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이 마지막 기회”... 영국, 러시아에서 잇따르는 엘리트들의 탈북
  • 김회권 기자 (khg@sisapress.com)
  • 승인 2016.08.26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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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는 이런 엘리트 출신들이 남한으로 올 것이라고 상상하지 못했을 거다."

영국과 러시아 등지에서 잇따라 북한의 엘리트 계층이 탈출했다는 소식에 탈북자들도 주목하고 있다. 국내 대학원에서 공부 중인 탈북자 최 아무개씨에게도 이번 태영호 주영 북한대사관 공사의 탈북, 그리고 러시아에서 들려온 또 다른 엘리트 외교관의 탈출 소식은 흥미로운 소재다. 최 씨는 "김정은 체제가 들어선 뒤 그 이전보다 탈북자들의 숫자는 줄어든 것으로 안다. 반대로 엘리트들의 탈출은 오히려 늘었다. 예전보다 소식이 자주 들리는 것 같다"고 말했다.

 

태영호 공사가 가족과 함께 한국으로 망명해 전 세계의 주목을 받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북한 무역대표부 간부가 부인과 함께 탈북한 사실이 뉴스로 전해졌다. 대북 소식통은 "태 공사에 이어 또 한명의 북한 외교관이 지난달 탈북했다"고 전했다. 탈북 시기는 태 공사가 망명을 시도한 때와 비슷한 7월 초다. 러시아에서는 이미 비슷한 일이 있었다. 7월 초, 제2도시인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북한 무역대표부 소속 김철성 3등 서기관이 제3국을 거쳐 한국으로 망명했다. 이번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탈북한 외교관은 김 서기관보다 고위직으로 알려지고 있다.

 

해외에 파견된 주재원이 홀연히 자취를 감추는 사건이 잇따르자 각국의 북한 대사관에는 비상이 걸렸다. 이미 이전부터 북한 국가안전보위부는 각국 주재 대사관에 "감시를 강화하라"고 지시를 내린 상태다. 대북소식통은 "각국 주재 북한 대사관과 영사관, 무역대표부는 무역 주재원 및 파견 노동자를 철저한 감시 아래 두고 있다"고 전했다.

 


여기에는 점점 늘어나는 북한 해외주재원들의 망명이 원인이다. 2013년 8명, 2014명 18명, 2015년에도 약 20명이 탈북해 한국에 도착했다. 김정은 제1위원장이 집권한 뒤 약 70명 이상의 고위급 간부가 숙청된 것과 맞물려 증가 추세로 돌아섰다. 강화되는 북한의 공포 정치 분위기가 망명으로 내몰리게 하는 셈이다. 여기에는 할당된 외화를 벌어들이지 못하거나 불법 행위가 적발되면서 처벌을 피하려고 탈북을 택하는 경우도 있다. 

 

다만 엘리트 계층은 좀 더 속내가 복잡하다. 북한에서 특권을 누려온 그들이다. 그러다보니 탈북에는 또 다른 면도 있다. 북한을 왕래했던 한 재미교포는 자신이 본 해외 주재 북한엘리트의 모습을 이렇게 설명했다.

 

"평양에서 중국 단둥(丹東)행 기차를 탔다. 때마침 바로 옆에 북한 무역대표부 소속 가족과 함께 갔다. 중국에 있다가 북한에 잠깐 업무로 들어온 거라고 하더라. 평양에서 봤던 북한 주민들보다도 오히려 옷매무새나 말투가 세련됐다."

 

"북한 국경을 벗어나가기 전까지 그를 비롯해 아내와 아들까지, 모든 가족들이 무표정했다. 그래서 원래 그런 가족인 줄 알았다. 그런데 기차가 북한 국경을 지나 중국으로 들어서자 갑자기 말수가 많아지고 표정에 활기가 넘치더라. 아마 중국과 사뭇 다른 북한의 분위기가 그들을 짓누른 것 같았다."

 

"아이가 북한을 벗어나자 활발해지는 그 모습을 보고 부모들이 어떤 기분이었을까 싶었다. 아마 만감이 교차했을 거다."

미국의 자유아시아방송(RFA)은 북한에 정통한 소식통의 말을 빌려 "서방에 주재하는 북한 외교관들의 가장 큰 고민은 자녀 교육과 미래에 관한 문제다. 이미 서구식 교육과 문화에 익숙한 아이들을 통제할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여기에 이들은 해외생활을 통해 바깥 세상을 잘 알게 된 특수 계층이다. 현 북한 체제가 어둡다는 인식이 이들 사이에 확산되면서 엘리트들의 탈북 행렬을 증가시킬 수 있다는 게 우리 정부와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이미 6월부터 본격적으로 해외 공관과 무역기관에 대한 평양의 적극적인 단속이 시작됐다. 이것과 때맞춰 외교관들의 탈출 행렬이 이뤄진 것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들이 탈출하던 때는 해외 곳곳의 외교관들이 가족과 함께 평양 귀환을 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한 탈북자단체 관계자는 "2009년부터 실시되고 있는 '가족동반제도'가 이번 기회에 폐지될 가능성도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보통 북한 외교관이나 주재원이 해외에 나가게 되면 3~5년 정도 가족과 떨어지게 된다. 이런 불만을 무마하기 위해 실시된 게 가족동반제도다. 하지만 애초 북한 당국이 우려했던 대로 가족 단위의 탈북이 이뤄지면서 이 제도가 철회될 수 있다는 얘기다. 이럴 경우 오히려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탈북 시도가 늘어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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