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배우, 없는 게 아니라 필요로 않는 것뿐
  • 이은선 영화 저널리스트 (sisa@sisapress.com)
  • 승인 2016.12.09 16:04
  • 호수 1416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민희의 청룡상 여우주연상 수상으로 재점화된 ‘여배우 기근 현상’ 논란

11월25일 열린 제37회 청룡영화상의 여우주연상 수상자는 《아가씨》의 김민희였다. 이를 두고 각종 기사와 인터넷에서는 배우의 사생활에 얽힌 스캔들과 관련해 이 상이 타당한지를 묻는 갑론을박이 쏟아졌다. 그리고 이런 식의 질문 혹은 비아냥도 나왔다. ‘한국영화계에 여배우가 그렇게 없나?’

 

하지만, 보다 진취적인 캐릭터들을 고심해 후보로 선별한 점, 그리고 그중에서 출중한 연기력으로 한국영화 여성 캐릭터의 스펙트럼을 한층 넓힌 배우의 손을 들어줬다는 평가가 논란을 덮었다. 《아가씨》는 추잡한 욕망으로 뒤덮인 남근 중심 세계를 비웃으며 함께 그 벽을 뛰어넘는 두 여성의 이야기였다. 여기에서 김민희는 아름다운 전시의 대상에서 거침없는 욕망의 주체로 변화하는 과정을 모자람 없이 보여주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실제로 청룡영화상은 최근 몇 년간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2015년)의 이정현, 《한공주》(2014년)의 천우희 등에게 여우주연상을 안기며 영화의 흥행보다 밀도 있는 여성 캐릭터와 배우의 연기력을 더 우선 고려한 결과를 보여줬다.

 

영화 《아가씨》의 하정우(왼쪽)와 김민희 © CJ 엔터테인먼트

블록버스터와 액션·스릴러 영화가 대세

 

그렇다면 ‘한국영화계에 여배우가 그렇게 없나’라는 궁금증의 답을 찾을 차례다. 물론 물리적인 수치는 적지 않다. 다만 한국영화 개봉작 가운데 여배우가 얼마나 유의미하고 주체적인 캐릭터로 등장하는지는 생각해 볼 문제다. 올해 한국영화 흥행순위 10위권에 오른 작품 《부산행》 《검사외전》 《밀정》 《터널》 《인천상륙작전》 《럭키》 등 흥행작은 남자 배우가 주인공이거나 두 명 이상의 남성이 콤비 혹은 대결 구도를 이루는 영화들이다. 여기에서 여성 캐릭터의 역할은 도드라지지 않거나 남성 주인공을 보조하는 데 그치는 게 사실이다.

 

20위권까지 눈을 돌려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물론 적게나마 《곡성》의 무명(천우희), 《덕혜옹주》의 덕혜(손예진), 《아가씨》의 히데코(김민희)와 숙희(김태리), 《굿바이 싱글》의 주연(김혜수)처럼 확실하게 존재감을 발휘한 영화와 캐릭터를 만날 수 있었던 것은 기쁜 수확이다. 하지만 한국영화계의 환경은 여전히 여배우에게 좁고 제한적이다. 설상가상 연말 개봉을 앞둔 화제작들도 역시 《더 킹》 《마스터》 등 모조리 남성 중심 영화다. 이쯤 되면 여자 주인공이 주체적으로 나서 활약하는 영화 자체의 수가 물리적으로 적다는 인식을 넘어, 정말 다양한 배우 풀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 왜일까.

 

그중 하나로 유행 장르의 변화 문제를 지적할 수 있다. 투자 배급사 중심의 제작 관행이 고착화되면서 충무로에는 제작비 대비 흥행을 보장할 수 있는 장르영화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블록버스터와 액션·스릴러가 대세가 된 이유다. ‘극장에서 볼 만한 작품’으로 인식되는 이 영화들은 장르적 관습에 따라 남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여배우의 입지 및 발굴의 기회는 좁아질 수밖에 없다. 어쩌다 여성 캐릭터가 메인 롤을 맡는 이야기가 만들어지더라도 ‘주연급 여배우가 없다’는 제작자와 감독의 푸념이 돌아온다. 일부 제작자들은 투자 배급사에서 대놓고 ‘주인공을 남자로 바꾸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받은 적도 있다는 고충을 털어놓는다.

