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아의 지구 위 인류사(가야사 편)] 지워진 기억, 해상대국의 역사
  • 이진아 환경․생명 저술가 (sisa@sisapress.com)
  • 승인 2017.02.24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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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토보다 확장된 해상교역로 지도…2200년 전 유럽의 해상대국 페니키아도 그랬다

먼 옛날, 적어도 인도에서 한반도까지를 커버하는 해상교류의 길이 있었다는 사실이, 이제는 우리 사회에서 웬만큼 인정을 받는다고 치자. 한반도에 한때 가야를 비롯해 세계적인 위상을 떨치는 해상대국들이 있었다는 생각은 그리 일반적이지 않은 것 같다. 그랬다는 증거를 찾기도 쉽지 않지만, 굳이 그런 증거를 찾아 탐사에 나서려는 사람들도 거의 없는 것 같다. 

 

따라서 한반도가 한때 동아시아 해상교류의 허브였고, 거기서 유라시아 대륙 전체로 이어지는 해상 교역로가 있었으며, 가락국을 비롯한 한반도 사람들이 그런 활동의 주역이었다는 사실은 아직 대중들의 머릿속에 확실한 이미지로 자리 잡지 못한 것 같다. 왜 그럴까?

 

무엇보다 우리에게 아직 가락국과 같은 해상국가의 위상이 그렇게 대단했다고 생각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한반도의 해양사 부분이 본격적인 연구 대상이 되고 가락국의 국격이 인정되기 시작한 것은 불과 10년도 되지 않는다. 요즘 와서 가락국이 한때는 세력이 큰 나라였으며 3국시대가 아니라 4국시대라고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학계에서도 커지고 있지만, 아직도 주류 의견은 아니다. 한국사를 꽤 알고 있는 사람 중에서도 가락국은 신라에게 패망한 작은 나라라는 인상을 갖고 있는 편이 더 많을 것이다. 

 

아래 지도에서 볼 수 있듯이, 한창 때 가야의 세력 범위도 4국 중에서 가장 미미한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한반도 북부와 만주 벌판까지 커버하고 있는 고구려에 비하자면, 가야의 영역은 내세울 게 못되는 것 같다. 옆의 나라 중국의 어마어마한 땅 덩어리를 생각한다면, 그 대륙 한 쪽에 조그맣게 달린 한반도에 살았던 사람들은 언제나 중국의 눈치를 보며 살아왔을 것 같다.

 

 

사국시대 지도 ⓒ 시사저널


 

하지만 이것은 인간 활동의 주 무대가 육지에 국한되어 있다고 전제했을 때 자연스러운 추론이다. 큰 배를 타고 아주 먼 나라의 사람들과도 활발하게 교류했던 시대라면, 위 4국 중에 가장 크게 세력을 펼칠 수 있는 것은 가야와 백제다. 고구려는 바닷길이 남쪽 국가들에 의해 막힐 것이고 신라 역시 일본 열도 쪽 아니면 이동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백제보다 가야가 더 유리하다고 볼 수 있다. 백제는 더 넓은 면적이 바다에 접해있지만, 바닷가 인근에 큰 산이 있는 곳이 그리 많지 않고, 따라서 배를 만들 큰 목재를 공급 받기 쉽지 않았을 것이며 내륙 깊숙이 배가 들어올 수 있는 항구도 발달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에 비해 가야는 그 북쪽 국경을 이루고 있었던 태백산계와 소백산계의 산지들로 인해, 생태적 조건이 좋아 식생의 생장이 왕성했던 시대에는 큰 나무들도 많았을 것이고, 그런 산계에서 발원하는 길고 수심이 깊은 낙동강이 있다는 이점도 있었다. 따라서 위에서 보이는 면적이 거의 항구와 그 배후지라고 봐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해상활동의 베이스캠프로 이루어진 나라였다.

 

가야와 같은 지리적 및 지형적 특징을 갖는 나라가 환경조건만 맞으면 대단한 해상국가로 활동하는 예는 세계사에서 많이 찾을 수 있다. 대표적인 나라가 ‘페니키아(Phoenicia)’다. 페니키아는 서기전 1500년에서 서기전 300년까지, 약 1200년 동안 지중해를 중심으로 위상을 떨쳤다. 최근에 와서는 페니키아가 아프리카 서해안을 따라 상당히 진출했던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가락국 수로왕의 재위기간이 42년부터 199년까지니까, 그때부터 1000년 이상 이전의 일이다. 

