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리더십] 몽골의 후예가 놓은 포용과 관용, 통합 제국 기틀 놓다
  • 김경준 딜로이트 안진 경영연구원장 (sisa@sisapress.com)
  • 승인 2016.09.08 11:01
  • 호수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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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바르, 인도 최초의 중앙집권국 무굴제국 기틀 놓은 몽골 후예

악바르(1542~1605)는 몽골의 후예 인도 무굴제국의 3대 왕으로 50년간 재위하면서 군사적으로 북부 인도 대부분 지역을 석권하며 영토를 확장했고 사법·행정 등의 통치제도 전반을 확립했다. 이슬람 정권이면서 힌두교·조로아스터교·불교 등 다양한 종교에 대한 포용책을 실시하고 정복지역에도 관용을 베풀어 외부의 침략정권이면서도 통합성 높은 체제를 수립했다.

 

 

악바르, 자애로운 군주 이미지 구축

 

중국은 중앙부에 중원(中原)으로 불리는 평원이 펼쳐져 정치세력의 구심점이 되기 쉬운 지형이어서 기원전 221년 진나라가 통일왕조를 세운 이래 분열과 통합을 반복하면서도 강력한 중앙권력이 이어져 오는 역사적 배경이 됐다. 반면 인도는 중간에 위치한 험준한 데칸고원이 사방을 분리하는 자연장벽이 돼 교통이 단절되고 정치적 통합이 어려운 지리적 특성으로 북인도와 중앙고원, 남인도가 비교적 독립적 성격을 띠게 됐다. 북부 인도를 중심으로 간간이 통일제국이 등장하는 가운데, 중부고원은 군소왕국들이 산재하고, 남부는 별도의 왕국들이 병존하는 구조가 기본적으로 이어졌다. 인도 최초의 통일제국인 마우리아 왕조는 기원전 322년에 성립해 150년간 존속하는 동안 최전성기로 인도 역사상 최대 판도를 이뤘던 아소카(기원전 304~기원전 232년)의 치세에도 남인도는 정복하지 못했다. 마우리아 멸망 후 500년의 분열기를 거쳐 북인도를 통일한 굽타 왕조(320~550년)의 230년간의 치세 후에 군소국가들이 각축하는 400년간의 분열시대가 다시 이어졌다. 

 

악바르 대제 초상화


인도 대륙에서 기원전 327년 그리스 마케도니아 알렉산드로스의 침공 이래 1300여 년 동안 외침은 없었으나 11세기부터 이슬람 세력들의 침략이 시작됐다. 이후 15세기 전반까지 400여 년 동안 북부 인도는 이슬람 세력들이 번갈아 차지하면서 외래종교인 이슬람 지배권역으로 변모했다. 남부 인도는 토착종교인 힌두교 권역으로 유지됐다. 이슬람 계열의 로디 왕조가 북부 인도를 통치하던 16세기 초반 투르크 계열 족장으로 칭기즈칸의 16대 후손을 자처하고 티무르를 계승한다는 명분을 내건 바부르(1483~1530)가 등장한다. 중앙아시아 아프가니스탄 일대를 석권한 후 인도 북부를 침공한 바부르는 1526년 로디 왕조를 멸망시키고 무굴제국을 수립한다. 무굴(Mughul)이란 바부르의 부족명으로 몽골(Mongol)을 의미한다. 건국자 바부르 사망 후 초창기의 무굴제국은 위기에 빠져 바부르의 아들로 왕위에 오른 후마윤 (1508~1556)은 아프간 계열 귀족에게 축출돼 망명객의 신세가 됐다. 후마윤은 페르시아의 지원으로 1555년 무굴제국을 되찾았으나 이듬해 사망하고 아들 악바르가 왕위에 오른다.

