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자리 동료의 월급을 알려 달라”
  • 강성운 독일 통신원 (sisa@sisapress.com)
  • 승인 2017.02.16 09:38
  • 호수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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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정부, 남녀 임금 격차 해소 위한 ‘임금정의법’ 추진

2016년 독일 우체국은행(Postbank)이 흥미로운 설문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독일 국민 64%가 금기시하는 대화 주제로 ‘돈’을 꼽았다는 것이다. 독일 사회에서는 “돈 얘기는 하는 게 아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월급은 물론, 옷값이나 집값 얘기를 꺼내는 것을 부적절한 행동으로 취급한다. “돈은 있다고 떠드는 게 아니라 조용히 갖고 있는 것”이라는 속담 역시 이런 사회적 분위기를 보여준다.

 

그런데 마누엘라 슈베지히 독일 연방가족부 장관이 연초부터 돈 얘기를 꺼냈다. ‘임금정의법’을 제정해 직장 내 동일 직급자의 월급을 알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슈베지히 장관이 사회적 반감을 무릅쓰고 터부를 깨려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돈에 대해 쉬쉬하는 문화가 성별 간 임금 격차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독일 남녀 직장인 간의 임금 격차는 평균 21.6%다. 유럽연합(EU) 회원국 중 최하위권에 속한다. 거칠게 환산하면 여성은 남성과 같은 양의 일을 해도 1년에 약 77일분의 일당을 덜 받는 셈이다. 독일 연방가족부는 여성이 가족으로 인해 장기 휴직하고, 이후에는 파트타임이나 아르바이트 형태로 복직하기 때문에 이 같은 격차가 발생한다고 설명했다.

 

2016년 10월19일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여성 리더십 컨퍼런스’에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오른쪽)와 마누엘라 슈베지히 연방가족부 장관이 나란히 참석해 있다. 슈베지히 장관은 ‘임금정의법’ 도입을 주도해 왔다. © EPA연합

독일 남녀 직장인 임금 격차 평균 21.6%

 

독일 고용청 자료에 따르면, 2015년 6월 현재 아르바이트를 전업으로 하는 사람은 400만 명이었다. 이 중 여성의 수는 320만 명으로 남성보다 압도적으로 많았다. 전통적인 남초(男超) 직종인 ‘운수 및 물류’ 분야에선 노동시장의 성별 격차가 더욱 극명하다. 이 분야의 남녀 성비는 75%대 25%다. 하지만 아르바이트생만 살펴보면 59%대 41%로 그 차이가 크게 좁혀진다. 남초 산업 분야에서도 여성은 값싼 노동력으로 투입된다는 얘기다.

 

‘임금정의법’이 타깃으로 삼은 것은 전체 노동시장이 아닌 동일 직종 내 성별 간 임금 격차 해소다. ‘스펙’이 같고 직급이 같은 직장 동료 간에도 성별에 따라 7%의 임금 격차가 있기 때문이다. 연방가족부는 이 차이가 “여성이 노동시장에서 암묵적으로 차별받고 있음을 보여주는 뚜렷한 증거”라고 지적했다.

 

7%는 결코 적은 돈이 아니다. 서독일방송(WDR)은 월급이 세전 3500유로일 경우, 여성은 은퇴 시까지 13만2300유로(1억6500만원)를 적게 번다고 계산했다. 이는 곧 노인 빈곤의 여성화로 이어진다. 월급 액수는 은퇴 후 연금액에도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이러한 차별을 해소하기 위해 마련된 것이 바로 ‘여성과 남성 간 임금정의 실현을 위한 법안(임금정의법)’이다. 법안의 핵심은 정보의 투명성이다. 그 내용을 보면 피고용인이 200명 이상인 사업장은 여성 직원이 요청할 경우 직급이 같거나 대등한 남성 직원 다섯 명의 임금을 익명으로 알려줘야 한다. 만약 이 다섯 명이 여성 직원과 같은 일을 하거나 대등한 실적을 냈는데도 임금이 더 높을 경우, 여성 직원은 이 다섯 명의 평균 월급에 준하는 인상을 요구할 수 있다.