 

이와 맞물려 있는 굵직한 원인 중 하나가 바로 멜로영화의 쇠퇴다. 19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반은 충무로에 멜로 및 로맨틱 코미디의 유행이 불어닥친 때다. 《접속》(1997), 《8월의 크리스마스》(1998), 《엽기적인 그녀》(2001), 《클래식》(2003) 등 한국 멜로영화의 전설 같은 작품들이 이때 쏟아져 나왔다. 비록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정지우 감독의 《사랑니》(2005)처럼 여성 주인공의 감정선을 섬세하게 따라가는 등 다양한 시도를 선보인 영화도 여럿이었다. 좋은 멜로영화는 좋은 여배우의 등장과 성장을 가능케 했다. 전도연·전지현·손예진 등 여전히 한국영화의 최전선에서 활약하고 있는 이들도 이때 등장한 배우들이다.

 

영화 《미씽: 사라진 여자》의 주인공 지선(엄지원·위 사진)과 한매(공효진) © 메가박스㈜플러스엠

《비밀은 없다》 《미씽》의 여성 캐릭터 주목

 

그렇다면 지금은 여배우와 여성 캐릭터에게 마냥 혹독한 시기일까.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의견도 많다. 실제로 2010년대 들어 기억할 만한, 여성이 주인공인 영화나 여성에 대해 사려 깊은 태도를 보여준 영화들이 여럿 등장했다. 《시》(2010)는 도덕과 예술이 사라져가는 시대, 타자에 대한 윤리로 고뇌하는 노년 여성 미자(윤정희)를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보다 상업적인 감각으로 관객과 소통한 《수상한 그녀》(2014)도 눈에 띈다. 눈물샘을 자극하는 요소가 우선인 점은 아쉽지만, 《하모니》(2010)와 같이 ‘여성 범죄자’라는 사각지대를 주목한 시도도 있었다. 《카트》(2014)는 여성 노동자의 목소리를 통해 연대의 가치를 말한다.

 

모성 신화를 부수고 해체하는 작업 역시 꾸준히 시도되고 있다. 올해는 《비밀은 없다》, 그리고 얼마 전 개봉한 《미씽: 사라진 여자》가 눈에 띈다. 《비밀은 없다》 연홍(손예진)의 복수는 개인적 차원의 응징을 넘어, 남편과 국회의원 선거가 뜻하는 남성 중심 사회에 균열을 일으키는 정면 돌파다. 이는 법과 제도가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를 여성이 ‘엄마’라는 이름으로 단죄하거나 해결을 시도했던 다른 영화들과 뚜렷하게 구분된다. 《미씽: 사라진 여자》 역시 언뜻 유괴된 아이를 찾아나서는 여자의 모성 고군분투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다르다. 주인공 지선(엄지원)과 한매(공효진)의 사회적 계층과 그들이 처한 환경은 다르지만, 둘 다 사회의 냉대와 편견의 사각지대에 놓인 약자들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유일하게 아이에게만 의지할 수 있는 처지 앞에서,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둘의 구분은 흐릿해진다. 결국 두 사람에겐 한국 사회에서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이해와 연민이 더 깊숙이 존재하게 된다.

 

장르와 소재의 다양성이 보장되지 않는 상황은 생각보다 훨씬 더 폭넓은 문제를 야기한다. 다양한 소재로 배우를 발굴하고 성장케 하지 않으면, 새로운 장르적 시도 역시도 줄어들게 될 것이다. 한국영화계에는 더욱 다양한 이야기와 사회적 감수성을 표현해 낼 더 많은 얼굴들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관련기사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