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Insight] 김정남 죽어서도 말할까
  • 이영종 중앙일보 통일전문기자 (sisa@sisapress.com)
  • 승인 2017.02.27 09:32
  • 호수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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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레이시아-북한, 김정남 시신 둘러싼 쟁탈전

북한 김정은의 이복형 김정남씨 죽음을 둘러싼 논란이 시신 쟁탈전으로 치닫고 있다. 2월13일 오전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에서 발생한 김정남 사망 사건은 평양에서 파견된 공작요원들이 주도한 독극물 암살로 굳어지고 있다. 이 과정에서 사인(死因)을 포함한 전모를 밝히는 데 시신 확보가 핵심이란 점에서 초미의 관심을 끌고 있는 것이다. 북한과 말레이시아가 정면충돌한 이유도 결국 시신 부검과 인도 문제로 압축될 수 있다. 수사를 진행 중인 말레이시아 당국은 재부검 등의 진행 필요성을 이유로 시신 인도에 난색을 표하고 있다. 이에 대해 북한 측은 ‘독살’을 부정하면서 김정남 시신의 조속한 확보를 위해 사활을 건 모습이다. 한국을 비롯한 관련국들도 촉각을 곤두세운 채 사태 추이를 지켜보고 있다.

 

당초 사건 초기에는 말레이시아 당국이 북한 손을 들어주는 듯했다. 김정남이 북한 여권을 소지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해 사건이 발생한 지역을 관할하는 쿠알라룸푸르 주재 북한대사관 측에 시신을 인도한다는 입장을 밝힌 것이다. 하지만 사인이 독살이란 정황이 점차 드러난 데다 북한 소행임이 파악되면서 분위기는 반전됐다. 북한 쪽이 아닌 김정남 유족에게 먼저 김정남 시신을 인도하는 방향으로 가닥이 잡힌 것이다.

 

말레이시아 일간 ‘뉴스트레이츠타임스’ 2월18일자 1면에 실린 김정남의 피살 직후 모습 © 연합뉴스

말레이시아, 김정남 시신 유족 인도 방침

 

시신을 놓고 북한과 말레이시아가 본격적으로 격돌한 건 이번 사건과 관련한 북한의 첫 공식 반응이 나오면서다. 북한은 사건 발생 열흘 만인 2월23일 오전 관영 선전매체를 통해 “말레이시아 측이 국제법과 인륜도덕은 안중에도 없이 시신 이관 문제를 정치화해 그 어떤 불순한 목적을 이뤄보려 한다”고 비난했다. 조선법률가위원회 대변인 명의의 담화를 통해서다. 북한 입장 표명에는 조속한 시신 확보가 무산된 데 대한 불만이 그대로 드러난다. 당초 말레이시아 당국이 북한대사관에 심장쇼크에 의한 사망임을 확인하면서 시신을 대사관에 이관해 화장하기로 했다는 통보를 했었는데 이제 와서 왜 딴소리냐는 주장이다.

 

북한이 관영매체까지 내세운 건 강철 말레이시아 주재 북한대사의 문제 제기만으로는 불을 끄기 어렵다는 판단 때문으로 보인다. 강 대사는 사건이 알려진 지 사흘 만인 2월17일을 시작으로 잇달아 기자회견을 열어 부검을 강행한 말레이시아 당국을 비난했다. 그러면서 “김철(김정남의 여권 이름)을 제외한 어떤 다른 이름도 알지 못한다”며 ‘김정남’이란 이름을 아예 입에 담지 않았다. ‘백두혈통’으로 불리는 김일성·김정일 혈족 출생의 비밀이 드러날 수 있는 김정남이란 존재를 함부로 언급할 수 없는 곤혹스러운 입장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하지만 아흐마드 자히드 하미디 말레이시아 부총리는 “사망한 ‘김철’이 김정남이 맞다”고 기자회견을 통해 밝혔다. 말레이시아 당국이 이처럼 분명한 입장을 밝히는 걸 두고 김정남의 신원과 관련해 결정적 정보를 확보하고 있기 때문이란 얘기가 나온다.

