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간 발로 뛰며 ‘인천학생 6·25 참전관’ 설립한 ‘학도병’ 아버지와 ‘치과의사’ 아들
  • 이민우 기자 (mwlee@sisapress.com)
  • 승인 2016.06.23 15:36
  • 호수 13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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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나이에 청춘 바친 학도병들 참뜻 전달하고 싶다”

 

 

이규원 원장이 6월13일 학도병 생존자들의 증언이 담긴 녹음 테이프를 보여주고 있다.

“1995년 어느 날이었어요. 아버지께서 갑자기 부르시더니 어렵게 말문을 여시더라고요. 6·25 전쟁 때 학도병이라는 말은 어렴풋이 들었지만 전쟁 이야기를 잘 안 하셨던 분이었거든요. 아버지께선 ‘나 같은 학생들이 왜 부산까지 가서 자원입대를 했는지, 몇 명이 참전했고 몇 명이 전사했는지 죽기 전에 꼭 알고 싶다’고 했어요. 그래서 한번 알아보자고 했죠. 그러던 게 어느새 20년이 흘렀네요.”

 

인천광역시 중구 동인천역 인근에서 치과병원을 운영하는 이규원 원장은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아버지 이경종옹(翁)에게 녹음기와 사진기를 사드리고 활동비를 드렸다. 이때부터 인천에 살아 있는 참전 학도병의 이야기를 하나씩 모으기 시작했다. 생존 학도병들 대부분이 연로한 상황이라 하루 한두 시간씩 며칠간 만나 증언을 모았다. 가족이 가지고 있던 전사통지서·제대증명서 등 자료도 2500여 점을 수집했다.


그의 병원 건물 1~2층에는 150평 규모의 전시관이 갖춰져 있다. 인천학생 6·25 참전관이다. 새로 건물을 지으면서 두 개 층을 전시관으로 만들었다. 3층에 위치한 병원으로 올라오려면 전시관을 거칠 수밖에 없는 구조다. 그만큼 사람들이 많이 보고 기억해주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그는 왜 사재를 털어가면서 학도병 이야기를 알리려는 것일까.

 


40년 만에 정부가 건넨 건 증서 한 장뿐


이경종옹은 6·25 전쟁 당시 학도병으로 참여했다. 전쟁 도중 허리를 다친 뒤 입·퇴원을 반복하던 그는 신문에서 참전용사 증서를 발급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어렵사리 병적증명서 등을 갖고 보훈처를 찾았지만 젊은 시절 나라에 바쳤던 보상은 정부가 건넨 종이 한 장이 전부였다. 참전용사 증서였다. 그는 허탈했다고 한다. 그리고 전쟁 당시 인천지역에서 같이 참전했던 수천 명의 학도병들에 대한 회상에 젖었다.


16살에 학도병으로 전장에 뛰어든 이경종옹은 스무 살의 청년이 돼 고향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가세가 이미 기울어져 복학을 할 수 없었다. 전쟁이 끝난 직후인 데다 허리까지 다쳐 직장 구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의 머리에는 ‘왜 바보 같은 짓을 했지’라는 후회만 맴돌았다.


특별한 일자리를 못 구하고 집안일을 돕던 그는 3년 만에 대한중공업(현 현대제철)에 입사했다. 친구의 소개로 들어간 회사에서 고철을 분류하는 작업을 맡았다. 벌이가 시원치 않아 집을 팔아 양계장을 열었지만 머지않아 그만뒀다. 이후 사기도 당하고 빚쟁이들에게 쫓기면서 어려운 살림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세탁소와 구멍가게, 당구장 등으로 생계를 이어갔지만 평생 가난에서 벗어날 순 없었다.


그에게 유일한 탈출구는 자식 농사였다. 큰아들 규원씨의 교육에는 아낌없이 투자했다. 가정 형편을 알고 있던 규원씨는 공고를 졸업해 빨리 돈을 벌어오겠다고 했지만, 아버지는 아들을 인문계 고등학교로 진학시켰다. 큰아들 문제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발 벗고 나섰다고 했다. 덕분이었을까. 큰아들은 치과대학 장학생으로 들어간 뒤 치과의사가 됐다. 그때까지만 해도 큰아들이 마음의 상처를 아물게 해줄 든든한 버팀목이 될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이경종옹(왼쪽)이 1997년 아들·손자와 함께 서울 동작구 국립묘지의 학도병 묘역을 찾았다.

“어린 나이에 스러진 꽃들을 잊지 말아야”

 

“학도병들의 증언을 모으다 보니 많은 이들이 참전의 의미를 알 수도 없는 어린 나이에 고향을 지키기 위해 전쟁터로 나갔더라고요. 물론 국가와 민족을 위해 보낸 시간이었지만, 개인의 인생에 있어서는 뼈아픈 손실의 시간이기도 했어요.”


이규원 원장은 어려웠던 가정 형편 속에서도 아버지의 마음을 익히 알고 있었다. 치과의사가 된 이후 아버지에 대한 고마움을 갚겠다고 다짐하고 있었다. 기획과 자금은 아들 규원씨가, 증거 수집은 아버지 이경종옹이 맡았다. 


이규원 원장은 곧 ‘인천학생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를 꾸렸다. 조금씩 수집된 자료들을 기초로 《서해문화》라는 책자로 만들어 인천지역에 배포했다. 또 지역에서 열리는 몇몇 행사에서는 학도병의 기록을 전시해 사람들에게 알리기 시작했다. 2007년부터는 400여 쪽 분량의 참전사를 책으로 엮어 4권까지 출간했다. 


인천 학도병들의 행적을 더듬는 과정에서 안타까운 사연도 들었다. 어린 나이에 목숨을 잃어 후손도 없는 학도병의 묘지가 국립묘지에 못 가고 여기저기 방치돼 있다는 이야기였다. 이규원 원장은 국방부 등 관계기관에 관련 자료 등을 제출했다. 그리고 4년 만에 방치됐던 학도병의 유골을 대전 현충원 국립묘지로 이장(移葬)할 수 있었다.


학도병에 대한 증언과 자료는 점점 쌓이기 시작했고 2500여 점에 이르게 됐다. 이규원 원장은 이를 토대로 ‘인천학생 6·25 참전관’을 열었다. 직접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발품을 판 이경종옹과 아버지를 든든히 지원해준 이규원 원장의 합작품이었다. 정부에서 어떠한 지원도 받지 않고 순수한 사비로 만들어졌다. 참전관도 월세와 전세를 옮겨 다니다 올해 완전히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인천학생 6·25 참전관은 추모의 벽, 추억의 벽, 기억의 벽 등 세 개의 테마 공간으로 이뤄져 있다. 어린 나이에 전쟁에 뛰어들어 스러진 영혼을 달래고, 살아남은 자들의 옛 이야기를 기록하기 위해서였다. 참전관 한편에 걸린 전사통지서는 아들을 잃은 노모의 한 맺힌 눈물이 배어 있었다.


“점점 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세대가 자라고 있어요. 그만큼 6·25 전쟁에 대한 기억이 사라지는 셈이죠. 그들에게 이 지역을 지키기 위해 어린 나이에 청춘을 바친 학도병들의 참뜻을 전달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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