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용실 원장’은 사라지고, 민감한 사회 이슈 등장
  • 정덕현 대중문화 평론가 (sisa@sisapress.com)
  • 승인 2016.06.16 14:46
  • 호수 13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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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소회 솔직히 드러내거나 사회 이슈에 대한 소신 밝히는 ‘개념 수상소감’

시상식 풍경이 달라지고 있다. 흔히 수상자가 지루할 정도로 길게, 그동안 감사했던 분들의 이름을 나열하는 수상소감은 점차 사라지고 있다. 대신 자신의 소회를 솔직히 드러내거나, 상에 대한 생각을 밝히기도 하고, 때로는 민감한 사회 이슈에 대한 소신을 밝히는 ‘개념 수상소감’을 남기기도 한다. 이런 변화는 무엇을 말해주는 걸까.

 

6월3일 열린 제52회 백상예술대상에서 《육룡이 나르샤》로 TV부문 남자 최우수상을 수상한 유아인이 수상소감을 말하고 있다.

 

“내가 수상소감을 하면 크게 논란이 되는 것 나도 알고 있어요. 근데 재밌잖아요.” 지난 6월3일 열린 제52회 백상예술대상에서 《육룡이 나르샤》로 TV부문 남자 최우수상을 수상한 유아인은 수상소감에서 먼저 그렇게 말했다. 스스로 밝히듯 그의 수상소감은 특별하다. 일반적으로 기쁨을 드러내거나 혹은 차분하게 그동안 감사했던 분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거명하는 따위는 전혀 없다. 마치 준비해놓은 듯한 말을 대사 외우듯 하는 식도 아니다. 그는 마치 즉흥연기를 하는 사람처럼 말 한마디 한마디에 얼굴 표정과 손짓을 담아서 수상소감을 한다. 그런 모습은 실제로 조금 낯설다. 우리가 늘 봐왔던 수상소감의 면면에서 한참 벗어나기 때문이다. 조금은 과장되게 느껴지기도 하기 때문에 그 낯섦은 심지어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했던 수상소감의 내용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그가 왜 기존의 통상적인 수상소감 방식을 따르지 않는가가 잘 드러난다. 

 

지난 연말 SBS 연기대상에서 최우수 연기상을 받았던 유아인은 특유의 톤으로 드라마를 함께 작업하는 사람들의 소회를 담담하게 얘기했다. 그는 “상패 안에 참 많은 스토리가 있다”며 “많은 생각들이 오가고, 많은 야심이 뭉쳐 있고, 힘겨루기를 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그렇게 경쟁하면서도 그들은 모두 열심히 카메라 앞에서 연기하는 좋은 배우라는 걸 그는 강조했다. “하지만 우리의 일은 카메라가 돌아가는 순간 가장 순수하게, 가장 유연하게 연기하는 거다. 막 영악하고, 여우 같고, 괴물 같아지는 순간이 많지만, 오로지 더 좋은 배우가 되기 위해 고민하면서 (자신을) 끊임없이 다그치고, 또 다그치고 다그치면서 좋은 배우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도록 하겠다.” 

 

겸손은 기본, 자기반성하는 수상자들

 

즉 그는 수상소감에서 자신을 비롯한 배우들의 길에 대해 언급했다. 좋은 배우가 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겠다는 걸 자신이 생각하는 배우상을 통해 얘기했던 것. 그는 백상예술대상 최우수상을 받으면서도 연기에 대한 이야기를 멈추지 않았다. “배우라는 게 끔찍해서 다 때려치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는데, 연기하는 순간, 촬영장의 공기 안에 들어가는 순간, 카메라가 돌아가는 순간, 그 순간에 저 자신을, 또 다른 저를 목격하면서 황홀한 기분이 든다. 배우라서 행복하다.” 그는 수상소감을 통해 배우라는 직업에 대한 소신을 연기자다운 톤으로 대중들에게 말하고 있었다. 

 

“솔직히 저는 항상 사람들에게 그래요. 일개 배우 나부랭이라고. 왜냐하면 60여 명 정도 되는 스태프들과 배우들이 멋진 밥상을 차려놔요. 그러면 저는 그냥 맛있게 먹기만 하면 되는 거거든요. 그런데 스포트라이트는 제가 항상 다 받아요. 그게 죄송스러워요.” 역대급 수상소감 중 가장 인구에 회자된 건 역시 2005년 제26회 청룡영화제에서 《너는 내 운명》으로 남우주연상을 받았던 황정민의 이른바 ‘밥상론’이다. 배우로서의 겸손한 자세를 잘 드러낸 이 밥상론은 무수히 많은 패러디로 변주되기도 했고, 2012년 제33회 청룡영화제에서 《내 아내의 모든 것》으로 남우조연상을 받은 류승룡에 의해 ‘재활용’되기도 했다. “현장에서 정성껏 잘 차려준 밥상. 그 규모가 크거나 작거나, 상석이든 아니든, 편식 안 하고 골고루 맛있게 먹고 소화 잘 시키고 뽀드득 뽀드득 설거지까지 하는 배우가 되겠습니다.”

 

유아인이 그랬던 것처럼 겸손을 넘어서 자기반성을 하는 수상자들도 있다. 작년에 열린 제51회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대상을 받은 최민식이 그렇다. 그는 “20대, 고등학생 때 영화·연극을 하고 싶다고 꿈꿨던 최민식과 지금의 최민식이 어느 정도 맞닿아 있는지를 생각했다”며 “많이 부끄러웠다”고 말했다. 그가 그렇게 말한 까닭은 “좋은 작품을 이야기하기보다는 이 영화가 흥행이 될 것이냐 안 될 것이냐, 이런 것부터 얘기하게 됐다”는 자기반성 때문이다. 

