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용 회고록] “우리당 승리 위해 적극 나서고 싶다”
  • 박관용│前 국회의장 정리=김현일 대기자 (sisa@sisapress.com)
  • 승인 2016.09.08 09:17
  • 호수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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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대통령, 공공연한 지지 발언이 야당 촉발…선관위 자제요청 묵살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彈劾·이하 탄핵)’ 주역으로는 당시 여당 (새천년)민주당에선 조순형 대표와 김경재·추미애 최고위원 등이 꼽힌다. 바로 그 추 위원이 친(親)노무현(친노)·친문재인(친문) 세력이 주도하는 더불어민주당의 대표가 됐다. 친노·친문의 ‘압도적’ 지지로. ‘노사모’ 등이 핵심에 포진한 친노 진영이 ‘적(敵=추 의원)’을 대표로 용인(容認)한 것은 ‘불가사의(不可思議)’에 가깝다. ‘탄핵 가담’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성심을 다한 ‘속죄(贖罪)’ 노력이 인정을 받았기 때문이라지만 보다 궁극적인 이유는 친노·친문의 내년 대선을 겨냥한 ‘전략적 선택’이라는 관측이 일반적이다. 다 지난 일이라지만 탄핵 정국에서 추 대표의 입장이나 역할에 대해선 주장이 엇갈린다. 추 대표는 후일 ‘마지못해’ 탄핵에 동조했다는 식으로 말하고, 김경재 당시 최고위원은 “초반엔 비판적이었으나 막판엔 탄핵소추안 문안을 다듬는 등 가장 적극적”이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을 적극 지지하던 새천년민주당 의원들 상당수가 열린우리당 창당에 반대했다. 더불어민주당 대표로 선출된 추미애 의원도 그중 하나다. 추 의원은 “분명 잘못한 것이고 제 정치인생 중에 가장 큰 실수고 과오”라고 사죄, 친노·친문 진영의 지지를 이끌어냈다. 사진은 2002년 대선 당시 국민참여운동본부장으로 유세에 나선 추 의원. © 연합뉴스

탄핵안 다듬은 추미애 의원은 ‘더민주’ 대표

 

“2003년 2월 출범한 참여정부의 최대 고민거리의 하나는 여소야대 국회였다. 당장의 정국을 헤쳐 나가는 데 결정적 장애였다. 이를 해소하는 방법은 정계개편밖에 없었고 그 대의명분을 지역분할 구도 타파에서 찾았다. 현실적으론 새 정부에 덧씌워진 ‘동교동’이라는 짙은 부패 이미지를 털어내기 위해서도 절실했다. 열린우리당(열린당)이 창당하면서 ‘새롭고 깨끗한 정치실현’ 등 4대 강령과 함께 ‘전국 정당’을 표방하고 지역주의 타파를 외친 것도 그래서다.” 당시 여권 관계자들은 노 대통령이 지역구도 극복을 위한 선거제도 개편을 전제로 총리지명권·조각권을 한나라당이 행사하는 대연정(大聯政)을 제의(2005년 7월)할 만큼 집착했다고 술회한다. 그러나 그 시절 한나라당을 이끈 박근혜 대표는 “(열린당이) 지역주의 집착당임을 재확인한 것”이라고 일축했고, 여권 내부에서도 통렬한 비판이 제기되면서 갈등과 혼란만 초래됐다. 거센 내부 반발의 중심에는 호남권 의원들이 있었다. ‘결과적으로 호남만 소외된다’는 이유에서였다. 개혁파 의원들은 김대중(DJ) 전 대통령도 지역타파를 위한 신당 창당 노력을 지지했다며 호남권 구주류의 저항을 비판하고 있는데 이에 대해선 다른 해석도 있다. “철저한 현실주의자인 DJ의 새 집권세력과 대치를 피하기 위한 의례적 발언이었다”는 것이다. 아들들까지 구속된 전직 대통령으로선 안위를 신경 써야 했다는 말이다.

