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순실·차은택의 문화 농단으로 얼어붙은 한류
  • 정덕현 문화 평론가 (sisa@sisapress.com)
  • 승인 2016.12.15 15:33
  • 호수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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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이 차린 한류 밥상, 정부가 차버리다

지난 11월말, 문화체육관광부 원용기 종무실장과 윤태용 문화콘텐츠산업실장이 사표를 제출하고 명예퇴직을 신청했다. 문체부 측은 “이들이 어려운 시기에 조직의 분위기를 쇄신하고 후배들에게 길을 터주기 위해 이 같은 결정을 내렸다”고 이유를 밝혔다. 하지만 실제 이유는 다르다. 이들이 주도한 사업들에서 최순실·차은택씨와 관련된 각종 의혹들이 불거져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윤 전 실장은 차은택 전 창조경제추진단장이 주도한 문화창조융합벨트·한국콘텐츠진흥원 사업 등을 관장해 왔고, 원 전 실장은 지난 4월까지 문화예술정책실장을 맡아 최순실 개입 의혹을 받았던 국가 브랜드와 정부 상징 사업을 맡은 바 있다. 결국 이 사업들의 책임자이기 때문에 도의적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는 것이다. 이 사안은 현재 최순실 국정 농단 사태가 만들어내고 있는 문화계 전반의 후폭풍을 잘 보여준다.

 


문화창조융합벨트 관련 예산 반 토막

 

사정은 한국콘텐츠진흥원도 다르지 않다. 송성각 한국콘텐츠진흥원장은 11월27일 검찰에 구속 기소됐다. 10월31일 문화체육관광부는 그의 사표를 수리했다. 이로써 한국콘텐츠진흥원의 업무도 제대로 굴러가지 않는 상황이다. 이를테면 K팝 가수들의 해외 쇼케이스 지원 및 신인 발굴 지원 프로젝트는 사실상 중단된 상태다. 한국콘텐츠진흥원에서는 이른바 ‘차은택 리스크’라는 말이 공공연히 떠돌고 있다. 김종덕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과 송성각 전 원장 모두 차은택씨의 입김이 작용해 인선된 인물들이라는 점은, 우리네 문화 행정에서 중추적 컨트롤타워 역할을 하는 두 정부부처가 사실상 제대로 기능할 수 없는 상태라는 걸 말해 준다. 최순실 사태로 인해 갖가지 의혹들이 불거진 문화체육관광부는 사실상 개점폐업 상태가 되었다. 검찰의 압수수색까지 받게 되면서 일상적인 행정업무조차 마비됐고, 각종 행사들은 취소되거나 연기되고 있다.

 

최순실씨의 최측근으로 알려진 차은택씨가 개입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문화창조융합벨트’ 사업은 그 규모가 절반 정도로 축소됐다. 문화창조융합벨트는 박근혜 정부의 ‘문화융성’ 국정기조에 따라 문화콘텐츠산업의 생태계 조성을 위해 문체부가 추진하던 핵심 역점 사업이다. 문화콘텐츠 스타트업 지원을 위한 문화창조벤처단지는 물론이고, 문화콘텐츠 관련 전문인력 양성을 위한 문화창조아카데미, 문화콘텐츠 기획을 위한 문화창조융합센터, 그리고 실제로 이렇게 생산된 콘텐츠를 소비하기 위한 거점으로서 K팝공연장·K컬처밸리·K익스피리언스 등이 포함돼 있다.

 

이번 사태로 인해 이 중 이미 구축이 완료된 문화창조벤처단지와 문화창조아카데미, 그리고 K팝공연장 사업은 계속 유지하고, 나머지는 각 사업장을 구축한 기업의 자율에 맡기기로 했다. 예를 들어 CJ그룹에서 상암동에 구축한 문화창조융합센터는 CJ 자율에 맡긴다는 것이다. 결국 이 사업은 중단된 거나 마찬가지다. 또한 CJ가 고양시에 조성할 계획이던 K컬처밸리나 대한항공이 추진하던 K익스피리언스 사업은 이번 게이트로 인해 생겨난 의혹들로 사실상 진척이 어렵게 됐다. 이미 들어간 예산이 1350억원 가까이 되고, 내년에도 관련 예산이 모두 1278억원 책정돼 있었으며, 오는 2019년까지 무려 7000억원의 예산이 투입될 계획이었으나, 현재는 원점에서 재검토하는 수순을 밟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 사업들 속에는 실질적으로 문화진흥에 도움이 되는 것들도 포함돼 있다. 하지만 지금처럼 모든 사업들에 의혹의 시선이 드리워진 상황에서 옥석을 가려내기란 쉽지 않다. 게다가 워낙 최순실·차은택씨의 전횡이 전방위로 벌어져 사업 전체가 흔들리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 됐다. 심지어 벤처단지 등에 입주한 기업이나 창작자들의 경우도 입주 경위를 의심받고 있는 상황이다.

 

 

‘문화융성’의 기치 갉아먹은 파행적 인사

 

이번 사안이 특히 심각한 건, 그것이 일부 사업에서 불거진 문제가 아니라, 파행적 인사를 통해 권력의 대표를 세워두고 뒤에서 사실상 힘을 발휘해 갖가지 이권에 개입했다는 점에서다. 박근혜 정부 출범과 함께 초대 문체부 장관으로 유진룡 전 차관이 임명된 건 나쁘지 않은 선택으로 평가됐다. 행정 수완이 뛰어난 전문 관료로서 유 장관이 발탁되자 문화 산업계는 박근혜 정부가 애초에 내세웠던 4대 국정 기조의 하나인 ‘문화융성’이 실제로 실현되는 것 아니냐는 기대감을 갖기도 했다.