 

1542년 부친 후마윤의 망명지에서 태어난 악바르는 어린 나이부터 전쟁터에서 잔뼈가 굵으면서 체계적 교육을 받지 못해 평생을 문맹으로 살았다. 1556년 13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지만 왕권은 불안정했고, 주변 세력들의 도전도 심각한 위협이었다. 특히 오늘날 파키스탄과의 접경지대에서 전통적인 지배층으로 군림해 온 아리안계 힌두교도들인 라지푸트 계열의 왕국들을 제압하지 않고서는 제국의 존립이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는 가장 강력한 왕국인 메와르를 정복하면 나머지는 손쉽게 굴복시킬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1567년 공략에 나서 4개월간의 공방전 끝에 1568년 함락시켰다. 예상대로 다른 라지푸트 왕국들이 화평을 요청해 오자 각국 공주들과 결혼하는 형식으로 동맹을 맺었고 왕족과 귀족들을 무굴제국의 지도층으로 편입시켰다. 악바르의 정복은 계속돼 1586년 북서부의 카슈미르, 1591년 인더스강 하류, 1595년 아프가니스탄 남부의 칸다하르 등 북인도 전역으로 영토를 확장했다.

 

무굴제국 악바르 대제가 전쟁에서 이긴 후 수라트에 입성하는 모습


힌두-이슬람 문화 발달, 다양한 문화 공존

 

악바르는 광대한 영토에 수립된 중앙집권체제를 실질적으로 운영할 관료제를 시행해 영토를 일정 기준으로 나누고 중앙에서 관리들을 파견해 행정을 담당하게 했다. 중앙정부가 지방관들을 파견하고 감독하는 체제는 인도에서는 최초로 실행된 본격적인 중앙집권 제도였다. 외부에서 들어온 정복왕조로서 토착민들에게 권위를 보여주기 위해 호화로운 궁전에서 화려한 행사를 개최했다. 또한 친근감을 나타내기 위해 왕 자신이 매일 궁전의 창문을 열고 백성들과 직접 인사를 나누는 이벤트로 자애로운 군주 이미지를 형성해 정치적 기반을 확장했다.

 

타고난 군사적 재능에 어린 시절 망명지에서 전투를 벌이며 성장기를 보낸 경험이 더해져 정복군주로서 위업을 이뤘던 악바르는 종교적 관용과 다양한 문화에 대한 개방성에 근거한 정치·사회적 정책으로 무굴제국이 토착세력과 공존하고 함께 번영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었다. 토착 힌두교 세력들의 시각에서 과거 인도를 침공했던 이슬람 군주들이 한탕을 노리는 일종의 모험가들이었다면, 무굴의 악바르가 함께 공존할 수 있는 동반자로서 인정받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소는 종교에 대한 관용이었다. 악바르는 이슬람 신자였지만 힌두교 교리에 따라 소 도살을 금지하고 궁정에서 이마에 힌두교 표시를 하고 신하들을 만나기도 했으며, 기독교 예식에 참석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개인적 차원의 종교적 관용은 사회정책에도 이어져 이슬람교도가 아닌 이교도에게 징수하던 세금인 지즈야를 폐지하는 종교적 탕평책을 실시했다. 또한 라지푸트 계열의 힌두교도 왕들을 우대하고 무굴제국의 지배층으로 편입해 신생국가의 정치적 통합성을 높였다. 이러한 배경에서 힌두-이슬람 문화가 발달해 종교와 예술에서 융합됐고 인도에 다양한 문화가 공존할 수 있게 됐다.

 

그의 사후 아들 자한기르의 치세 때 정치적 혼란을 겪은 뒤 손자 샤 자한이 즉위하면서 다시 안정을 되찾았다. 샤 자한은 먼저 세상을 떠난 왕비를 그리워하며 지은 무덤으로 오늘날 인도를 대표하는 건축물인 타지마할을 후대에 남겼다. 샤 자한의 아들로 악바르의 증손자인 아우랑제브 시대에 무굴제국은 전성기를 누리고 이후 쇠퇴기에 들어서서 1857년 영국의 침략으로 소멸할 때까지 331년간 존속한다. 무굴제국은 인도에서 최초로 성립된 통일된 중앙집권국가이면서 마지막 통일국가로 역사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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