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루기 쉬운 감독’이라는 편견, 라니에리의 발목을 잡다
  • 김회권 기자 (khg@sisapress.com)
  • 승인 2017.02.24 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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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도 채 안돼 비극이 돼 버린 레스터의 동화 같은 이야기

 

“잉글랜드 챔피언이며, FIFA 선정 올해의 감독이 해임됐다. 이것이 새(new) 축구라고 한다. 그 누구도 당신이 쓴 역사를 지울 수 없다. 힘내라.”

잉글리시 프리미어리그(EPL)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주제 무리뉴 감독이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누군가를 응원했다. 대상은 막 감독직에서 해임된 클라우디오 라니에리 전 레스터시티 감독이었다. 지난해 동화 같은 일을 이뤄냈던 라니에리는 2월23일(현지 시각) 무직자가 됐다.

 

2015년 7월 레스터시티의 신임 감독으로 취임한 라니에리는 ‘빅클럽’의 돈 공세를 뚫고 작은 클럽을 프리미어리그 우승으로 이끌었다. 하지만 올해 성적이 급락했다. 올 시즌 처음 진출한 UEFA 챔피언스리그에서는 조별리그를 뚫고 16강 진출에 성공했지만, 막상 2016-17 프리미어리그에서는 부진의 늪에 빠졌다. 25경기를 마친 지금 5승6무14패로 17위에 자리하고 있다. 다시 말해 현재 강등권 싸움을 진행 중이라는 뜻이다. 

 

프리미어리그 우승을 이룬 팀들은 하나같이 역사에 이름을 남긴다. 하지만 프리미어리그의 역사 속에서도 모두가 놀랄만한 일을 한 팀은 세 곳뿐이었다. 하나는 트리플(프리미어리그/FA컵/챔피언스리그 우승)을 달성한 1998-99년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또 하나는 2003-04년 26승 12무라는 무패의 전적으로 우승한 아스널이다. 그리고 세 번째가 전 세계를 놀라게 했던 2015-16년의 레스터시티다.

 

2월23일 우승한지 채 1년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레스터시티는 라니에리 감독의 경질을 발표했다. © 연합뉴스

‘엘비스가 살아있을 확률’을 현실로 만든 레스터시티

 

하지만 세 팀의 업적은 결이 다르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아스널이 이룬 결과는 훌륭했지만 이 두 팀은 ‘그럴 수 있는’ 강팀이었다. 알렉스 퍼거슨의 팀은 나가는 모든 대회에서 우승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3개 리그 우승을 한 해에 달성한 건 놀라운 일이지만, 적어도 하나 이상의 대회에서 우승컵을 가져올 수 있는 팀이었다. 아무리 부진해도 1년에 10번 이상 지지 않는 아스널도 마찬가지였다. ‘이번에는 아스널이 확실하게 질거야’라고 예상하는 경기는 원래 없었다. ‘매번 이기겠다’는 각오로 게임에 나선 아스널은 실력과 운이 뒷받침되면서 무패 우승이라는 결과를 따냈다.

 

그런데 레스터시티는 이들과 좀 달랐다. 레스터시티가 우승을 노린다는 건 판타지에 가까운 이야기였다. 라니에리가 감독으로 취임했을 때, 부회장인 아야왓 스리바다나프라바 부회장은 이런 제안을 던졌다. “만약 팀이 2부로 강등되더라도 감독직을 계속 맡아주겠느냐”고. 그만큼 기대치가 형편없었다는 얘기다. 

 

지난 시즌 개막 2연전에서 레스터시티가 선더랜드와 웨스트햄 유나이티드를 상대로 2연승을 거두자 BBC스포츠의 ‘매치 오브 더 데이’(MOTD) 진행자인 게리 리네커(과거 레스터시티에서 뛰었던 레전드다)는 농담으로 이렇게 말했다. “올해 레스터시티의 목표를 리그 잔류가 아니라 챔피언스리그나 유로파리그 출전으로 높여야되는 것 아닙니까?” 그러자 라니에리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게리, 고마워요. 그렇지만 지금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라고. 

