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틸리케의 월드컵, 늪에 빠졌다
  • 이란 테헤란=서호정 축구 칼럼니스트 (sisa@sisapress.com)
  • 승인 2016.10.13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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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욕의 이란전 ‘내용 없는 축구’ 늪에 빠졌다

“지금 이 상태라면 이란에 갈 수 없다고 생각한다.” 

슈틸리케 감독이 이란과의 결전을 위해 출국하는 장소에서 가진 인터뷰는 다소 의외였다. 하루 전 카타르를 상대로 한 2018 러시아월드컵 아시아지역 최종예선 3차전에서 3대2 신승(辛勝)을 거뒀지만 경기 내용에 대한 비판이 일자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이란은 A조 선두를 놓고 한국과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는 라이벌이었다. 42년간 테헤란 원정에서 한 번도 승리하지 못한 한국으로선 이번에 새 역사를 쓰고 단숨에 조 1위로 오르겠다는 목표가 있었다. 하지만 슈틸리케 감독이 언론과 팬을 향해 던진 일종의 협박성 발언은 응집력을 와해시켰다.

 

대표팀을 둘러싼 분위기가 사분오열하는 한국과 달리 이란은 승리에 집중하고 있었다. 대표팀의 이란 원정을 취재하기 위해 찾은 테헤란의 모든 사람들은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지난 1996년 아시안컵에서 이란 축구의 영웅인 알리 다에이가 4골을 넣는 맹활약 속에 한국을 6대2로 꺾은 바 있어 한국 기자들만 보면 “식스, 투”를 외쳤다. 박지성·이영표 등 한국 축구의 황금 세대가 출동했던 2009년 맞대결에서도 박지성의 극적인 헤딩골로 1대1 무승부를 기록했을 뿐이다. 역대 6번의 테헤란 원정 결과는 2무4패였다.

 

한국 축구 대표팀을 이끌고 있는 울리 슈틸리케 감독 ⓒ EPA연합

 

원정팀의 지옥, 아자디의 압도적인 열기

 

왜 한국이 테헤란에서 고전하는지는 직접 방문해서 깨달을 수 있었다. 1200m 고지대에 위치한 테헤란은 원정팀 선수들의 호흡에 이상을 줘 운동능력을 저하시켰다. 이미 테헤란에서만 네 차례 경기를 치른 기성용은 “기압 차인지 패스가 떨어져야 하는 지점보다 더 나가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이란의 홈구장인 아자디 스타디움의 위압적인 분위기도 큰 변수였다. 이청용은 경기 이틀 전 “선수들끼리 그라운드 내 대화가 불가능할 정도로 시끄럽다. 관중들이 피우는 담배연기에 그라운드로 날아드는 물병 등 선수들을 위협하는 요소도 많다”며 우려를 표시했다.

 

한국과 이란의 경기가 열린 10월11일은 이슬람 시아파의 구심점인 이란의 최대 종교 추모기간 중 하나인 ‘타슈아’였다. 이란은 이 기간 동안 온 나라가 검은 깃발로 덮이고 국민들은 검은 옷을 입고 순교한 종교 지도자(이맘)를 추모한다. 이틀간의 공휴일 동안에는 엄청난 교통체증으로 세계적으로 악명 높은 테헤란의 도로가 뻥 뚫릴 정도다. 하지만 아자디 스타디움은 예외였다. 7만5000명을 수용하는 경기장 관중석은 검은 옷을 입은 남성들로 가득 찼다. 경기장 곳곳이 담배연기로 자욱했다. 경기장 주변은 만일의 상황에 대비해 4000여 명의 군인과 경찰이 집결하는 삼엄한 분위기가 연출됐다.

 

경기 3시간 전부터 종교 행사를 진행하던 아자디 스타디움은 1시간30분을 앞두고는 본격적으로 응원 열기가 들끓었다. 관중석에서는 “이란”이 연호됐고, 국민들의 높은 지지를 받는 대표팀 감독 카를로스 케이로스의 이름도 크게 울렸다. 본부석 관중석과 맞은편 관중석은 서로 번갈아가며 응원가를 불렀다. 검은 물결이 들썩였다. 이란 국영방송의 아미리 기자는 “노래와 춤이 이렇게 대규모로 허락되는 곳은 축구장이 유일하다”고 말했다. 이슬람 율법에 의해 평소 억눌린 이란인들의 감정이 폭발하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왜 아자디 스타디움이 원정팀의 지옥이 될 수밖에 없는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한국 축구 대표팀 선수들이 10월11일 이란 테헤란 아자디 스타디움에서 열린 2018 러시아월드컵 아시아지역 최종예선 4차전 직후 경기장에 쓰러져 있다. ⓒ EPA연합

경기 하루 전 기자회견에서는 특유의 심리전도 벌어졌다. 이란 취재진은 슈틸리케 감독에게 “구자철이 독일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테헤란을 감옥으로 묘사했다”며 해명을 요구했다. 뒤이어 기자회견에 등장한 케이로스 감독과 유럽에서 성장한 두 이란 국가대표 데자가와 구차네자드에게 구자철의 발언에 대한 답변을 요청했다. 현재 구자철이 뛰고 있는 독일에서 성장한 데자가는 “그 기사를 보고 화가 났다. 테헤란은 자유가 있는 곳이다. 내일 경기장에 오는 팬들이 가만있지 않을 것 같다”며 살벌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그런 심리전과 선수들의 인터뷰가 전달됐는지 엄숙한 추모 분위기에도 아자디 스타디움은 7만5800명의 관중이 들어찼다. 구자철은 “실제 얘기한 내용과 다르다. 감옥이라는 표현을 쓴 적이 없다”고 말하며 이란의 심리전에 말리지 않겠다고 했지만, 만원 관중을 모은 것으로 이란 언론의 목표는 달성된 상황이었다.

