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조금만 더 신경을 써주시면 네 산수 성적이 잘 나올 수도 있을 텐데…. 너희 엄마는 왜 학교에 잘 안 오시니?”
공부를 곧잘 하면서도 유독 셈에 서툴렀던 열 살 무렵의 필자가 담임선생님에게 들었던 말이다. 당시에는 그게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중에야 그게 촌지를 달라는 말의 에두른 표현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가 금은방집 딸인 동급생에게는 시계를, 떡집 아들에게는 행사에 필요한 엄청난 양의 떡을 요구했다는 사실은 곧 누구나가 아는 비밀이 되었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당시에는 가난하거나 엄마가 학교에 드나들지 않는 아이들이 반장이 되는 경우도 흔치 않았다. 학교는 감사를 표현하는 부모와 그 자식에 대한 선생님들의 총애로 넘쳐나는 아름다운 정(情)의 난장이었다. 당시의 교사들을 폄훼할 생각은 없다. 분명 촌지를 거절하고 아이들을 공평하게 대하는 훌륭한 선생님들도 많았다. 문제는 ‘주는 것이 기본’이 된 당시 분위기였다. ‘내 아이를 잘 봐 달라’는 일부의 욕심은, ‘안 주면 내 아이만 소외된다’는 두려움으로 보통 사람들에게까지 번져갔다. 필자가 대학 원서를 쓸 무렵에는 반장이 나서서 학급 회의를 열어 진학상담 때 줄 촌지 액수를 반 전체가 통일하자고 했을 정도였다.
다행히 필자가 부모가 되면서부터는 그런 부담을 가져본 적이 없다. 허물없는 학부형들 사이에서도 촌지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물론 누군가는 필자가 순진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아무리 교육청 단속이 심해졌다고 해도 줄 사람은 주고, 받을 사람은 받고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의 존재 여부가 핵심이 아니다. 옳은 일이 ‘기본’이 되는 분위기가 되었다는 것, 그게 중요한 것이다.
‘김영란법’이라고 불리게 된 부정청탁방지법이 시행되면서 여러 부정적인 의견이 들려온다. 성가신 일만 많아졌을 뿐, 힘 있고 부정한 사람들은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서 하던 대로 할 거라고 말이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학교에서 ‘누구나 아는 비밀’인 촌지가 사라졌듯, 사회 전반에 걸쳐 관례로 자리 잡았던 접대나 청탁이 더 이상 기본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물론 이게 생각만큼 간단한 일이 아니라는 건 필자도 알고 있다. 주변에 부정청탁과는 전혀 상관없는 상황인데도 곤란을 겪는 지인들이 한둘이 아니다.
심지어 공직·언론·교육과는 천리만큼 떨어져 있는 것만 같은 필자조차 주의해야 할 일이 있을 거라는 경고를 심심치 않게 듣고 있을 정도다. 그러나 힘 있는 자들이 어떻게든 허점을 뚫어 돌파할 것으로 예상되듯 선의의 보통 사람들도 방법을 찾아낼 것이다. 옳은 것이 기본으로 굳어진 세상은 그렇게 적응한 보통의 사람들이 더 살기 수월한 세상이 될 것이다.
이제 우리의 다음 세대는 옳은 선택을 위해 굳이 이단아가 되지 않아도 되는 삶을 살게 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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