 

자신이 여성에 비해 차별을 받는다고 느끼는 남성 직원 또한 정보 공개를 요구할 수 있다. 그러나 진보 성향의 일간지 ‘쥐트도이체차이퉁’은 “동등한 실적을 내도 월급을 더 많이 받는 여직원을 적어도 다섯 명 찾아야 하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어려울 것”이라고 내다봤다. 임금 차별의 피해자는 여성이 훨씬 많기 때문이다.

 

피고용인이 500명 이상인 기업은 어떻게 정기적으로 여성을 지원하며 임금평등을 실현하고 있는지 보고서를 발표해야 한다. 당초에 사회민주당(SPD)은 이 보고서 작성을 의무화하려 했지만 재계의 반대에 부딪혀 권고사항으로 하향 조정했다.

 

임금정의법에는 한계도 분명 존재한다. 정보공개는 의무지만 실제 임금 협상은 개인 몫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슈베지히 연방가족부 장관은 임금정의법의 실효성에 강한 확신을 보였다. 평등 의무가 이미 법으로 정해져 있기 때문에 “확실한 근거만 있으면 고용주와 임금 협상을 하거나 소송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 시사저널 미술팀


재계 “기업에 비용 부담” 반발

 

연방의회는 올해 9월 총선이 치러지기 전 이 법안을 논의할 예정이다. 그러나 경제계와 산업계 반대는 거세다. 독일 기계시설건축협회(VDMA)는 새 법안이 관료주의를 심화시키고 기업에 더 많은 비용 부담을 안길 것이라고 비판했다. 틸로 브로트만 대표는 “임금 격차의 진짜 원인은 양육 시설이나 전일제 수업 부족 등 기업 바깥에 있다”며 정부에 책임을 돌렸다. 슈테펜 캄페터 독일연방고용인협회장 역시 “여성의 직업 선택 교육 강화, 가사와 직장 생활 양립을 위한 인프라 확충, 재능을 중시하는 사회 풍조 등이 먼저 필요하다”고 강변했다.

 

하지만 이 같은 재계의 반대는 설득력이 떨어진다. 기업 내 성차별 문제를 자율적 해결에 맡겨 둔 결과가 유럽 최하위 수준의 임금정의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기업의 자율에 맡겨 달라는 주장의 신빙성을 떨어뜨리는 지표는 또 있다. 기업 내 임원 중 여성 비율이다. 2015년 1월1일 발효된 ‘감독위원회 여성 쿼터제’ 법은 증시에 상장된 독일 기업이 의무적으로 감독위원회 자리 중 30%를 여성에게 할당할 것을 정하고 있다. 이 법은 구상단계에서부터 기업의 자율성을 해친다는 비판은 물론 “진짜로 능력이 있는 여성은 쿼터제 없이도 승진한다”거나 “다수가 아닌 특권층 여성만 혜택을 본다”는 반대 의견에 부딪혔다. 심지어 폴커 카우더 기민당(CDU) 원내대표는 슈베지히 장관을 향해 “징징대지 말라”는 원색적 비난을 해 여론의 뭇매를 맞기도 했다.

 

그러나 쿼터제 시행은 변화를 가져왔다. 적용 대상이 된 151개 증시 상장 기업 중 루프트한자·아디다스를 포함한 50개 기업이 시행 1년 만에 감독위원회 내 여성 비율을 평균 7.3% 늘려 목표 달성에 접근했다. 하이코 마스 독일 연방법무부 장관은 쿼터제 시행을 앞둔 당시 “가부장제 종말의 신호등이 켜졌다”며 “진작 이뤄졌어야 할 일”이라고 평가했다.

 

임금정의법이 추구하는 임금 차별 해소는 여성의 노동력이 동등한 가치를 인정받기 위한 첫 단추다. 즉,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존엄을 누리기 위해 도달해야 할 첫 관문이라는 게 독일 내 여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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