 

라니에리의 이 말은 진심이었다. 레스터시티 팬조차도 그런 일이 일어날 거라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중의 기대를 그대로 반영해 스포츠 도박사들이 내놓은 레스터시티의 프리미어리그 우승확률은 5000분의 1이었다. “난 레스터시티를 사랑하니까”라며 술김에 베팅하지 않는 이상 그 누구도 걸지 않을 내기였다.

 

그런데 전 세계 축구팬들은 놀라운 일을 보고야 말았다. ‘엘비스 프레슬리가 살아있을 확률’과 비슷하다는 레스터시티의 우승을 말이다. 스포츠에서 이것과 비견될 만한 사건은 쉽게 찾아보기 어렵다. 2002년 월드컵에서 한국이 4강에 오른 것은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대회 기간에 이뤄진 쾌거였다. (물론 우승은 하지 못했다) 

 

사실 짧은 기간의 결과라면 그때의 컨디션이나 홈 어드밴티지, 동기 부여와 운 등이 작동해 약자가 강자를 누르는 결과가 나올 수 있다. 하지만 프리미어리그는 9개월간 20개 팀이 격전을 벌인다. 팀 전력에 따라 예상과 근접한 결과가 나오기 마련이고, 장기간에 걸친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 곳이었다. 그런데 레스터시티가 그 어려운 걸 해냈다. 리그 종료까지 두 경기를 남겨놓은 36라운드에서 우승을 결정해 5000분의1 확률을 돌파해 냈다. 

 

 

‘인격자’ 라니에리가 명장이 아니었던 이유

 

레스터시티가 36경기 내내 운이 좋았을까.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나 리버풀, 첼시 등 빅클럽이 일제히 문제를 보였던 시즌이었다는 것 정도가 행운이라면 행운이었지만 경기를 치를수록 진화했던 레스터시티는 좋은 팀이었다. 2015-6 시즌 프리미어리그 왕좌를 다툰 20개 팀 중 11개 팀은 우승 경험이 있었고 9개 팀은 없었다. 이론적으로 새로운 팀이 우승할 가능성은 절반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런 일은 잘 일어나지 않는다. 1990년대부터 엄청난 자본이 흘러들어온 프리미어리그는 빅클럽에 더욱 유리한 리그가 됐기 때문이다.

 

매년 프리미어리그 상위 4개팀은 챔피언스리그에 진출할 수 있다. 프리미어리그에서 출전한 팀은 총 57개 팀이다. 하지만 그 중 52번은 맨체스터유나이티드, 아스널, 첼시, 리버풀, 맨체스터시티의 몫이었다. 매번 나가는 팀이 또 나가는 결과. 그 정도로 영국 축구는 닫혀 있었다. 막대한 돈으로 좋은 선수들이 들어오면서 경기의 수준은 높아졌지만 빅 머니가 빅클럽에 몰리면서 리그의 역동성은 잠들었다. 그래서 작은 클럽이 큰 클럽을 잡는 ‘자이언트 킬링’은 사라졌다. 

 

이런 닫힌 시대에 이룬 레스터시티의 위업은 그래서 더욱 놀라웠다. 축구 리그가 5~6개 팀만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는 걸 증명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서프라이즈는 이탈리아인 라니에리가 준 선물이었다. 그런데 이런 라니에리를 우승이 1년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레스터시티가 해임했다. 

 

발렌시아와 첼시, 유벤투스와 AS로마 등을 이끈 경력을 보면 라니에리는 나름 좋은 감독이었다. 그는 과거부터 ‘미스터 나이스’로 불렸다. 온화한 말투와 유머 감각을 가진 그를 미디어는 사랑했다. 하지만 ‘사람이 좋다’라는 인상평이 감독에게 필수적인 건 아니다. 오히려 이런 사람 좋음은 축구계 명장들에게서 보기 힘든 품성이다.

