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용 회고록] “파국 막기 위해 탄핵만은 피하려 했으나…”
  • 박관용│前 국회의장 정리=김현일 대기자 (sisa@sisapress.com)
  • 승인 2016.09.29 10:39
  • 호수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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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 국회의장 “야당은 탄핵 대체할 ‘경고 결의안’ 외면, 청와대는 접촉마저 거부”

‘탄핵’은 2004년을 연 화두(話頭)다. 철저한 원칙주의자 조순형 민주당 대표의 경고를 계기로 표면화된 탄핵은 사흘 뒤인 1월8일 기자회견을 통해 ‘공식화’됐다. 그는 “대통령이 총선과 재신임을 연계할 경우 탄핵을 추진하겠다”고 선언했다. 원내 제1당인 한나라당 최병렬 대표도 국회 교섭단체 대표 연설에서 강력한 경고를 발한 것이다. 탄핵은 그 자체가 지닌 엄중한 의미 때문에 거론만으로도 심각하기 마련인데 제1·2당 대표가 무게를 실었으니 그 파장은 상상을 넘었다. 총선까지 앞둔 한국 사회 전체가 아수라장이었다.

 

‘닭 쫓던 개 신세’가 돼버린 새천년민주당(민주당)의 앙갚음은 자신들의 처지만큼이나 매서웠다. 노무현 대통령 취임 1주기에 때맞춰 ‘실패한 1년, 잃어버린 1년’이란 국정평가보고서를 배포했다. 청와대가 잊고 싶은 아픈 기억들을 집대성한 것이다. ‘불법 대선자금 한나라당의 5분의 1 육박’ ‘민경찬 펀드 의혹’ ‘안희정 향토장학금’ ‘양길승 청주향응 사건’ ‘최도술 검찰 소환 대책회의’ ‘청와대 공식 계좌 통한 불법자금 세탁’ ‘최도술 편법 출국’을 7대 비리의혹으로 적시했다. 한때 한솥밥을 먹은 터라 내용도 탄탄했다. ‘대통령 못해먹겠다 발언’ ‘우중(雨中)골프’ ‘태풍 와중의 오페라 관람’ 등 노 대통령의 11가지 자질부족 사례와 현대아산 정몽헌 회장 자살 등 21개 사건 이면도 자세하게 열거했다. 부부가 갈라서면 남남 사이보다 더 원수(怨讐)가 되고 침실에서부터 뒷돈거래에 이르기까지 외부에선 짐작도 못할 아주 내밀한 비사까지 까발려지는 경우와 흡사했다. 

 

탄핵 소용돌이가 휘몰아치던 2004년 3월11일 열린 국무회의.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는 노무현 대통령의 얼굴은 당시의 모든 상황을 대변한다. 오른쪽은 고건 총리 © 청와대사진기자단


 

‘돌아오지 않는 강’을 재촉해 건넌 여야  

 

노 대통령도 단 한 발짝 물러서지 않았다. 언론인 회합에 나와 열린우리당(열린당) 지지를 호소했다. 초반엔 “개헌선 무너지면~”식의 완곡한 어조였으나 “압도적 지지를 기대한다”로 노골화됐다. “열린당이 표를 얻을 수 있다면 합법적 모든 것을 다 하고 싶다”는 발언이 나온 것은 취임 1주년 바로 전날 열린 방송기자클럽에서다. 중앙선관위가 ‘선거법 위반’이라고 규정했음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선관위가 ‘선거중립 의무 준수’를 촉구하자 “납득 못한다”로 치받았다. 선관위가 “또 위반하면 한 단계 더 높은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다시 경고를 보내는 등 전대미문의 사태가 연속됐다. 나라 꼴은 엉망이었다.