 

하지만 유 전 장관이 유례없이 대통령 면직으로 쫓겨나고, 대신 그 자리에 의외의 인물인 김종덕 장관이 임명되면서 문화계 전반에서 술렁이는 목소리들이 흘러나왔다. 보통 정치권 실세이거나 학계 출신이 많았던 문체부 장관 자리에, 학계에서도 잘 모르고, 그렇다고 정치권 인물도 아닌 이가 떡하니 앉게 된 것이다. 이런 사정은 한국콘텐츠진흥원도 다르지 않았다. 홍상표 전 원장을 밀어내고, 제일기획 상무 출신인 송성각씨가 원장 자리에 앉게 되면서 모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결국 그들이 모두 이른바 ‘차은택 라인’이라는 게 밝혀지면서 파행적 인사의 내막이 드러났다.

 

특히 한국콘텐츠진흥원은 사실상 차씨의 손아귀에 좌지우지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송씨가 원장으로 부임한 후 1년 만에 한국콘텐츠진흥원의 예산은 폭증했다. 결국 잘못된 인사가 갖가지 이권이 개입된 사업으로 이어졌고, 그래서 커져버린 예산만큼 멈춰버린 사업의 손실도 어마어마할 수밖에 없게 됐다. ‘문화융성’이라는 포부 섞인 기치는 그만큼의 부실로 되돌아오게 됐다.

 

11월4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예술행동위원회 주최로 열린 ‘박근혜 퇴진 블랙리스트 예술가 시국선언’에서 화가 임옥상씨 주도로 참가자들이 ‘박 대통령 퇴진’을 촉구하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 시사저널 최준필

엎친 데 덮친 격, 한류를 얼려버린 국제정세

 

차은택씨가 각종 문화창조 관련 사업들을 끄집어내고, 앞에 ‘K’를 붙여 K팝이니 K컬처니 K익스피리언스 같은 용어를 붙인 사업들을 진행할 수 있었던 가장 큰 근거는 다름 아닌 ‘한류’다. 박근혜 정부가 출범 초기부터 남다르게 4대 국정기조에 ‘문화융성’을 집어넣은 것도 바로 이 한류가 만들어낸 ‘문화 콘텐츠 산업’이 향후 우리의 먹거리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번 최순실 사태로 드러난 차은택씨의 ‘문화 농단’을 들여다보면, ‘한류’라는 기대감이 오히려 이들에게는 하나의 좋은 ‘포장’으로 기능했다는 걸 알 수 있다. 물론 한류 지원에 대한 필요성은 문화계 전반에서 요구되는 사안이다. 하지만 지원을 하더라도 사익이 끼어들 수 없는 ‘정교하고 안전한’ 지원 시스템이 수반되지 않는다면 오히려 ‘한류’라는 포장이 몇몇 권력자들에 의해 유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현재 문화업계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국제정세가 산업을 얼어붙게 만드는 상황이다. 사드 배치 결정 이후에 중국은 한류를 금하는 입장 표명을 공식적으로 하지 않고 있을 뿐, 사실상 중국에서 한류는 지워져가는 형국이다. 갖가지 행사들이 취소되고 있고, 무엇보다 드라마 산업은 허가를 제대로 받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 중국과의 공조는 점점 리스크가 돼 가고 있다. 막대한 자본투자가 들어가는 드라마 업계의 중국발(發) 투자가 뚝 끊겨버린 이런 위축은, 사실상 드라마가 한류를 초기부터 이끌어왔다는 점에서 우리네 한류의 심각한 현실을 실감케 하고 있다. 여기에 한·일 관계로부터 빚어진 반한(反韓) 정서가 점점 커져가는 일본 역시 언제까지 한류의 제1시장으로 남아 있을지도 의문이다. 자국보호주의를 주창하는 트럼프의 미국 대통령 당선이 향후 영화 산업에 어떤 변수를 만들어낼지 알 수 없다는 불투명한 전망들도 내놓고 있다.

 

국가가 해야 할 역할은 분명하지만, 국가 주도의 문화산업이 갖는 한계 역시 명확하다는 게 업계에서 나오는 이야기들이다. 사실상 한류를 지핀 건 국가가 아니라 민간이었다. 개인적으로 노력한 가수들과 그 가수들을 발굴한 기획사들, 그리고 드라마 제작자들 같은 민간기업들이 일궈놓은 한류 밥상에 국가가 숟가락을 얹어놓았다가 사실상 밥상까지 엎어버린 것이 지금의 형국이라는 것이다.

 

정부의 문화산업 육성은 장기적 차원에서 추진돼야 할 기간산업이나 예술인 지원 등 해야 할 몫이 따로 있다. 결국 업계가 자유롭게 콘텐츠를 제작하고 표현해 낼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하고 지지하는 것이 정부가 할 일이다. 이를테면 지금처럼 한·중 관계의 냉각으로 인해 한류 관련 업체들의 주가가 뚝뚝 떨어지고 있는 상황이라면, 외교라인이 움직여 적어도 문화 교류만큼은 숨통이 트이게 해 주는 역할이 진정 정부가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번 사태의 후유증을 더욱 크게 만들어낸 인사 문제는 보다 안전한 시스템적 보완이 필요한 사안으로 보인다는 지적이 이어진다. 인사가 만사이듯, 잘못된 인사는 만사를 그르친다는 게 이번 사태가 문화계에 남긴 가장 뼈아픈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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