 

라니에리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지만 그 중 부정적인 것들을 한 번 묶어보자. ‘좋은 사람’이지만 위엄이 없다는 얘기가 있다. 감독이 인격자라고 선수들이 그대로 따라주지 않는다. 퍼거슨이나 주제 무리뉴, 펩 과르디올라처럼 명장으로 평가받는 감독은 ‘사람 좋다’는 얘기를 거의 들어보지 못했다. 그들은 ‘인격자’라는 틀에 부합하진 않았지만 대신 강렬한 카리스마를 발휘해 선수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얻곤 했다.

 

그가 레스터시티 이전에 이룬 업적도 그랬다. 그는 우승보다 2위에 익숙한 감독이었다. 명문 유벤투스를 이끌고 세리에A에서 2위를 차지했고 AS로마를 맡은 뒤에도 무리뉴의 인테르를 추격하며 2위를 기록했다. 1위를 한 감독들이 ‘명장’이라면 그는 명장에 살짝 미치지 못하지만 평범한 감독 중에서는 꽤나 우수한 정도였다. 

 

그런 평범한 그는 여러 팀을 옮겨 다니다 2015년 레스터시티에 둥지를 틀었다. 의외로 감독직을 쉰 적이 거의 없을 정도로 항상 그에 대한 수요는 있었다. 이렇다 할 결과를 내놓지 못하고 퇴출된 감독이 어느새 다른 클럽의 지휘봉을 잡고 있는 경우를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데 라니에리 역시 그 중 한 명이었다. 

 

1년전 마치 판타지 같았던 프리미어리그 우승을 이뤄냈던 레스터시티는 현재 리그 17위에 올라 강등 걱정을 해야 할 상황이다. ⓒ EPA연합

‘적당한 감독’ 라니에리를 쳐 낸 레스터시티

 

라니에리에 대한 수요는 왜 끊이질 않았을까. 과거 영국 ‘데일리메일’은 이를 두고 ‘즉효성’으로 풀이했다. 모든 축구 클럽은 한정된 자원을 가지고 즉시 결과를 내야한다. 그러다보니 아무래도 얼굴과 이름이 익숙한 감독이 경험과 지식이 풍부할 거라는 믿음을 가지기 쉽다. 클럽 경영진의 생각도 마찬가지다. 젊고 참신하더라도 실적이 없는 감독을 기용하기 보다는 어느 정도 이름 있는 감독을 기용하기를 원한다. 혹여나 결과가 신통치 않더라도 팬들에게 변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라니에리는 구인난에 처한 작은 클럽에 매우 ‘적당한 사람’이었다. 이름도 얼굴도 적당히 유명하고, 첼시나 유벤투스 등을 이끈 경력도 갖고 있다. 리그 우승과 같은 1등 타이틀은 없지만 어느 정도 선수를 컨트롤하고 전술도 구사할 줄 알며 적당히 결과도 내왔다. 무엇보다 클럽 경영진의 눈에 들어온 라니에리의 장점은 ‘다루기 쉬운 사람’이라는 점이다. 성품이 온화하고 연봉도 높지 않다. 따라서 다른 좋은 감독이 시장에 나올 경우 해고하기도 상대적으로 쉽다. 클럽 역사에서 일종의 ‘연결고리’로는 적격이다. 

 

“이번 결정은 우리가 7년 전 클럽을 소유한 이후 가장 어려운 결정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개인 감정보다 클럽의 장기적인 이익을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그가 이룩한 업적에 대해 영원히 감사의 마음을 간직할 것이다. 이번 시즌은 프리미어리그에 잔류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하고 있다. 나머지 13경기에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변화가 필요하다고 느꼈고 이번 결정을 내렸다.”

스리바다나프라바 레스터시티 부회장의 라니에리 경질의 변은 이랬다. 결국 ‘연결고리’이자 ‘다루기 쉬운’ 라니에리 감독의 장점은 그를 레스터시티에 입성하게 만들었지만 그를 퇴장시킨 이유가 됐다. 바로 전년도 ‘FIFA 올해의 감독’이자 프리미어리그 우승팀 감독의 경력을 추가했음에도 라니에리는 그에게 내려진 선입견을 극복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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