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는 예쁘니, 환경 탓 말고 무조건 낳으라?
  • 조문희 인턴기자 (sisa@sisapress.com)
  • 승인 2017.02.06 13:42
  • 호수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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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산 장려하는 정부 간행물 《고향 가는 길》 만화 논란…시민들 “어이가 없다”

여기 아기를 갓 출산한 한 쌍의 부부가 있다. 여느 가정처럼 육아에 지치고 힘들어 한다. 심지어 정부가 아기를 낳으면 ‘축하금 1억원’ ‘가사도우미 평생 무료’ ‘10년간 육아휴직’ ‘아파트 무상 제공’ 등의 혜택을 준다 해도 “요즘 누가 아기를 낳는다고 그래요?”라며 콧방귀를 뀌는 꿈까지 꿀 정도다. 그러나 이 부부는 갑자기 “이참에 보물(아기) 하나 더?”라며 마음을 바꾸게 된다. 그 이유가 다소 황당하다. 아기가 3일 만에 변을 보고, 거기에 부부가 행복해한다는 것이다. ‘억만금과도 바꿀 수 없는 보물’이라며….

 

문화체육관광부(문체부)가 설 귀성길을 앞두고 전국에 배포한 책자 《고향 가는 길》에 나오는 대목이다. 《고향 가는 길》은 매년 설과 추석 등 명절마다 문체부가 발행해 고속철도와 고속도로 요금소 및 관공서 등지에 배포하는 홍보 책자다. 명절마다 30만 부를 발행하는데, 1회 발행에 소요되는 예산은 약 1억4000만원이다.

 

논란이 인 부분은 책자 32~33페이지에 실린 ‘보물’이라는 제목의 만화다. 만화는 하단에 삽입된 ‘아기를 낳아 기르는 건 곧 우리의 미래를 돌보는 일입니다’라는 구절이 보여주듯 출산을 장려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런데 정부의 출산 환경 조성 노력보다는 단순히 ‘아이가 이렇게 예쁜데 어떻게 낳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는 주장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를 본 시민들은 과연 이 내용에 공감해 아이를 낳아 기르고 싶은 마음이 생겼을까.

 

1월23일 발간된 문화체육관광부 《고향 가는 길》 속 만화 ‘보물’(32~33페이지) © 문화체육관광부

“저출산 문제를 개인에게 환원시키는 논리”

 

올해 출산을 준비 중인 김아무개씨(32)는 “어이가 없다”고 말했다. 고향에 내려가는 KTX 열차 안에서 만화를 본 김씨는  “정부 탓, 환경 탓 하지 말고 아기 낳아보면 예쁘니 무조건 낳으라는 느낌이 들어 황당했다”고 했다. 결혼을 계획하고 있는 서아무개씨(24) 역시 “만화가 뭘 얘기하려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냥 아기 낳으면 행복해지니까 무조건 낳으라는 것으로 들리는데, 감성적인 부분에 기대서 출산을 장려하는 건 현실에서 동떨어진다고 본다. 독자 수준을 너무 낮게 본 게 아닌가”라고 말했다.

 

전문가의 시각도 마찬가지다. 민가영 서울여대 아동학과 교수는 “만화가 묘하다”며 “꿈 이야기에선 저출산의 사회구조적 원인을 다 짚고 있으면서, 막상 결론은 그래도 아이가 예쁘니 낳아서 키우자는 식이다. 이런 식의 논리는 환경이 어려워 출산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비난의 대상으로 만들게 된다. 구조적 문제를 건드리지 않고 원인과 결과를 개인에게 환원시키는 논리”라고 지적했다. 민 교수는 “한 아이를 키울 수 있는 힘은 아이에 대한 예쁨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사회 전체의 철학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조언했다.

 

저출산과 관련한 정부의 공식 발간물에 문제가 제기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해 12월 행정자치부가 공개한 ‘대한민국 출산지도’ 사이트는 가임 여성 인구수를 지도에 한 명 단위까지 표시한 이른바 ‘가임기 여성지도’를 포함한 탓에 “정부가 여성을 애 낳는 기계 취급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결국 행정자치부는 대한민국 출산지도 홈페이지를 닫았고, 현재 수정 작업 중이다.

 

출산과 관련한 공식 발간물들이 지속적으로 도마에 오른 점은 저출산을 ‘여성 탓’으로 치부하는 정부의 왜곡된 관점을 여실히 드러낸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나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정부가 저출산을 바라보는 시각 자체가 잘못됐다”면서 “지난해 가임기 여성지도나 이번 만화나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이 이기적인 여성의 탓이라는 기존 편견을 재생산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짚었다.

 

아울러 정부의 출산 장려 정책도 이런 왜곡된 관점으로 수립돼 큰 효과를 보지 못하는 게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실제로 정부는 2006년부터 80조원 이상을 투입해 저출산 해결방안을 모색했다. 하지만 지난해 11월 기준 출생아 수는 사상 최저치를 기록했다. 이나영 교수는 “고용 불안정, 극심한 성차별 문제 등 여성들이 결혼과 출산을 꺼릴 수밖에 없는 요인이 사회 전반에 걸쳐 심각한 상황이다. 다층적인 문제를 이해하지 못하는 한 저출산 대책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돌봄의 책임을 여성 개인에게 돌려선 안된다”고 조언했다.

 

여론조사에서도 저출산을 개인의 책임으로 치부하는 시각은 적절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서울시여성가족재단이 지난해 발표한 ‘서울시 기혼여성의 추가출산 영향요인 분석을 통한 정책방안 연구’에 따르면, 상당수 기혼 여성들이 아이를 낳고 싶어도 ‘못’ 낳고 있었다. 서울에 거주하며 출산 경험이 있는 기혼여성 500명을 설문한 결과, 이들 중 86%가 둘째를 희망했으나, 51%가 “미루고 있다” 혹은 “계획이 없다”고 응답했다. 그 원인으로 ‘출산비용 및 교육비 부담’ ‘일과 육아 병행의 어려움’ 등 현실적인 이유를 꼽았다. 다시 말해 저출산은 개인의 의지가 아닌 사회적·경제적 환경 요인 탓이라는 뜻이다.

 

 

문체부 “회의 통해 만화 내용 문제없다 판단”

 

한편 《고향 가는 길》은 과거에도 부적절한 내용을 담아 도마에 오른 적이 있다. 지난해 추석에 발간된 단행본은 당시 논란이 일던 위안부 합의와 사드 배치 등을 박근혜 정부의 주요 정책 성과로 홍보해 빈축을 샀다. 당시에도 “왜곡된 정책 홍보에 세금을 쓴다”는 비판이 나왔다.

 

이에 대해 《고향 가는 길》 제작을 담당하는 문체부 국민소통실 관계자는 “지난 추석에 많은 비판을 받아 이번에는 신경을 많이 썼다. 만화는 저출산을 극복하기 위해 만화적 재미를 가미해서 아이 낳는 행복을 이야기한 것이다. 저출산 문제를 개인의 탓으로 돌리려는 의도는 없었다”면서 “회의를 통해서도 만화 내용이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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