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 규명 뒤로한 채 폭로전만 난무
  • 최정민 프랑스 통신원 (sisa@sisapress.com)
  • 승인 2017.02.09 16:23
  • 호수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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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공화당 대선후보 피용의 가족 허위 채용 의혹 두고 진실공방

‘탈-진실(post-truth)’. 세계적 권위를 자랑하는 옥스퍼드 사전 위원회가 선정한 2016년을 대표하는 단어다. 우리나라에서 대학 교수들이 올해의 사자성어를 뽑듯이, 프랑스에서는 방대한 자료와 전문가들의 분석을 바탕으로 올해의 단어를 선정해 왔다. 2016년 상징어로 꼽힌 ‘탈-진실’에 대해 위원회 측은 ‘객관적 사실보다 감정 호소가 더욱 효과적 환경’이라고 정의했다. 단어 선정의 배경으로는 2016년 6월 ‘브렉시트(Brexit·영국의 유럽연합 탈퇴)’와 11월 도널드 트럼프의 미국 대통령 당선을 꼽았다. 옥스퍼드 사전 위원회의 이 같은 배경설명은 지나간 과거보다는 앞으로 조만간 닥칠 문제가 더 심각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대선후보 검증도 진실공방보다 감정싸움

 

프랑스 대표적 정론지 르몽드 역시 2017년 새해 첫 사설에서 ‘탈-진실 사회의 위험성’에 대한 암울한 우려를 내놓았다. 르몽드는 “2016년 한 해 동안 유럽 내 유력인사들이 보란 듯이 ‘잘못된 정보’를 주장해 왔다”면서 “2017년은 네덜란드·프랑스·독일 등 유럽 다수 국가들이 선거 국면에 돌입하는 만큼 이를 더욱 경계할 필요가 있다”고 경고했다. 르몽드는 또 “이것은 비단 유럽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며, 새로운 미디어 환경에서 정보를 받아들이는 우리 모두에게 당면한 문제”라고 덧붙였다. 한마디로 르몽드가 우려한 점은 정치인을 비롯한 공인들이 ‘진실’과는 상관없이, 알면서도 ‘이해관계’에 따라 그 입장을 달리한다는 사실이었다.

 

2016년 11월27일(현지 시각) 프랑수아 피용 전 프랑스 총리(오른쪽)가 공화당 대선후보 경선 2차 결선투표에서 승리했다. 부인 페넬로페 피용이 박수치며 축하해 주고 있다. © AP 연합

이러한 르몽드의 예견을 증명이라도 하듯 1월25일 프랑스는 전형적 ‘탈-진실’ 상황을 맞이하게 됐다. 공화당 대선후보인 프랑수아 피용과 관련한 의혹이 제기된 것이다. 주간지 《르 캬나르 엉세네》는 피용 후보가 하원의원 시절 부인인 페넬로페 피용을 보좌관으로 채용해 50만 유로(약 6억2000만원)의 세비를 받았다고 보도했다. 프랑스에서는 의원의 가족을 보좌관으로 채용하는 것이 관행처럼 이뤄져 왔기에 채용 자체는 큰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언론은 페넬로페 피용이 보좌관으로서 전혀 일한 흔적이 없다는 점을 문제 삼았다.

 

장기간 허위 신고로 부당이득을 취했다는 보도에 대해 피용 후보는 즉각 “대단히 전문적으로 기획된 중상모략”이라며 결백을 주장했다. 그러나 정작 보도의 진위 여부를 묻는 질문엔 묵묵부답이었다. 처음 의혹을 보도한 《르 캬나르 엉세네》 루이 마리 오 편집장은 1월31일 현지 방송에 직접 출연해 “취재과정에서 수차례 피용 측에 답변을 요구했지만 아무런 답도 받지 못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당사자 부인에도 여론 못 막아

 

이번 사태 직후부터 나타난 피용 후보 측의 대응은 아마추어적이었다. ‘부인이 실제로 일을 했느냐’는 언론의 질문에 대한 캠프 관계자들의 답변은 모두 제각각이었다. 게다가 사건을 조기 진화하겠다며 TV에 출연한 피용 후보는 “내 아이들도 변호사로서 나의 사무실에서 일을 했다”며 맞불작전을 펼쳤지만, 자녀들이 일한 시점이 변호사 자격증을 따기 이전인 학생 신분이었던 것으로 밝혀져 오히려 더 큰 논란을 부추겼다. 중도파의 유력 정치인인 프랑수아 바이루는 2월1일 한 인터뷰에서 우파 내부에서 “‘플랜 B’, 즉 ‘후보 교체론’이 존재하는 것으로 안다”며 피용 후보의 퇴진 가능성을 거론하기도 했다.

 

이번 논란에서 드러난 진짜 문제는 피용 후보의 진퇴 여부가 아니었다. 진위는 뒤로한 채 감정적 비난과 호소가 난무하는 소모적 논쟁에서, 바로 르몽드가 우려했던 ‘탈-진실 사회’의 단면이 고스란히 드러났다는 점이다.

 

사건 당사자의 부인에도 여론은 논란에 즉각적으로 반응했다. 보도전문 채널인 BFM이 발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우파 지지자들 중 50%만이 피용을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공화당 후보로 선출될 당시 지지율인 67%와 비교하면 감소세가 두드러진다. 우파 지지자 외 다른 유권자들의 불신은 더욱 컸다. 조사 결과, 전체 국민 중 63%는 피용의 주장을 믿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2월1일 BFM TV가 트위터 사용자를 상대로 여론조사를 한 결과, 73%가 ‘피용 후보는 대선 행보를 중단해야 한다’고 응답하기도 했다. 후보 경선 과정에서 경쟁자였던 니콜라 사르코지 전 프랑스 대통령의 권력남용 문제를 집중공격하며 누구보다 도덕적 우위를 강조했던 것이 피용 후보였기에, 그를 둘러싼 이번 의혹은 더욱 치명타가 됐다. 프랑스 우파 주간지 《르 푸앙》은 ‘피용 사태가 프랑스에 불행인 이유’라는 특집 기사를 실으며 ‘피용 일병 구하기’에 나섰으나 불길은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았다.

 

결국 2월1일 우파 공화당 소속 하원의원들의 집단 회동 직후 피용 후보는 대변인을 통해 “이것은 (권력)기관에 의한 쿠데타”라며 대통령 관저인 엘리제궁을 정조준했다. 이번 파문의 설계자로 대통령을 지목하며 전면전에 나선 것이다. 반면 스테판 폴 엘리제궁 대변인은 “진실을 투명하게 밝히면 그만”이라며 우파 공화당의 공세를 일축했다.

 

대선을 3개월 앞두고 언론의 보도가 폭로로 돌변하고, 추가되는 사실에 대해 정권 수뇌부가 연출한 조작이라고 맞서고 있는 프랑스 정가(政街)는 점차 막장으로 치닫고 있다. 피용의 낙마 여부를 떠나 일련의 사태를 바라보며 프랑스 국민들이 느끼는 정치 혐오가 자칫 극우 반등의 기회로 작용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오는 상황이다. 르몽드가 예고한 ‘탈-진실’ 시대의 위험성은 대선의 해를 맞아 당분간 더욱 맹위를 떨칠 것으로 전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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