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도 지금 反트럼프 시위 중
  • 구민주 기자·최정민 프랑스 통신원 (mjooo@sisapress.com)
  • 승인 2017.02.24 10:22
  • 호수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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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反이민자 정책 파문 전 세계 확산

 

“베트남전 반대 시위 이래 본 적 없는 최대 규모 저항운동이다.”

프랑스 유력지 르몽드 편집장을 지낸 다니엘 베르네 국제 전문기자는 1월21일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반(反)트럼프 여성 행진(The Women’s March)’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오늘날 전 세계로 확산되고 있는 반트럼프 운동을 보면 그의 진단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이미 트럼프 대통령 당선 직후인 지난해 11월, 독일 베를린, 영국 런던에 이어 프랑스 파리까지 유럽 곳곳에 트럼프를 반대하는 조직이 결성됐고 대규모 시위가 이어졌다. 트럼프 정부가 2월4일 이슬람권 7개국 무슬림에 대해 입국금지 행정명령을 내린 이후 시위의 열기는 더욱 고조됐다. 세계 주요 도시들마다 ‘반트럼프’ 블록을 형성하며 그야말로 똘똘 뭉친 것이다.

 

파리의 반트럼프 운동조직은 지난해 11월19일 삼삼오오 자발적으로 모여든 파리 거주 미국인과 학생, 예술가, 교육자들을 중심으로 결성됐다. 파리 7구 한 카페에 모인 이들은 “우리가 모두 똑같이 가지고 있는 것이 있다. 바로 ‘분노’다”라고 열변을 토했다. 모임 창립멤버 중 하나인 실베스트르 자파르는 공영방송인 프랑스앵포와의 인터뷰에서 이번 운동의 탄생 배경에 대해 “미국 국민들이 외롭게 트럼프에게 맞서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다”면서 “이 문제는 비단 미국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며, 인본주의의 근간을 흔드는 문제”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1월31일 프랑스 파리에 위치한 마들렌 사원 앞에 시민들이 모여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반(反)이민 행정명령에 항의하고 있다. © EPA 연합

反트럼프 현상이 남의 일 아닌 프랑스

 

프랑스에서의 반트럼프 기류는 단순히 대서양 건너 미국의 행동을 규탄하기 위함이 아니다. 프랑스의 반트럼프 운동이 남다른 이유는 대선을 3개월 남겨 두고 있는 지금, 지지율 1위의 유력 후보가 바로 ‘프랑스판 트럼프’로 불리는 극우 정당 국민전선의 마린 르펜 대표이기 때문이다.

 

르펜 대표는 2월5일 대선 출마 연설에서 “우리는 더 이상 이슬람 근본주의의 멍에 속에 살아가길 원치 않는다”면서 반(反)이슬람을 선포했다. 나아가 프랑스로 들어오는 이민자 수를 대폭 줄이고, EU(유럽연합) 탈퇴 국민투표를 실시하겠다고 밝히는 등 자국 중심주의를 강하게 내세웠다. 르펜이 대권을 잡는다면, 브렉시트(Brexit)에 이어 ‘프렉시트(Fraxit·프랑스의 EU 탈퇴)’도 충분히 현실화될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이 때문에 프랑스 내에선 자국의 반트럼프 정서를 두고 미국을 규탄함과 동시에, 프랑스의 미래를 지키려는 절박함의 산물로 보는 시각이 많다. 즉, 프랑스 대선 정국에서 반트럼프 운동은 기세등등한 극우정당에 맞서는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트럼프 국빈 자격 없다” 英 청원 봇물

 

트럼프 대통령 취임 직후 가장 먼저 정상회담을 열며 끈끈한 유대관계를 강조했던 영국에서도 트럼프를 향한 시위 열기는 뜨겁다. 1월27일 트럼프는 외국 정상 중 처음으로 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를 백악관에 초대했다. 메이는 이에 대한 보답 차원으로 그 자리에서 엘리자베스 여왕을 대신해 트럼프에게 연내 영국 국빈방문을 요청했다. 트럼프 역시 여름에 방문하겠다며 이를 수락했다.