 

“민주당 내부에 긴장이 없을 수 없었다. 2002년 대선 과정의 앙금 때문이다. 민주당 원로 중진들은 정권 재창출 과정에 자신들의 공이 컸다고 자부했지만 노 대통령의 생각은 달랐다. 오히려 후보단일화니 뭐니 하며 본인을 괴롭혔던 걸림돌 그 이상이라고 여겼다. 대통령은 이들을 철저히 배제했다(개혁파들은 호남권 구주류 중진들을 구악(舊惡)으로 규정, 청산 대상으로 간주). 당연히 자파 인물과 민주당 외부의 유시민 등 이른바 개혁파를 끼고 돌았다. DJ도 당선 후에는 옛날 측근을 멀리했고, 그래서 우리들이 섭섭해하긴 했다. 

 

하지만 노 대통령의 경우는 (자신의 힘으로 대통령이 된)DJ와 달라야 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민주당 고참들은 배은망덕이라며 이를 갈았다. ‘데려다 (대통령)만들어줬더니’ 하는 불만이 그치지 않았다. 그나마 내가 대통령과 ‘통하는’ 사이였다. 대선 때 열심히 뛰어준 것을 대통령도 익히 알기 때문이었다. 어쨌거나 여당 내부가 한시도 편치 않았는데 그러더니 이내 신당 얘기가 나왔다. 대선 직후 물밑에서 오가던 논의가 표면화된 것이다. 명분은 ‘지역편중 현상을 깨지 않는 한 역사를 주도 못한다’였고, ‘올림피아 토론’이 발원지다. 서울 세검정에 위치한 올림피아호텔에서 수시로 열리던 쇄신파 모임인데, 나는 ‘어느 정당이건 지역 색깔은 있게 마련이다. 지역색을 이유로 신당을 운위해선 곤란하다’고 역설했지만 대통령을 비롯한 개혁파는 지역타파를 외치며 신당 쪽으로 몰아갔다. 나는 ‘이를 빌미로 새로운 당을 만드는 것은 위험하다’는 말을 던지곤 모임에 더 이상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 참여하라는 거듭된 종용을 거부하면서 ‘대통령 되자마자 신당 얘기하는 것은 배신’이라고 나무랐다. 그러나 방향이 정해진 토론의 결과는 자명했다. 열린당 신주류와 한나라당 내 진보 성향 의원 등을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묶는 신당 그림이 그려졌다. 단순한 창당이 아니라 일대 정계개편이 본격화된 것이다. 

 

신호탄은 7월7일 한나라당 쪽에서 쏘아 올려졌다. 여권과 교감(交感)이 이뤄진 김부겸·김영춘 등 ‘독수리 5형제’가 선도 탈당했다. 뒷전에서 이뤄지던 민주당의 탈당 설득·확인 작업도 노골화됐다.” 이듬해 탄핵 전면에 섰던 김경재 전 의원의 회고다. 신당 창당 명분을 공감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집권의 발판이 된 민주당을 깨는, 그 중심에 있던 중진들을 제물(祭物)로 삼는 것은 정도가 아니라는 얘기다. 사실 정치판 전체를 ‘보수 대(對) 진보’ 양자 구도로 재편하려는 시도는 시대정신에도 부응했고, 이는 열린당 창당 뒤 지지율이 선두로 치솟은 것에서도 증명된다. 그럼에도 민주당 잔류파가 탈당파의 두 배가 됐다. 당적 이동에 따른 부담감, 신당에서의 소외 우려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내부 설득, 세 규합이 한계에 이른 것을 확인한 개혁파 30여 명은 9월20일 탈당을 감행했다. 이렇듯 머릿수는 적었지만 창당(11월11일)에 이어 2004년 1월 임시전당대회가 열린 뒤 열린당의 주가는 치솟았다. 새정부 출범 얼마 안 돼서 친형과 측근 비리로 세상이 떠들썩했고, 대통령이 정기국회(10월)에 나와 자신에 대한 재신임 국민투표를 제안할 정도였는데 신당 바람이 일거에 쓸어냈다. 국면 전환에 성공한 것이다.

