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급 ‘사이다’ 《김과장》에 서민들 환호
  • 하재근 문화 평론가 (sisa@sisapress.com)
  • 승인 2017.02.24 15:04
  • 호수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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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작 《사임당》 넉다운시킨 《김과장》 신드롬의 동력은 ‘바닥난 사회적 신뢰’

다윗이 골리앗을 누르는 기적이 일어났다. KBS 수목드라마 《김과장》이 이영애의 복귀작 《사임당, 빛의 일기》(《사임당》)를 제치고 동시간대 시청률 1위에 올라선 것이다. 이영애와 송승헌이라는 초특급 한류 스타에, 5만원권 화폐 인물 신사임당을 소재로 내세운 제작비 200억원의 대작 《사임당》에 비해 《김과장》은 초라한 소품이었다. 김과장 역의 남궁민, 여주인공 남상미 등의 스타성이 이영애·송승헌에 비할 바가 아니고, 또 한 명의 주연인 2PM 준호는 신인급 연기자였다.

 

당연히 시작은 《사임당》이 앞서 나갔다. 《사임당》은 1회와 2회 시청률이 각각 15.6%·16.3%를 기록하며 동시간대 1위에 안착한 반면, 《김과장》은 1회·2회 시청률이 각각 7.8%·7.2%(닐슨코리아, 전국 기준)에 지나지 않았다. 기적은 그다음에 펼쳐졌다. 《김과장》이 3회에 12.8%를 기록하며 10% 선을 넘기는가 싶더니, 4회 13.8%, 5회 15.5%, 6회 16.7%, 이렇게 연이어 자체 최고 기록을 경신하며 승승장구한 것이다. 반면에 《사임당》은 5회에 10.7%까지 주저앉았다. 놀라운 이변이다. 《김과장》은 1월 마지막 주와 2월 첫째 주에 연이어 콘텐츠 파워 지수 1위에도 올랐다. 뒤늦게 1편부터 다시 보는 역주행 돌풍도 나타났다.

 

《김과장》은 ‘삥땅’의 달인이 대기업 경리과장이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주인공 김성룡 과장은 극히 예민한 숫자 감각과 극히 둔감한 도덕 감각을 가진 사람으로, 군산에서 주류 유통 등을 하는 지역 조폭의 회계 관리를 도맡아 한다. 그는 장부를 조작해 주고, 뒤로는 ‘삥땅’을 일삼는다. 재벌의 분식회계를 위해 임원으로 채용된 전직 검사가, 탁월한 범죄자 김성룡을 경리과장으로 데려간다. 자기들의 ‘큰 삥땅’을 도와주면 소소한 삥땅은 묵인해 주겠다는 것이다. 김성룡은 대기업에서 더 크게 해먹겠다는 야심으로 출근하던 중 우연히 사람을 구한다. 의인(義人)으로 칭송받으면서 봉인됐던 의인 본능이 조금씩 깨어나기 시작한다. 한편 검사 출신 임원은 김성룡에게 그룹의 모든 장부를 조작하라고 협박하는데, 너무나 거대한 부정에 김성룡은 회사에서 해고당할 궁리를 한다. 그래서 갑질하는 회장 아들에게 호통을 치는데, 그 바람에 더욱 의인의 길로 들어선다. 이렇게 극은, 악인이 본의 아니게 의인이 되어 정말 큰 악인들의 부정을 징치한다는 블랙코미디다.

 

KBS 수목드라마 《김과장》 © KBS

‘삥땅의 달인’이 본의 아니게 의인이 되다

 

여기에 시청자들이 반응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극적 완성도가 높기 때문이다. 연속극은 아무리 흥미로운 설정이어도 중간중간 늘어지는 부분이 있게 마련인데, 《김과장》은 초반부에 처지는 장면이 거의 없을 정도로 치밀했다. 발연기 논란이 없을 정도로 모든 배우들이 제 몫을 해내기도 했다. 특히 주인공 남궁민이 인생작 수준의 연기를 보여줬다. 반면에 《사임당》은 초반에 늘어진 전개에 아역들의 연기력 논란까지 겹쳤다.

