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크러쉬(Girl Crush)' 여성들이 여성에 빠졌다
  • 하재근 대중문화 평론가 (sisa@sisapress.com)
  • 승인 2016.08.26 13:35
  • 호수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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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계 장악한 ‘걸크러시’ 전성시대…당당한 ‘센 언니’들에 열광하는 여성

지난 4월에 KBS는 여성들의 리얼버라이어티 《언니들의 슬램덩크》를 편성했다. 최근 지상파 예능 침체로 퇴출되는 프로그램들까지 나타나는 가운데 이 프로그램은 살아남았다. 멤버들이 ‘언니쓰’라는 걸그룹을 만들어 신곡을 출시했는데, 음원차트 1위에까지 올랐다. ‘언니쓰’ 멤버의 맏언니인 라미란은 이 프로그램 후 당대 최고 스타만 한다는 주류 광고모델에 캐스팅됐고, 주말드라마 주연 배역까지 따냈다.

 

이 프로그램이 어떤 시청자 층을 목표로 기획됐는지는 제목에 명확히 드러나 있다. 《누나들의 슬램덩크》가 아닌 《언니들의 슬램덩크》, 그리고 팀 이름은 ‘누나쓰’가 아닌 ‘언니쓰’다. 여성 시청자를 대상으로 만들어진 프로그램인 것이다. 전통적으로 여성 시청자를 대상으로 기획된 프로그램은 남성 출연자를 내세웠다. 《오빠들의 슬램덩크》가 자연스러운 기획인 것이다. 하지만 이 프로그램은 오빠가 아닌 언니를 내세웠다. 여성 시청자를 대상으로 여성 출연자를 내세워도 승산이 있다고 본 것이다. 예상은 적중했다. 여성들이 여성에 빠졌다.

 

여성 시청자를 대상으로 여성들만 출연하는 프로그램 《언니들의 슬램덩크》


김숙, ‘숙크러시’ 별명…걸크러시 사극도

 

지금이 ‘걸크러시(Girl Crush)’의 시대이기 때문이다. 걸크러시란 ‘소녀(Girl)’와 반하다는 뜻의 ‘크러시 온(Crush On)’을 합성한 말로 여성이 여성에게 반하는 현상을 가리킨다. 동성의 성적인 매력에 빠져드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롤모델이나 대리만족의 대상 및 선망의 대상 등으로 호감을 느끼는 현상이다.  

 

MBC 주말드라마 《옥중화》는 처음부터 조선판 걸크러시로 기획됐다. 미모와 총명함, 각종 재주, 무예실력까지 갖추고 온갖 난관을 헤쳐 나가는 여주인공을 내세운 것이다. 극 중에서 여주인공이 종종 남자와 액션대결을 펼치는 것은 바로 걸크러시를 염두에 둔 연출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사극에까지 영향을 미칠 정도로 요즘 걸크러시가 대세다.

 

걸크러시가 본격적으로 대두된 것은 2015년 여름, 마마무의 《음오아예》 때부터였다. 당시 여러 신인 걸그룹이 각축을 벌였는데, 섹시 콘셉트를 내세웠던 걸그룹들을 제치고 마마무가 신인 중 원톱으로 올라섰다. 마마무는 남성들을 대상으로 섹시나 귀여움 등을 내세우는 것이 아닌, 실력을 내세운 팀이었다. 그리고 《음오아예》 뮤직비디오에선 멤버들이 남장을 하고 등장했다. 특히 문별의 남장이 화제가 되면서 ‘잘생쁨’(잘생긴 예쁨)이란 신조어가 인터넷에서 뜨고, 여성팬들이 민감하게 반응했다. 이때부터 멋진 여자, 당당한 여자 캐릭터를 내세우는 걸크러시가 화제가 된 것이다. 마마무 팬덤이 최근 1년 사이 6배 이상 늘어난 것으로 추산되는데, 이런 것을 통해 걸크러시의 위력을 기획자들이 실감했다. 

 

개그우먼 김숙도 ‘가모장(家母長)’ 캐릭터를 통해 걸크러시로 데뷔 이래 최대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어디서 너 남자짓이야” “나의 이상형은 조신하게 살림하면서 문제 푸는 남자거든요. 얼마나 조신하고 예뻐요” “남자가 여자 들어오면 방긋방긋 웃고 그래야지” “남자가 돈 쓰는 거 아니야” 등 여성들에게 통쾌하게 느껴지는 발언을 통해 ‘숙크러시’라는 별명까지 생겼다.