 

‘노 대통령 탄핵’을 주도했던 새천년민주당 김경재 최고위원(왼쪽). 김 최고는 제16대 대선 당시 홍보본부장으로서 노무현 후보를 적극 도왔으나 열린우리당 창당을 계기로 완전히 결별했다. © 뉴스뱅크이미지

부아 돋운 “민주 찍는 것은 한나라 돕는것” 

 

“노무현 정권이 깨끗하다고 자부하지만 그렇지만도 않다. 취임 얼마 안 가서 친형 노건평씨 관련 추문이 떠돌았고 대통령의 집사라는 최도술 청와대총무비서관 등의 비리가 줄줄이 터져 나왔다. 그럼에도 대통령은 이들 비리를 감싸기만 했다. 자신에 대한 비판은 참지 못했다. ‘상대(죄)의 10분의 1은 죄가 아니다’는 식 발상인데 이건 아니다. 그는 국회 시정연설을 하면서 재신임 국민투표까지 꺼냈다. 법적 사유가 안 되는 대상을 국민투표에 부치자는 주장은 지금도 황당하기만 하다. 이를 정면돌파라고 생각했는지 모르나 기존 질서 부정·거부 일변도는 국가원수가 취할 태도는 결코 아니다.” 박관용 전 국회의장은 대통령 스타일이라고 접어주기엔 무모함을 넘어 위태로운 게 너무나 많았다고 술회한다. 대통령이 기분 내키는 대로 말을 던질 때면 아찔했다고 했다. 

 

아무튼 열린당에 대한 여론의 지지를 확인한 대통령은 거침없이 나아갔다. 기회가 닿는 대로 열린당 지지를 호소했다. “여러분의 혁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시민혁명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우리 위대한 노사모가 다시 한 번 뛰어달라”는 12월19일 당선 1주년 기념행사 연설은 그 하이라이트다. 대통령의 잇단 아슬아슬 발언에 촉각을 곤두세우던 야당, 특히 민주당이 발끈할 만한 내용이 전해졌다. 대통령이 총선 출마를 위해 청와대를 떠나는 측근들에게 “내년 총선에서 민주당을 찍는 것은 한나라당을 도와주는 것으로 인식될 것”이라고 독려한 것. 야당의 고발을 받은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선거의 자유와 공정성을 해칠 우려가 있다”며 자제를 요청했지만 대통령은 막무가내였다. 초선 의원들과 만나선 “입당하면 열린당 승리를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고 싶다. (선거 때)대통령으로서 도대체 뭘 하면 되고 뭘 하면 안 되는지 (선관위에)묻고 싶다”고 한 술 더 떴다.

 

박 전 의장은 대통령이 49명에 불과한 ‘여당’의 총선 승리를 위해 공공연히 열린당 지지를 호소했고 이런 것이 가뜩이나 들끓던 새천년을 촉발했다고 말한다. 열린당이 선전(善戰)할 경우 가장 타격을 입게 될 민주당이니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는 것이다. 그는 “정치인으로서 대통령이 여당에 도움을 주는 것은 이해가 가지만 앞서와 같은 ‘무차별’ 발언은 아무래도 지나친 것”이라고 지적했다. 

 

 

영욕(榮辱)의 이름 열린우리당

 

열린우리당 그 자체는 9년 전 사라졌지만 오늘의 한국 정치 속에 살아 있다. 해체될 즈음의 행색은 바라보기 민망스러울 만큼 처참했고, 핵심들 스스로 ‘폐족(廢族)’을 자인했으나 지금은 제1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의 주축 세력으로 우뚝 섰다.