 

무엇보다도 직장인을 비롯한 서민의 막힌 속을 뚫어줬다는 점이 《김과장》 신드롬에 크게 작용했다. 김성룡은 비록 ‘삥땅’의 달인이라고는 하지만, 워낙 소소하게 해먹기 때문에 재산이 적다. 한 푼이라도 더 모으기 위해 허름한 월셋집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모습이 일반적인 서민과 다르지 않다. 김성룡의 꿈은 10억 모으기인데, 이건 2000년대를 강타했던 10억 모으기 열풍과 겹친다. 그렇게 서민과 일체감이 높은 캐릭터가 재벌 오너 가문, 검사 출신 임원 등을 쩔쩔매게 하는 모습이 통쾌감을 안겨준다. 일종의 서민 히어로라고 할 수 있다.

 

패딩조끼 입은 경리부장의 무기력함부터 소시민인 말단 직원들, 그리고 불안한 처지의 택배사원들까지, 을(乙)로 사는 직장인들을 워낙 리얼하게 그리기 때문에 시청자들의 공감도가 더욱 커졌다. 부정한 돈을 ‘빙탕5000’ 박스에 넣어서 건네는 것처럼 통렬한 풍자도 있고, 자기도 모르게 의인으로 변해 가는 주인공이 보다 악해지려 내적 고뇌에 빠져드는 모습은 우스꽝스럽다. “(사측이) 택배사원들에게 관심이 없는 게 아니라, 인간 자체에 관심이 없는 거죠”라는 식의, 주인공이 내뱉는 공감 대사들이 시청자의 속을 뚫어준다. KBS 드라마인데도 김성룡이 택배노조와 함께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는 장면이 나와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평생 일한 회사에서 하루아침에 비열한 방식으로 내밀려 자살하려는 직원에게 김성룡이 “삥땅치고 해먹은 사람들도 다 잘사는데 왜 당신이 죽느냐”고 외치는 장면에서 눈물을 흘렸다는 시청자도 있다.

 

우울한 대목은, 시청자들이 초반에 주인공의 악함에 특히 공감했다는 점이다. 김성룡은 “인간관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속성이 뭘까요? 나눠먹는 관계. 대한민국의 변치 않는 트렌드가 뭘까요? 바로 삥땅이오. 삥땅! 대한민국 어디 한 군데 안 썩은 데가 없고, 안 허술한 데가 없잖아. 이 얼마나 좋은 세상이야. 해먹기 천국!”이라며 동조자를 규합하고 해먹었는데, 여기에 시청자들이 후련해했다. 주인공은 이 ‘더러운’ 나라와 작별하고 깨끗한 덴마크로 가기 위해 10억원을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모은다. 이것이 ‘헬조선 탈출(탈조선)’ 신드롬과 겹치면서 김성룡처럼 탁월하게 해먹지 못하는 서민들에게 대리만족을 안겨줬다. 김성룡은 “나한테 의인 소리 하지 마. 누구 신세 망칠 일 있니?”라며 한사코 악인이 되려 한다. 착하면 호구 된다는 인식이다. 이것이 우리 사회의 진실을 적나라하게 까발렸다고 사람들이 느꼈기 때문에 역대급 ‘사이다’라는 탄성이 나온 것이다.
 

 

사회적 신뢰 붕괴된 한국 사회 상황 투영

 

결국 바닥난 사회적 신뢰가 《김과장》 신드롬의 동력이라고 할 수 있겠다. 우리나라는 힘 있는 놈들이 해먹는 나라이고, 나도 능력만 있다면 해먹고 싶다는 심리가 있는 것이다. 단, 정도가 있다. 지방 조폭의 장부를 만져주고 그들의 돈을 해먹는 정도까진 괜찮다. 그러나 멀쩡한 회사의 골수를 빼먹거나, 용역에 당하는 택배사원들처럼 눈앞에 구체적인 피해자가 있는 경우는 김성룡이 용납하지 않는다. 선을 넘었다고 보는 것이다. 시청자는 초반에 김성룡이 소소하게 ‘삥땅’치는 것과, 선을 넘었을 때 의인으로 변신하는 것에 모두 동의했다. 대중이 한편으론 사리사욕을 추구하며 각자도생하려 하지만, 여전히 근본적인 차원에선 공공선을 추구한다는 얘기다. 하지만 그 선이 위태롭게 흔들린다. 사리사욕 추구와 부도덕에 대한 공분이 공존하지만, 사리사욕 추구의 욕망이 조금씩 커지는 현실. 《김과장》 신드롬엔 바로 이렇게, 사회적 신뢰가 붕괴된 한국 사회의 위태로운 상황이 투영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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