 

다음소프트의 빅데이터 분석에선, 걸크러시 언급량이 2011년 단 1회에서 2015년엔 4만3000여 회, 올해엔 상반기에만 벌써 14만 회 이상으로 늘어났다. 솔직하고 당당한 ‘센 언니’ 언급량은 2011년 571회에서 2015년 2만718회로 늘었다. 언니 관련 감성 키워드 중에선 ‘착하다’가 줄어든 반면, ‘멋지다’와 ‘당당하다’가 늘어났다. 당당한 언니에 대한 대중 선호도가 폭발적으로 커진 것이다.

 

이러다 보니 대중문화산업 기획자들이 걸크러시에 주목한다. 최근 오디션으로 뜬 걸그룹 IOI와 YG엔터테인먼트에서 오랜만에 데뷔시킨 걸그룹 블랙핑크 모두 걸크러시 화보를 찍었다. 안무도 과거엔 섹시나 귀여움만 내세웠다면, 요즘엔 중간에 ‘씩씩함’을 표현하는 경우가 늘었다. 블랙핑크도 그렇고, 최근 대세 걸그룹으로 떠오른 트와이스도 《치어업》 후반부에 씩씩함 코드를 삽입했다. 노래 가사에서도 여성의 당당함을 표현할 때가 많다.

 

배우 박보영은 남성팬을 위한 애교를 요구받자 “왜 항상 오빠에게 부려야 하냐. 언니들도 보고 있다”고 되받아쳐 호응을 이끌어냈다. tvN 《굿 와이프》에선 나나가 연기하는 김단이 남자에게 매달려 울고 짜지 않는 당당함을 보여줘 걸크러시 캐릭터로 떠올랐다. 심지어 종근당건강은 ‘걸크러시’라는 이너뷰티 브랜드를 새로 출시해 2030 여성소비자 공략에 나서기도 했다. 

 

걸크러시 현상이 새로운 것은 아니다. 걸크러시라는 조어 자체가 과거부터 있어왔고, 여학교에서 멋진 친구나 선배 언니를 동경하는 현상도 그전부터 있어왔다. 그런데 왜 최근 들어 이런 현상이 폭발적으로 나타난 것일까. 걸크러시 트렌드가 터진 시기에 나타난 사회문화 현상은 ‘여성혐오’의 폭발이다. 여성에 대한 적대적인 목소리가 기승을 부리면서 여성들의 불안감이 커졌다. 여성을 대상으로 한 범죄 사건의 보도가 잇따르면서 공포가 현실화됐다. 사회 진출을 많이 하긴 했으나 유리천장은 여전히 존재했고, 여성을 수동적인 존재로 보는 시각도 사라지지 않았다.  

 

이럴 때 당당하게 모든 역경을 이겨낼 것만 같은 언니들이 여성들의 울분을 풀어준 것이다. 현실에선 차별과 억압, 여성을 향한 공격에 위축되지만, 미디어 속의 언니는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준다. 가부장적인 남성이 여성에게 하는 말들을 그대로 되받아쳐 남성에게 돌려주는 김숙을 향한 ‘숙크러시’ 현상은 이런 맥락에서 발생했다.

 

과거 여성이 억압적 현실을 숙명이라고 생각했을 때는 걸크러시 현상이 생길 수 없었다. 요즘 들어 여성의 권리의식이 커진 반면 사회적 억압은 사라지지 않은 그 간극 속에서 욕구불만이 생기고, 그 욕구불만을 날려주는 멋진 언니에 대한 찬탄이 자라난 것이다. 여성의 권리의식과 여성에 대한 억압이 동시에 커지는 추세에선 걸크러시 현상도 계속될 것이다. 기획자들 입장에선 걸크러시 현상이 돈이 되는 일이다. 남성 팬덤보다 여성 팬덤의 충성도가 훨씬 강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대중문화산업계도 걸크러시 현상을 부추기는 쪽으로 전략을 짤 수밖에 없다. 따라서 앞으로 우린 더 많은 미디어 속의 씩씩한 여자들을 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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