 

현직 대통령이 배경이 됐기에 사실상 여당으로 태어나, 사상 유례가 없는 대통령 탄핵을 맞고, 첫 총선에서 여대야소(與大野小) 고지를 밟으며 기세를 올리다가 한순간 국민으로부터 버림을 받고, 3년 만에 의석이 반 토막(152석→73석) 나는 등의 곡절 끝에 문을 닫았다. 그를 낳은 새천년민주당이 천년은커녕 5년을 못 갔듯이 ‘향년(享年)’ 3년8개월이 고작이다. 깨끗한 정치를 위한 시도 등은 공으로 기록되지만, 숱한 허물 때문에 자신들은 물론 진보 자체에 대한 회의(懷疑)까지 낳게 했다. 그러나 ‘진보에 대한 회의’ 기류가 보수의 오만(傲慢)을 불렀고, 그 덕분에 기사회생(起死回生)하는 역설(逆說)을 일궈냈다. 

구성이 원체 복잡다단해 성격 규정이 간단치 않으나 일단 ‘사회자유주의’를 이념으로 하는 중도개혁 정당, 김대중 대통령의 새천년민주당의 대를 이음으로써 ‘민주당 계열’로 분류된다.

 

명칭도 아주 복잡하다. 개방적 공동체를 지향한다며 ‘열린우리당’, 약칭 ‘우리당’으로 이름했다. 그러나 언론은 ‘우리당’이 일반명사 ‘Our party’가 돼 혼선을 초래한다며 ‘열우당’ 혹은 ‘열린당’으로 불렀다. ‘열우’는 ‘덜떨어진 사람(劣友)’으로 들리기에 여당 사람들이 극구 기피했다. 당시 ‘우리당’을 고집하자 민주당 잔류파와 보수진영에선 ‘폐쇄적인 너희들끼리’라는 의미의 ‘(닫힌)니네당’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외신들도 ‘Open party’ ‘Our party’ 등이 모두 마땅치 않자 소리 나는 대로 ‘Uri party’로 표기했다.

 

새천년민주당의 경우는 현직 대통령이 기존(새정치국민회의)의 여당을 확대 개편하는 형태였기에 잡음이 덜했으나, 열린당의 경우는 기존(새천년민주당)의 주류 세력을 배제하고 외부와 연합하는 방식이었으므로 반발과 갈등이 극렬했었다. 또 다수 의원이 신당 합류를 거부. 잔류파가 탈당파의 2배인 70명에 이르렀다. ‘천·신·정’을 비롯, 이해찬·정세균·김원기·원혜영·송영길·이강래·정대철 등이 탈당파의 주요 면면이다. 지난 8월말 더불어민주당 대표로 뽑힌 추미애 의원은 ‘친노무현(친노)’이면서도 탈당을 거부한 대표적 케이스. 추 의원은 탄핵 막판 탄핵소추안을 손질하는 등 전면에 나섰다가 당시는 물론 이번 대표 경선 과정에서도 애를 먹었다. 

 

열린당은 탄핵 역풍 덕에, 곧바로 이어진 총선에서 과반을 훌쩍 넘는 152석(비례 23석 포함)을 얻었지만 절대다수는 ‘힘이 아닌 혼란’으로 작용했다. 리더십 부재 속에 조직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초선 등이 제 뿔뿔 다른 목소리를 냈기 때문이다. 초선만도 108명이었고 ‘백팔번뇌’라는 조어도 생겨났었다. 3년8개월의 짧은 존속기간에 8대에 걸친 의장(대표)을 양산한 것도 국정 표류의 흔적이다. 김원기-정동영-신기남-이부영-임채정(임시)-문희상-정세균(임시)-유재건(임시)-정동영-김근태-정세균이 그들. 임시 의장도 3명이나 된다. 안팎으로 얼마나 시끄러웠고 호된 시련을 겪었는지를 웅변해 준다. ‘행복주식회사 우리당’을 자처했지만 다수 국민들은 행복과 거리가 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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