 

구글에서 ‘페니키아 지도’를 검색하면 아래와 비슷한 지도들이 많이 나온다. 이 지도에서 페니키아 본토는 제일 오른쪽 진한 초록색으로 표시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해안가에 초록색 점으로 표시된 도시들과 그 배후지로 구성되어 있는, 면적이 좁은 국가다. 전부 합쳐도 같은 시대 국가였던 고대 그리스의 4분의 1 정도이며, 대충 비교해 봐도 전성기 가야라고 인정되는 영역의 절반에 못 미치는 크기다.

 

페니키아 교역로 지도

 

하지만 페니키아의 지도를 그릴 때는 이 한 줄의 항구도시들만 표시하지는 않는다. 위 지도처럼, 페니키아가 교역했던 해상 루트와 페니키아의 파트너 도시들, 그리고 페니키아 사람들이 진출했던 정주지역까지 표시하는 게 보통이다. 해양국가의 영토는 육지, 그것도 그 세력이 나서 자란 본토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페니키아는 유럽 지역의 국가였고, 한반도에서는 기술이 더 낙후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생길 수도 있을 것이다. 유럽은 근대기가 시작된 이래 가장 선진지역으로, 지금까지도 역사학을 비롯한 세계의 학문을 선도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또 근대라는 시기는 유럽이 ‘대항해시대’라는 시기를 여는 것에서 출발한다. 따라서 유럽은 자신들 역사에 있어서 ‘항해’에 대한 연구를 중시했고, 그 내용이 지금까지도 역사학에서 중심이 되고 있다. 이에 비해 한반도를 포함한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고대의 항해술에 대한 역사연구가 훨씬 미미하다.

 

하지만 유럽이 이렇게 경제적으로나 기술적으로나 선진국에 속하게 된 것은 인류 역사를 통해서 근대에 와서 처음 생긴 일이다. 근대기 이전의 유럽은 항상 아시아보다 경제적으로나 기술 수준으로나 낙후한 지역이었다. 항해술 면에서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15세기 전반 명나라 환관 ‘정화’가 사용하던 범선과 그로부터 반세기도 더 지난 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던 때 탔던 범선은 그 크기만으로도 종종 비교의 대상이 된다. 배의 기능과 항해술에서는 말할 것도 없다. 

 

명나라 환관 정화의 범선(왼쪽)과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범선 크기 비교. ⓒ 시사저널

 

대략 15세기 무렵부터 중국의 선진적인 항해술이 유럽으로 전해졌다는 것은 세계사 초보자도 아는 얘기다. 지금까지 역사학에서 별로 가르쳐지지 않았던 사실이지만 한때 동아시아의 문명 중심은 한반도였고, 여기서 중국으로 많은 문물이 건너갔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이 부분에 대한 역사적인 증거와, 그것을 토대로 한 새로운 주장들이 지난 세기 말부터 계속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모두 놓고 판단해보자. 2200년 전 소아시아 해안가에 자리한 페니키아가 아프리카의 해안을 돌아 아라비아 해까지 진출했다. 그런데 그로부터 천 년 뒤 한반도의 해상국가 가락국이 인도까지 갈만한 항해술이 갖출 수 없었을까?

 

세계사를 다만 기록으로서만 보지 않고, 지리적 및 생태적 조건, 그리고 인근 국가들과의 지정학적 관계의 가능성을 모두 놓고 따져 보면, 가락국은 페니키아보다 못할 것 없는 조건을 갖추고 있다. 만일 가락국의 지도가 위의 페니키아 지도 같은 방식으로 그려진다면 적어도 대략 다음처럼 그려져야 할 것이다.

 

동아시아 교역로 지도

 

그래도 면적이 작은 나라가 어떻게 그렇게 큰 규모로 해상활동을 할 수 있었는지 궁금하다면, 고대 ‘해상국가’에 대해 좀 더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들은 우리에게 익숙해져 있는 개념인 육지에서의 세력을 기반으로 하는 ‘국가’들과는 다른 형성 및 운영 방식을 갖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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