 

“노 대통령은 야당이 사사건건 발목을 잡는 바람에 제대로 국정 수행을 못한다고 푸념했다. 대통령을 깎아내려 식물인간 상태로 만들려 한다고 했다. 정치권에 대한 불신은 극도에 이르렀다. 정치판을 ‘기성 보수 세력과 개혁 세력’ 대결 구도로 완전 재편하는 것만이 나라가 살길이라고 대통령은 확신했다. 이를 위해 당장 법 위반 시비가 있더라도 총선 승리가 우선이라는 게 대통령과 지도부의 생각이었다. 야당이 온갖 험담을 퍼붓는 데도 불구, 신생 열린당이 지지율 선두에 올라선 것은 결정적 힘이 됐다.” 당시 여당 관계자들의 증언을 종합하면 이렇다. 한결같다.

 

대통령의 선관위에 대한 반박이 나온 다음 날인 3월5일 민주당은 대통령의 사과와 재발방지 약속이 없으면 탄핵을 추진키로 결의했다. 민주당이 의원들을 상대로 탄핵안 서명 작업에 돌입하면서 탄핵은 급물살을 탔다. 사흘 뒤인 8일, 탄핵 역풍을 우려해 망설이던 한나라당도 탄핵에 가세했다. 

 

“총선을 불과 한 달여 앞둔 상황에서 탄핵은 무모했다. 노 대통령과 열린당이 탄핵은 안 된다면서도 탄핵을 부추기는 듯한 행태도 예사롭지 않았다. 탄핵을 유도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은 김근태 열린당 총무의 모습에서 언뜻언뜻 느껴졌었다. 김 총무가 홍사덕 한나라당·유용태 민주당 총무를 만류하긴 하지만 아닌 것도 같은…. 한나라당이 탄핵 발의 결정 전 최병렬 대표가 전화를 걸어왔다. 그와는 말을 트고 지내는 사이다. 그는  ‘탄핵안이 발의되면 전개될 상황은 빤하지 않은가. 그러니 경호권을 발동해서라도 의결이 되게 의장인 당신이 도와줘야겠다’고 했다. 내가 ‘이건 아니다. 전쟁터에 나가는 장군은 다리 위에선 말을 갈아타지 않는 법인데 총선이 머지않은 지금 위험천만한 일을 벌이는 것은 현명치도 않다’고 했더니 최 대표는 한마디로 잘랐다. ‘그럼 그런 나쁜 XX를 용서해 주란 말이냐’ ‘나라 꼬라지가 이런데 가만히 보고 있으란 말이냐’면서.” 박관용 전 국회의장의 회고다(박 의장은 ‘최병렬 대표가 본인에게 차기 대권 기회가 왔다는 판단에 강공으로 몰고 갔다’는 일각의 주장과 관련, ‘추측일 뿐’이라고 단언).

 

 

崔 한나라당 대표 “그런 나쁜 XX 용서 못해”

 

당시 야당들은 탄핵이라는 일대 거사(擧事)를 앞두고 민심 향배를 주시했다. 탄핵소추안이 발의된 9일의 대체적 반응은 ‘반대 65%, 찬성 31%대’. 한편 ‘대통령이 사과해야 한다가 60%, 사과 필요 없다 30%’였다. 대통령이 잘못은 했지만 탄핵은 지나치다는 것. 이런 여론의 추이가 야당의 결단을 주춤거리게 만드는 요소였는데 그러나 ‘성난’ 야당 의원들, 특히 배신감에 치를 떠는 민주당을 무마시킬 정도는 아니었다.

 

“우리 민주당은 ARS를 이용해 여론을 살폈다. 우리 조사로는 탄핵 지지율이 55~56%였다. 3월10일 국회의 탄핵소추안 처리가 불발된 직후 당 사무총장 강운태 의원이 들고 온 ARS 결과는 76%였다. 배신한 대통령에 대한 적개심이 원체 컸기 때문에 지지율에 더욱 고무됐던 게 사실이다.” 당시 민주당 최고위원으로 탄핵을 주도했던 김경재 전 의원의 설명이다.

