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상만의 軍 인권 이야기] “軍에선 해마다 세월호 참사 두 번 씩 일어난다”
  • 고상만 인권운동가 (sisa@sisapress.com)
  • 승인 2017.01.17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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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생각지도 못한 연락을 받은 때는 2013년 2월 어느 날이었습니다. 당시 김광진 국회의원이 페이스북을 통해 연락을 해 온 것입니다. 이전까지 잘 알지 못했던 그 분의 제안은 신선했습니다.

 

“안녕하세요. 국회의원 김광진입니다. 아시는지 모르겠으나 저는 현재 국회 국방위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국방위원으로 있는 동안 군인 인권 문제와 관련하여 일정한 진전을 이뤄내고 싶은 욕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께 부탁이 있습니다. 제가 가진 국회의원의 권한을 가지고 군인의 인권 문제 해결을 위해 일해 주실 수 없을까요?”

그렇게 해서 시작된 2년1개월간의 의원실 활동은 참 값진 시간이었습니다. 특히 ‘의무복무 중 사망한 군인의 명예회복을 위한 입법 활동’은 징병제를 유지하고 있는 우리나라 군 현실에서 많은 변화와 개혁을 이끌어내는 계기가 됐다고 평가받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가장 먼저 시작한 일은 군 의문사 피해 유족을 ‘하나의 힘으로 모아내는 것’이었습니다. 한해 평균 150명의 군인이 목숨을 잃고 그중 2/3 정도가 자살로 처리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살로 처리된 유족들은 이후 억울하다며 국방부를 상대로 싸우는데 그 과정에서 여러 유족 단체로 흩어지게 된 것입니다. 싸워야 할 국방부는 거대한데 다 합쳐도 힘이 미약한 유족 단체가 그나마도 흩어져 있으니 제대로 된 싸움이 될 리 만무했습니다.

 

거대한 국방부에 맞서려면 무엇보다 이 피해 유족을 하나의 힘으로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한 분 한 분의 연락처를 얻어 나가기를 두어 달. 마침내 2013년 5월23일의 일이었습니다. 저는 약 150여 분의 유족에게 함께 모일 것을 제안했고 그렇게 해서 국회에서 행사를 가지게 됐습니다.

 

그날 저는 군에서 자식을 잃은 유족 분들에게 아들의 영정 사진을 가지고 오시라고 권했습니다. 군대 가서 자살한 것으로 몰아붙이면서 외면 받아온 그 아들의 영정 사진을 가져와 대한민국 국회에서 마음껏 그 억울함을 외칠 수 있게 해 드리고 싶었습니다.

 

© 고상만 제공

그렇게 해서 열린 그날의 행사 명칭.

 

‘저는 군대에 자식을 보낸 죄인입니다.’

이후 저는 이 분들과 함께 두 번의 여름과 겨울을 보내며 함께 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요구한 것은 “남의 집 귀한 아들을 징병할 권리가 국가에 있다면 그 후 군인의 생사는 온전히 국가 책임임을 인정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아들의 군 복무 중에는 부모라 할지라도 일체 관여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2014년 군 복무 중 구타로 사망한 윤 일병처럼 아들에게 무슨 일이 부대에서 벌어지고 있는지 그 부모가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아들이 어느 날 갑자기 군 복무 중 사망했는데 국방부는 그것을 자기 책임이 아니라 유족의 책임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만약 윤 일병이 폭행을 견디다 참지 못하고 스스로 목을 매어 사망했다면 국방부는 필시 윤 일병의 사인을 자살로 처리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1948년 대한민국 국군 창설 이래 약 3만9000여명의 군인이 국가로부터 아무런 예우도 받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이를 66년으로 나눠 계산해 보면 대략 1년에 600여명 꼴로 군인이 죽어간 것입니다. 그렇기에 군 의문사 피해 유족들은 이렇게 푸념합니다.

 

“군에서는 세월호 참사가 매년 두 번씩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그래서 시작한 것이 국회 앞 유족 1인 시위였습니다. 유족들은 정기국회 기간이었던 11월부터 12월 말까지 새벽 6시부터 국회 앞에서 피켓 시위를 했습니다. 아직 어둠에 갇힌 그 시각에 그 엄마들은 억울하게 죽은 내 자식의 명예회복을 요구하며 울었습니다. 군 인권 회복을 위한 우리들의 첫걸음은 그렇게 내딛었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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