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代 세습 이면에 피비린내 나는 숙청
  • 박혁진 기자 (phj@sisapress.com)
  • 승인 2017.02.20 11:24
  • 호수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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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체제 걸림돌 인사 대부분 처형 또는 피살

1997년 2월15일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서현동에 위치한 한 아파트에서 30대 중년 남성이 신원미상의 남성 2명과 말다툼을 벌이다 그들이 쏜 총에 맞아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경찰수사 결과 숨진 남성은 1982년 남한으로 귀순한 리일남(당시 36세)인 것으로 드러났다. 리일남은 귀순 후 이한영이란 이름으로 개명해 살았다. 당시 이한영의 죽음이 언론에 대서특필된 이유는 그가 일반 탈북자와는 출신 성분이 달랐기 때문이다. 이한영은 김정일의 전처 성혜림의 조카로서, 북한 로열패밀리의 일원이었다. 김정일은 그에게 이모부였다.

 

이한영은 북한 로열패밀리의 사정을 잘 알고 있다는 이유로 귀순 후 테러 위협에 시달렸다. 이 때문에 그는 1996년 성혜림 일가 서방 탈출 사건이 있기 전까지 남한에서 비공개 귀순자로 살아왔다. 한양대 2학년 재학 중이던 1985년에는 성형수술도 받았다. 우리 당국은 이한영이 북한 공작원에 의해 피살된 것으로 결론 냈다. 하지만 미스터리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이씨에게 러시아어 과외를 받으면서 가깝게 지냈던 한 지인은 “일명 ‘킬러’라고 불리는 공작원들이 대낮에 아파트에서 이웃에게 들릴 정도로 말다툼을 벌이다 총을 쐈다는 상황 자체가 미스터리였다”고 회고했다.

 

2007년 2월11일 중국 베이징 공항에 나타났을 당시 김정남의 모습 © AP 연합

이한영 피살 20년 만에 김정남 피살

 

이한영이 죽은 지 정확히 20년이 흐른 2017년 2월13일 말레이시아에서 또 한 명의 로열패밀리 김정남(46)이 동남아 여성 2명에 의해 피살됐다. 2월17일 현재 정확한 피살 원인과 배후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북한 배후설에 힘이 실리고 있다. 김정남은 1971년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 영화배우 성혜림 사이에서 태어났다. 김정일의 장남이자 김정은의 이복형이다. 한때 권력승계 1순위로 꼽혔으나, 김정은이 권력을 잡은 후에는 반대로 제거 대상 1순위가 됐다. 김정남은 1980년 러시아 모스크바로 유학을 떠났다가 1981년 스위스 제네바 국제학교에서 2년간 유학생활을 했다. 1980년대 말부터 국가보위성에서 간부로 근무했다. 1997년쯤 고모인 김경희로부터 경제를 배우며 후계자 수업을 받았다. 하지만 2001년 5월 위조여권으로 일본에 밀입국하려다 적발돼 중국으로 강제 출국 조치되면서 후계구도에서 밀려났다. 그러면서 김정은이 후계자로 급부상했다.

 

같은 로열패밀리지만 이한영의 죽음과 김정남으로 추정되는 인물의 피살 원인은 다른 측면이 있다. 이한영의 경우 로열패밀리임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체제를 정면으로 부정하면서 살해 위협에 시달렸다. 김정남은 체제를 부정했다기보다는 김정은 체제 확립에 있어서 잠재적 경쟁자로 인식된 측면이 크다. 이처럼 차이는 있지만 피살된 두 사람의 사례를 통해 북한 권력 상층부의 잔혹한 이면이 다시 한 번 드러났다. 북한은 김일성부터 김정은까지 3대 세습 체제를 공고하게 이어오고 있지만, 이는 일가친척 간 피비린내 나는 숙청과 처단을 통해 이뤄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정일의 경우 비교적 무난하게 권력을 세습했지만, 김정은은 부친 김정일의 복잡한 결혼 관계로 인해 형제들과 권력투쟁을 해야 했다. 김정일은 총 4명의 부인을 두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피살된 김정남은 첫째 부인 성혜림의 아들이었다. 김정은은 김정일이 셋째 부인 고용희와 나은 3남매 중 둘째다. 한 살 위 형 김정철과 여동생 김여정이 같은 배에서 나왔다. 김정철의 경우 현재 특별한 직위 없이 북한에 머물고 있는 걸로 알려져 있다. 2015년 가수 에릭 클랩튼 공연을 보기 위해 런던을 방문한 모습이 카메라에 잡힌 바 있다. 그때 김정철을 바로 옆에서 수행했던 사람이 최근 망명한 태영호 전 공사다. 김여정은 노동당 선전선동부 부부장을 맡고 있고 현재 권력 실세로 알려져 있다.

 

2013년 12월12일 장성택이 국가안전보위부 특별군사재판에 끌려나왔다. © 연합뉴스

권력 순응 안 하면 제거 대상

 

김정철이나 김여정처럼 로열패밀리로서 김정은 체제 확립에 걸림돌로 인식되지 않으면 권력의 한귀퉁이를 차지할 수 있지만, 반대의 경우 모두 잠재적 제거 대상으로 분류된다. 이번 김정남의 피살 배후로 북한이 거론되는 이유도 김정은 입장에서 이른바 ‘백두혈통’의 장남인 김정남은 부담스러운 존재였기 때문이라는 것이 대체적 시각이다. 이는 김정남을 옹립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던 데서 비롯된 김정은의 ‘트라우마’에 기인한 측면이 크다. 실제로 김정일이 사망하기 전 김정남을 후계자로 세워야 한다는 움직임이 있었다. 이를 주도했던 인사가 김정남과 김정은의 고모부인 장성택이었다. 장성택은 2013년 12월 처형됐는데, 처형 전 장성택의 조카 장용철 전 주말레이시아 대사가 김정남과 접촉해 돈을 주는 등 장성택과 그의 측근들이 김정남을 도왔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결국 장성택의 처형 이유가 김정남을 지원한 것과 무관치 않다는 해석이 많았다. 장 전 대사 역시 장성택 처형에 앞서 북한으로 소환돼 아들과 함께 처형됐다는 보도도 있었다.

 

장성택 이외에도 김정남을 도왔다가 비극적 종말을 맞게 된 인사들은 더 있다. 우선 2003년부터 2010년까지 베이징에서 근무한 곽정철 전 주중대사관 당비서가 김정남과 접촉한 혐의로 2011년 처형당했다. 북한 무역성 당비서를 지낸 곽 전 비서에게는 김정남과 세 차례 만났다는 혐의가 적용됐다. 그 가족 역시 모두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갔다.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 방송에 따르면, 고려항공 베이징지사 대표와 부대표 3〜4명도 같은 해 처형됐다고 한다. 김정남의 해외여행을 돕던 실무자들이란 이유에서였다.

 

김정은 체제가 자리 잡을 때까지 백두혈통에 대한 김정은의 견제는 당분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이미 김정남과 가까웠던 로열패밀리들이 한국으로 망명을 준비하고 있다는 보도가 이어지고 있다. 2월16일 KBS는 김정은과 ‘5촌 이내’ 관계인 50대 김아무개씨를 비롯해 아내, 아들과 딸 등 일가족 4명이 2월10일 탈북해 중국 베이징에 도착했다고 보도했다. 김씨는 2월13일 말레이시아에서 암살된 김정남과 가까운 사이로 최근 신변 위협을 느껴 한국으로 망명을 결심한 것으로 알려졌다. 보도 내용이 사실이라면 김일성 직계는 아니지만 이른바 ‘백두혈통’이 최초로 망명하는 사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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