 

탄핵안 국회 의결을 최종적으로 책임져야 하는 박관용 국회의장의 고뇌가 컸음은 당연했다. 박 의장은 그 길고도 짧았던 며칠의 시간을 ‘절대 고독’이라고 이름한다. 그는 탄핵 타당성 내지 명분, 실제 의사봉을 두드릴 때의 상황 등을 고심하면서 야당 총무들을 설득하고 각계 원로 등의 의견을 두루 경청했다고 했다.

 

“대통령이 중립적 선관위의 결정을 무시하고 한 술 더 뜨는 상황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마땅한 단어조차 없다. 전례가 없는, 황당한 경우여서 유사한 외국 사례를 찾을 수도 없다. ‘정부가 없음, 정치적 무질서 혹은 최고 권력이 없거나 비효율적인 데서 비롯한 무법 상태’를 가리키는 아나키(anarchy)라는 말이 있기는 하지만 우리는 대통령과 여당이 앞장서서 이런 상태를 조성하니 뭔가 이상하다. 그는 2003년 말 노사모 등 지지자들에게 ‘시민혁명 계속’을 당부했는데 혁명을 위해서라면 법질서는 무시해도 좋다는 것인지 정말 헷갈렸다. 

 

아무튼 국회의원 다수가 대통령을 탄핵하겠다고 벼르는 상황에서 탄핵을 해야 하는지, 탄핵이 최선의 방책인지를 따져봐야 했다. 노 대통령의 언행에 문제가 많은 것은 분명한데 그의 책략(탄핵 유도)에 말려드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은 더욱 커졌다. 탄핵소추를 대신할 다른 방안을 찾았다. ‘대통령에 대한 경고 결의안’이 그것이다. 선언적인 조치에 불과하지만 그것으로도 정치적 효과는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마음을 정한 나는 탄핵안이 정식 제출되기 전날인 8일, 4당 총무를 국회에서 멀지 않은 마포 가든호텔로 불러 모았다. ‘이대로 가면 파국이다. 나라가 위태롭다. 파국만은 막아야 한다’면서 탄핵안을 ‘경고 결의안’으로 대체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홍사덕 한나라당·유용태 민주당 원내총무는 시큰둥했다. 들은 척도 안 했다. 하기야 의원들을 규합하고 서명 작업을 끝낸 그들로서는 내 절충 시도가 탐탁하지 않았을 게다. 김학원 자민련 총무만 동의했다. 김근태 열린당 총무는 ‘경고 결의안’도 안 된다며 펄쩍 뛰었다. 비밀리에 마련한 총무 회동이었지만 호텔 방 밖에는 수많은 보도진이 대기하고 있었다. 방에선 말이 없던 총무들은 기자들을 만나자 저마다 목소리를 높여가며 입장을 토로했다. 다음 날 남덕우·이수성 전 총리 등 원로 7명을 63빌딩 식당으로 초청, 간담회를 가졌었다. 참석 원로들은 하나같이 ‘노 대통령 큰일 났습니다. 저래서야 어찌’하며 걱정을 태산같이 늘어놓았다. 탄핵이란 단어는 안 나왔지만 방치할 수 없다는 뜻은 확실했다. 여론이 (탄핵으로) 돌아가고 있음이 분명했다.” 

 

박관용 전 국회의장은 국회 권위 수호 차원에서 탄핵 의사봉을 잡기로 결심한 다음에도 파국을 막기 위해 대통령과의 직접 면담·절충을 시도했다고 한다. 그러나 대통령은 만남을 회피했고, 박 의장은 청와대의 이 같은 태도에서 탄핵을 ‘오히려’ 기대하고 있음을 감지했다고 밝혔다. 

 

 

이정현 대표 “탄핵 사죄”…박관용 前 의장 “역사적 사실을 멋대로 재단해선 안 돼”

 

이정현 새누리당 대표는 9월5일 국회 본회의에서 교섭단체 대표연설을 했다. 당 대표로 선출된 뒤 처음이다. 50여 분 동안 장문(長文)의 연설을 읽어 내려가는 내내 야당의 비아냥거림과 여당의 어색한 침묵이 교차했다.