 

 

‘유효슈팅 0개’ 굴욕적인 경기와 최악의 인터뷰

 

슈틸리케 감독은 전날 기자회견을 의식했는지 구자철을 선발 명단에서 빼고 김보경을 투입했다. 최전방에는 지동원이 섰다. 수비라인도 4명의 선수 중 2명이 바뀌었다. 카타르전에서 나타난 수비 조직력 불안을 선수 교체로 해소하려는 듯했다. 하지만 경기 내용은 일방적이었다. 초반부터 이란은 한국을 매섭게 몰아쳤다. 특히 양 측면 수비수가 정확한 타이밍에 펼치는 오버래핑이 한국 수비를 파괴하기 시작했다. 슈틸리케 감독은 지난 1년 가까이 오른쪽 풀백에 센터백인 장현수를 세우는 변칙 기용을 이어왔다. 왼쪽 풀백은 주전 없이 경기마다 바뀌는 상황이었다. 언론과 팬들이 가장 많은 비판을 던진 부분이다. 결국 거기서 문제가 터졌다. 케이로스 감독은 “한국의 약점을 잘 알고 있었다. 측면에서 지속적인 공격으로 주도권을 잡고자 했다”고 말했고, 실제로 이란은 측면 공격으로 한국을 무너트렸다. 전반 25분 터진 아즈문의 결승골은 오른쪽 측면 돌파로 만들어졌다.

 

한국 축구 대표팀은 10월11일 이란전에서 단 1개의 유효슈팅도 기록하지 못한 채 내용 면에서도 완패를 당했다. 사진은 이란전을 하루 앞두고 훈련을 하는 선수들 모습 ⓒ EPA연합

슈틸리케 감독은 후반 시작과 동시에 풀백을 바꾸며 자신의 잘못을 시인했다. 그러나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고 주도권은 계속 이란의 차지였다. 강한 압박과 빠른 공격 전개에 한국은 거듭 위기를 맞았지만, 김승규의 선방과 수비진의 몸을 던지는 수비로 추가 실점은 막을 수 있었다. 0대1로 경기가 끝났지만 한국은 3개의 슈팅만 기록했고 유효슈팅은 단 1개도 없었다. 이란을 위협한 장면이 아예 나오지 않았다는 얘기였다. 경기 종료 10분 전부터 승리를 확신하고 떠나는 이란 관중들은 한국 취재진을 향해 손가락 4개와 동그라미를 그려 보였다. 자신들이 한국을 상대로 4연승을 했고, 테헤란에서 한 번도 지지 않았다는 의미였다. 한국이 아시아 팀을 상대로 4연패를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일 정도로 굴욕적인 결과였다.

 

더 실망스러운 일은 경기 후 기자회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슈틸리케 감독은 “이곳에는 한국이 어떤 선수 구성이든, 어떤 감독이 와서도 이기지 못했다는 것은 근본적인 원인이 있지 않나 싶다”라는 모호한 표현으로 완패의 책임을 피해 가려 했다. 이란의 강한 신체조건에 밀렸다는 거시적인 문제를 언급할 뿐 패배의 원인을 상세히 설명해 달라는 한국 취재진의 질문에는 애매한 답만 반복했다. 그리고는 “우리에게는 카타르의 소리아 같은 공격수가 없었다”라며 공격수들의 부진에 책임을 전가했다. 현재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최고의 공격수로 평가받는 손흥민과 다수의 유럽파 공격수, 아시아 최고의 공격수 중 한 명인 김신욱을 보유하고 있는데도 나온 위험한 발언이었다. 이 얘기를 들은 손흥민은 “선수들의 사기를 꺾을 수도 있다”며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대표팀 전체의 신뢰를 흔들 수 있는 논란이 큰 얘기였다.

 

경기 내내 전술적 대응 한 번 못한 감독이 경기 후 내세운 것은 논리적인 분석과 책임감이 아닌 변명과 핑계였다. 지난 스페인전부터 중요한 경기에서 패할 때마다 나오는 레퍼토리인 “한국 축구는 유스 시스템부터 문제가 있다”는 발언도 어김없이 나왔다.

 

결과로서 납득시켜야 하는 대표팀 감독이 자신의 실수를 매번 한국 축구에 전가한 것이다. 유럽 팀을 상대로 한다면 납득할 얘기였지만 상대는 아시아권 팀이었다. 한국이 월드컵 최종예선에서 초반부터 진땀승을 이어가며 어려움을 겪는 것도 실로 오랜만이지만, 슈틸리케 감독은 자신의 책임은 언급하지 않았다. 하루가 지난 다음 자신의 발언이 한국에서 큰 논란이 일자 그는 해명을 위한 기자간담회를 열었다. 그러나 내용은 구차했다. 이미 한국에서는 슈틸리케 감독의 책임론이 거론되기 시작했다.

 

“이런 식이라면 이란에 가지 않겠다”던 그의 발언은 이제 부메랑이 돼 돌아왔다. 11월에 열리는 우즈베키스탄과의 경기가 그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다. 아니 그 전에 들끓는 여론에 확실히 답하지 못한다면 또 한 번의 대표팀 감독 경질 잔혹사가 기다릴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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