 

2014년 《변호인》으로 청룡영화제 남우주연상을 받은 송강호는 “47년을 살아오면서 내 이웃과 사회에 대한 고민을 한 적은 드물었다”며 그런 점에서 《변호인》은 “감동적이면서도 자괴감이 들게 했다”고 솔직히 말했다. 그는 “대한민국의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오듯, 송강호라는 배우도 국민으로부터 나옵니다”라고 밝혀 대중들을 위한 배우가 되겠다는 뜻을 내비치기도 했다. 

 

 

제26회 청룡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았던 황정민(위 사진)과 제33회 청룡영화제에서 남우조연상을 받은 류승룡의 수상소감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흔하디흔한 수상소감이 아니라 무언가 의미 있는 수상소감을 이제 ‘개념소감’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진정한 개념소감은 역시 수상소감의 자리를 빌려 사회적 의제를 던지는 것이 아닐까. 제32회 청룡영화제가 열리던 2011년은 한·미 FTA 비준 동의안을 두고 나라가 시끌시끌하던 시기였다. 이 영화제에서 《최종병기 활》로 남우조연상을 거머쥔 류승룡은 수상소감에 한·미 FTA를 겨냥한 뼈 있는 한마디로 대중들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그는 “너무 감사하다”며 “영화에서 만주어로 연기했기에 상을 받을 줄은 정말 몰랐다. 역시 청룡영화제의 공정성에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이렇게 공정성을 갖춘 청룡영화제 시상식을 설마 내년에는 미국인이 하는 것은 아니겠죠?”라고 말해 한·미 FTA에 대한 반대 입장을 에둘러 표현했다. 


“그런 의미에서 한·미 FTA에 반대한다”

 

당시 최우수작품상을 받은 《부당거래》의 류승완 감독 역시 개념 수상소감으로 정평이 나 있는 인물이다. 영화 준비차 베를린에 있어 참석하지 못한 류승완 대신 수상을 한 아내이자 제작사 대표인 강혜정은 남편이 수상소감으로 꼭 부탁한 ‘민감한 말’을 꺼냈다. “세상의 모든 부당거래에 반대하고 그런 의미에서 한·미 FTA에 반대한다”고 했던 것. 

 

이번 백상예술대상에서 《사도》와 《동주》로 영화부문 대상을 수상한 이준익 감독은 현재의 청춘들이 겪는 고통을 언급했다. “영화가 갖고 있는 의미는 송몽규 같은, 우리가 알지 못하고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는 그 시대 아름다운 청년들을 통해 이 시대의 송몽규들에게 많은 위로와 응원을 주자는 마음이었다.” 

 

수상소감에 그간 고마웠던 사람들의 이름을 줄줄이 나열하는 일은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래서일까.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는 아예 이런 이름 나열형 수상소감을 금지하는 규칙을 제정했다. 여러모로 관객과 시청자들에게는 지루할 수밖에 없는 ‘이름 나열’을 피하려는 조치다. 대신 고마운 사람들의 명단을 수상자가 제출하면 뒤편 스크린을 통해 자막으로 내보내기로 결정하면서 아카데미 측은 “말은 사라지지만 글자는 영원히 남는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또한 너무 긴 수상소감을 막기 위해 그 시간 역시 45초로 제한하기로 정했다. 어찌 보면 너무 빡빡하다는 인상을 주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보면 관객들에게는 별 의미가 없는 수상소감을 원천적으로 막겠다는 의도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규칙이 정해졌다는 사실이 국내에 알려지자 우리에게도 그런 규칙이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사실, 하다못해 코디부터 미용실 원장님까지 거론하며 고마움을 표하는 풍경은 여전히 시상식의 클리셰로 자리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물론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의 고마움이 있다는 건 인지상정일 것이다. 하지만 그 상이 결국은 대중들이 수여하는 것이란 점을 상기해본다면 그런 ‘사적인 고마움’의 표현은 그걸 바라보는 대중들에게는 실례가 될 수도 있다. 마치 그들만의 시상식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근 들어 ‘개념 수상소감’이라는 수식이 달리기 시작하고, 그런 수상소감을 한 이들에 대한 상찬이 이어지며, 그것이 결국 또 다른 ‘개념 수상소감’으로 이어지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는 건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시상식이 본래 ‘저들의 잔치’가 아닌 대중들과 어우러지는 ‘모두의 잔치’여야 한다는 공감대가 느껴지기 때문이다. 

 

 

제35회 청룡영화제에서 《변호사》로 남우주연상을 받은 송강호

 

시상식 수상소감의 이런 변화는 현재 달라지고 있는 스타와 대중들의 관계를 잘 드러내준다. 과거 아우라를 가진 신비와 숭배의 대상이었던 스타들은 이제 그 높은 자리에서 내려와 대중들의 눈높이에 서게 되었다. 제아무리 빛나는 스타도 대중들이 공감하거나 호응해주지 않으면 아무런 존재감을 갖지 못하는 게 지금의 현실이다. 그러니 시상식의 무대는 더 이상 그들만을 위한 무대가 아니다. 오히려 자신을 한껏 낮추고 자기반성을 하는 계기로 삼으며 때로는 사회를 향한 소신 있는 생각을 던짐으로써 갖게 되는 대중들과의 의미 있는 시간. 이제 대중들에게 시상식은 그런 의미로 다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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