 

이래저래 전체적인 점수는 낮은 편이다. 여당 내에서조차 박(薄)했다. 어차피 여당 대표를 깎아내리는 게 ‘전통’이었던 야당이야 그러려니 하더라도 여당의 이런 모습은 다소 의외였다. 계파 간 경쟁 심리의 결과도 아닌 탓에 더욱 그렇다. 그 이유는 다른 게 아니다. 이 대표가 노무현 대통령 탄핵을 잘못으로 규정한 등에 대한 불만이 자리한다. 이 대표는 “김대중 대통령 집권 시절 국정에 더 적극적으로 협조하지 못한 점 사과드린다”면서 “국민이 뽑은 노무현 대통령을 탄핵했던 것 역시 사과드린다”고 했었다. ‘잘못’이라고 단정하지는 않았지만 ‘잘못’이라는 의미가 문맥상으로는 확연하다. 특히 ‘국민이 뽑은 대통령’이란 대목에는 ‘국회가 감히 월권(越權)’을 했다는 뜻이 물씬 배어 있는 것이다. 그러니 지각 있는 이들의 속이 편할 리 없다. ‘다 지난 일이고 본인이 직접 관련된 사건도 아닌데’라는 새누리당 의원들의 몰(沒)인식과 안이함에다, 사안의 민감성 때문에 당 내부에서 공론화되지는 않았지만 한심함마저 감추지는 않고 있다. 

 

2004년 3월9일 야당 의원 159명이 서명한 탄핵소추안을 국회에 접수하는 민주당 관계자들 © 연합뉴스


2004년 3월 탄핵안 국회 본회의 의결 당시 의사봉을 잡았던 박관용 당시 국회의장은 “역사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망발”이라며 펄쩍 뛴다. 호남 출신인 이 대표가 호남의 환심을 사려고 크게 ‘오버’했다는 지적이다(이 대표는 “새누리당과 새누리당 전신, 지금의 새누리당 정부와 이전의 보수 정부가 본의든 본의가 아니든 호남을 차별하고 호남인의 자존심을 상하게 한 측면이 없지 않았다. 저는 새누리당 당 대표로서 이 점에 대해 참회하고 사과드린다”며 호남과의 연합·연대정치도 제의했다. 이 대표는 탄핵안 처리 당시 한나라당 사무처 국장급 실무자. 탄핵 역풍이 불던 17대 총선 때는 광주 서구 을에 출마해 1.03% 득표율-720표를 얻어 낙선).

 

“역사적 사실을 개인이 멋대로 재단하고 평가한 것은 큰 잘못이다. 개인이 아닌 당 대표로서 그랬으니 더 심각하다. 말이 안 되는 소리다. 이런 중차대한 문제를 당 대표로서 얘기하려면 당내 의견을 수렴하는 등의 절차를 거쳤어야 했다. 생각이 짧은 정도가 아니라 경망스러운 처사다. 호남에 어필하려고, 호남의 정서나 대표하면 어찌하느냔 말이다. 나는 내 개인 의사와 상관없이 국회의장으로서 사회를 봤다. 헌법 규정에 따른 정당한 절차를 밟은 것이다. 그런데 개인이 아닌 당 대표가 이런 식으로 내뱉으면 당의 꼴과 나라 장래는 어찌 되나.”

 

이 대표의 5일 발언을 화해를 위한 ‘정치적 제스처’쯤으로 치부하고 ‘대충’ 넘기던 여당 내부에서도 북한 핵 위기가 발등의 불로 떨어지자 비판의 목소리가 끓고 있다. 김대중 정부가 북한에 건넨 4억5000만 달러가 핵폭탄과 미사일로 둔갑, 남한을 옥죄는 판국에 사과는 무슨 사과냐는 비판이다. 야당 의원들이 이 대표의 국회 본회의 연설 당시 퍼부었던 “공부 좀 하라”는 야유가 딱 들어맞는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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