 

김정남의 DNA 등 관련 정보를 구체적으로 파악했으니 사망한 인물이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2011년 사망)의 장남인 김정남이라고 확인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여권상 이름이 아닌 실제 신원을 고위 당국자가 언론에 언급하기 어렵다는 게 외교가의 진단이다.

 

이 과정에서 한국이나 미국 등 국제사회의 정보기관이 말레이시아 당국에 김정남 DNA 정보를 제공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한·미를 포함해 북한에 관심 있는 국가의 정보기관들은 김정은과 그 일가, 또는 핵심 권력인물의 DNA 정보를 확보하는 데 심혈을 기울여왔다. 정보 관계자는 “과거 미군이 도피 중이던 이라크 최고지도자 사담 후세인을 체포했을 때 가장 먼저 한 작업이 입속에 면봉을 넣어 DNA를 채취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를 기존에 확보하고 있던 샘플과 대조해 실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육안이나 감이 아닌 과학적 근거를 가지고 판단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DNA는 결정적 역할을 한다는 얘기다.

 

말레이시아 주재 강철 북한대사가 2월20일 쿠알라룸푸르 북한대사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北, 김정남 ‘심장마비死’ 계획 차질

 

점차 꼬여가는 사태에 대한 북한 당국의 당혹감은 곳곳에서 감지된다. 당초 감쪽같은 수법으로 김정남을 ‘심장마비사(死)’로 만들려 했던 계획에 차질이 생긴 때문이란 게 우리 정부 당국의 설명이다. 사태 초기 북한대사관을 내세워 현지 취재기자를 대상으로 적극적 해명과 주장을 내놓는 태도를 보였지만 점차 궁지에 몰리자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관영 조선중앙통신으로 처음 내놓은 공식 반응에서는 허술함까지 드러난다. 조선법률가위원회를 앞세워 사인이 심장마비라고 주장하면서도 “남조선 당국은 이번 사건을 이미 예견하고 있었으며 대본까지 짜놓고 있었다”는 궤변을 내놓았다. 북한이 “사망자가 외교여권 소지자로서 빈 협약에 따라 치외법권 대상이므로 절대로 부검을 할 수 없다”고 주장한 대목을 두고서도 법률단체가 내놓았다고 믿기 어려운 어설픈 대목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빈 협약 29조는 “외교관(the person of diplomatic agent)의 신체는 불가침”이라고 규정하면서도 외교관을 ‘공관장이나 공관의 외교직원’으로 한정하고 있다. 김정남처럼 외교관이 아닌데도 북한이 편의상 외교여권을 발급해 준 경우는 권리를 누리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북한이 이처럼 김정남 시신 확보에 총력을 기울이는 건 그만큼 이번 사건의 조속한 종결을 간절히 바라기 때문이란 분석이다. 말레이시아 당국의 손에 시신이 남겨져 있는 한 여파를 가라앉히기 쉽지 않다는 판단을 했을 것이란 얘기다. 김정남의 아들 한솔을 비롯한 유족에게 시신이 넘겨져도 북한으로선 낭패다. 김한솔이 아버지를 죽인 김정은에 대한 반감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또 하나의 불씨를 남겨두는 꼴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다. 무엇보다 불똥이 김정은에게 튀는 것만큼은 막아야 하는 북한 외교라인은 초비상이 걸렸다. 시신을 확보하지 못한 채 사태가 장기화에 빠질 경우 매우 곤혹스러운 상황이 닥칠 수 있다.

 

법의학 전문가들은 “시신은 죽어서도 말한다”고 강조한다. 그만큼 사망 사건의 진실을 알 수 있는 모든 것이 담겨 있다는 얘기다. 김정남 시신을 둘러싼 북한과 말레이시아의 대립과 주변국의 신경전이 더욱 거칠어질 수밖에 없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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