 

같은 날 트럼프는 메이와의 회담이 끝난 지 불과 몇 시간 지나지 않아 반(反)이민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그와 동시에 영국에선 “트럼프 국빈방문을 당장 철회하라”며 시민들이 들고일어나기 시작했다. 2월5일 런던 등 영국 내 주요 도시에서 4만여 명의 시민이 도심 행진 시위를 벌이며 ‘트럼프 반대’를 외쳤다. 영국 의회 온라인 청원 게시판에는 ‘트럼프를 여왕 초청의 국빈방문이 아닌, 총리 초청의 방문으로 격하해야 한다’는 청원이 올라왔고, 열흘 만인 2월8일 약 180만 명이 서명에 동참했다.

 

여론을 등에 업은 야당 의원을 중심으로 70여 명의 영국 의원들이 국빈방문 요청을 철회하는 내용의 발의안을 제출하기도 했다. 존 버커우 하원의장은 “인종차별주의자이자 성차별주의자인 트럼프에게 웨스트민스터홀(영국 의사당)에서 연설하는 명예를 줘서는 안 된다”고 강력 비판하며, 그가 어떤 형식으로 영국을 방문하든 의회 연설은 승인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의회는 오는 2월20일, 이 문제를 두고 정식으로 논의를 시작할 예정이다.

 

트럼프의 영국 국빈방문을 반대하는 시민들이 1월30일 총리 관저가 있는 런던 다우닝가에서 항의 시위를 하고 있다. © EPA 연합

메이 총리는 이 같은 국민적 반응에 난처한 기색을 보이면서도 “트럼프를 향한 국빈방문 요청은 유효하다”는 입장을 유지해 왔다. 그리고 2월14일 영국 총리실은 “국빈 요청은 영국과 미국 간 관계의 중요성을 반영한다”며 “세부 일정이 확정되면 이뤄질 트럼프 대통령의 방문을 고대하고 있다”고 공식 입장을 발표했다. 180만 철회 청원을 사실상 전면 거부한 것이다. 영국 시민들은 “메이의 이 같은 결단이 엘리자베스 여왕까지 난처하게 만들고 있다”며 크게 반발하고 있다.

 

 메이 총리와 달리 독일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트럼프의 반이민 행보를 즉각 비판했다. 메르켈은 “어떤 경우에도 모든 집단에 혐의를 두는 것은 정당화될 수 없다”며 트럼프의 행정명령에 우려를 표했다. 미카엘 뮐러 베를린 시장은 “유럽의 분리와 자유를 상징하는 도시 베를린에서 다른 나라의 장벽 설치를 지켜볼 수 없다”며, 트럼프에게 멕시코 장벽 설치 결정을 철회할 것을 촉구하기도 했다.

 

시민들도 정치권의 비판에 동참했다. 1월말, 냉전의 상징인 베를린장벽 앞에서 ‘트럼프 장벽’을 반대하는 시위가 열렸다. 이어 2월4일 베를린 도심에 위치한 브란덴부르크문 광장에선 약 1200명의 시민들이 모여 ‘No Ban! No Wall!(입국금지 반대! 장벽 설치 반대!)’을 외쳤다.

 

독일 시사주간지 슈피겔은 2월4일자 표지에 피 묻은 칼과 피 흘리는 자유의 여신상을 양손에 들고 있는 트럼프 이미지를 실어 ‘IS를 연상케 한다’는 논란이 일기도 했다. 슈피겔은 이미지와 함께, 트럼프에 대해 “미국 우선주의를 주장하며 민주주의를 참수시켰다”고 거세게 비난하며 “유럽을 비롯한 전 세계가 이 ‘위험한 대통령’에 맞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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