받은 바 없습니다. 과 동기들 간에도 학생운동 참여파와 비참여파, 고시파와 비고시파로 나뉘어 따로따로 놀았을 뿐 왜 법조인이 되려고 하는지와 같은 근본적인 화두는 잘 이야기 안 했던 것 같습니다. 대학, 과 불문하고 이 당시 한국 대학사회의 보편적인 모습입니다.

 

학교에서 직업윤리 교육을 제대로 못 받았으니 이들이 사회로 나가서 어떻게 됐을까요. 교육을 받았다고 해서 모두가 선해지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사고 규모와 사고율은 낮출 수 있습니다. ‘교육의 힘’이 괜히 있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교육 관련해서 역사적 사례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우리가 이웃나라 일본한테 부러워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바로 ‘장인정신’입니다. 일본판 장인정신 신화는 도쿄대를 졸업한 엘리트가 가업을 잇기 위해 그 좋은 직장을 때려치우고 고향으로 가서 열심히 일한다는 유형의 스토리가 대종을 이룹니다.

 

일본은 예전부터 이랬을까요? 아닙니다. 에도 시대 중기의 사상가 이시다 바이간(石田梅巖·1685~1744)이 출현한 이후부터 이런 풍토가 조성된 것입니다. 에도 시대는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위계질서가 엄격한 시대였습니다. 수공업자도 하층계급이지만 상인은 이들 중 최하층 계급입니다. 당시 상인들과 수공업자들은 돈은 많이 벌었지만 자신들을 멸시하는 사회의 시선 때문에 위축돼 있었습니다.

 

이시다는 상인과 수공업자들에게 존재의 의의를 역설했습니다. 그는 신분이 무엇이든 그 직분을 다하면 무사와 동등하게 사회적 존재의 의의를 갖는다고 주장했습니다. 일본에 200년 넘는 식당과 공예품 가게가 많은 것은 일본인의 직업윤리를 확립시킨 이시다의 사상에 영향받은 바 큽니다.

 

전 국민이 신분에 좌절하지 않고 소명의식으로 뭉쳐 열심히 일한 일본이 여타 동아시아 국가들을 압도하고 근대화에 성공한 것은 그만한 까닭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 패러다임은 지금도 유효합니다. 우리의 주요 전통사상인 유교는 선비에게만 직업윤리를 강조하는 논리구조입니다. 유교의 단점을 보완하는 한국판 이시다 바이간의 출현이 절실한 요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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