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와 최순실, 경계선 없는 ‘가족’이었다”
  • 구민주 기자 (mjooo@sisajournal.com)
  • 승인 2017.03.21 13:25
  • 호수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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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 농단 최순실의 의붓조카 조용래씨 밝혀

‘최태민가(家)의 내부고발자’. 최태민의 의붓아들 조순제의 장남이자 최순실의 의붓조카인 조용래씨는 스스로를 이렇게 소개했다. 조씨의 아버지 조순제씨는 최태민의 다섯 번째 부인이자 최순실의 모친인 임선이씨가 최태민과 결혼하기 전에 전남편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다. 홍콩에 거주하던 그는 지난해 10월부터 터진 최순실 의혹에 한동안 무심하려 애썼다. 힘들게 잊은 어릴 적 기억을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러던 중 저녁 뉴스에서 돌아가신 아버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최태민 일가와 박근혜 대통령 간의 관계를 폭로한 일명 ‘조순제 녹취록’이었다. 이를 들은 그는 더 이상 현실을 외면할 수 없었다. 즉시 아버지 녹취록과 어릴 적 기억을 글로 정리해 한국에 들어왔다. 다니던 회사도 그만뒀다.

 

3월15일 시사저널과 만난 조용래씨는 할아버지 최태민과 고모 최순실, 그리고 이들과 가족보다 가까웠던 ‘또 하나의 가족’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기억을 가감 없이 털어놨다. 그는 “최태민·최순실과 박근혜 사이에는 돈이든 생활이든 경계가 없었다”면서 “우리 가족은 박근혜와 밀착해 키운 돈과 권력에 대한 욕망 때문에 해체됐다”고 말했다.

 

국정 농단 최순실의 의붓조카 조용래씨 © 시사저널 이종현

대통령 탄핵 어떤 마음으로 봤나.

 

헌재 판결문을 백 번쯤 읽은 것 같다. ‘탄핵심판은 이념의 문제가 아니다’는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대통령이 끝내 아무 사과도 안 하는 모습은 비극적으로 봤다. ‘진실은 밝혀질 것’이라 했는데 앞으로도 진실을 철저히 숨기겠다는 다짐으로 들렸다. 검찰 조사에서도 진실을 말할 거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아버지가 살아계셨다면 뭐라고 하셨을 것 같나.

 

아버지가 계셨으면 박근혜는 대통령이 절대 못 됐을 거다. 2007년 7월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 당시, 박정희 일가의 온갖 궂은일 다 맡아 했던 자신을 모른다고 부인하던 박근혜 모습을 보고 아버지는 크게 분노했다. 기자회견을 열겠다는 걸 가족들이 뜯어말렸다. 겨우 한나라당에 진정서를 제출하는 것으로 끝냈다. 그때 아버지는 ‘저렇게 아무렇지 않게 거짓말하는 걸 보면 온 국민한테도 거짓말을 일삼을 것’이라며 혀를 찼다.

 

 

어린 시절 박 전 대통령에 대한 기억은.

 

어릴 적 박근혜 영애가 집에 오는 날이면 할머니(임선이)부터 새 저고리를 갖춰 입고 현관 앞에서 허리 숙여 인사했다. 할아버지 최태민 역시 목숨도 내놓을 것처럼 충심이 깊었다. 그녀는 왕이었고 우리 가족은 권력에 복종하는 백성이었다. 그게 집안 분위기였다.

 

 

“매정했던 최태민, 朴 앞에선 ‘사근사근’”

 

할아버지 최태민은 어떤 사람이었나.

 

기억 속 최태민은 늘 자신의 손바닥이나 무릎에 끊임없이 무언가를 쓰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말투는 차갑게 딱딱 끊어지고 매정하기만 했다. 그런데 그런 최태민이 박근혜 앞에서만큼은 말투는 물론 행동 하나하나 그렇게 사근사근할 수 없었다. 그래서 늘 어머니가 ‘정성도 저런 정성이면 닳겠다’고 했었다.

 

 

아버지가 최순실을 ‘남자 최태민’이라고 했는데 무슨 의미인가.

 

고모 최순실은 늘 ‘돈이 생명’이라고 말했던 할머니의 탐욕과 할아버지 최태민의 차갑고 특이한 성격을 모두 갖고 있다. 나쁜 점만 고루 닮았다. 안하무인 태도도 유별났다. 아버지한테도 늘 이거 해 달라 저거 해 달라 끊임없이 일을 시켰다. 그래서 참다 못한 아버지가 주변에서 최순실을 챙겨줄 똑똑한 사람을 찾다가 80년대 말 정윤회를 소개해 준 것이다.

 

 

아버지가 생전에 박근혜·최순실이 닮았다고 했는데 어떤 점을 말하는 건가.

 

자기 마음대로 해야 하는 성격이다. 그리고 애초에 사람을 차갑게 바라보고 자신의 필요에 따라 기능적으로 대한다는 점 등을 말한 거다.

 

 

어린 시절 사진 보면 가족끼리 화목해 보이는 것도 꽤 있다.

 

처음부터 가족관계가 비극적인 건 아니었다. 모두가 가난했을 땐 함께 열심히 살자 으으도 했고, 조금 돈이 생겼을 땐 오히려 더 화목해졌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10·26 사태 이후 엄청난 뭉칫돈이 집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면서 급격히 가족은 깨지고 갈리게 됐다. 그때 아버지가 그 돈 앞에서 철저히 배제됐던 게 지금으로선 천만다행이었다고 생각한다.

 

1974년 가족 나들이에 나선 모습. 앞줄 왼쪽부터 최순실, 조용래, 임선이, 뒷줄 두 사람은 최순천, 김경옥이다. © 조용래 제공

“10·26 이후 들어온 뭉칫돈에 가족 분열”

 

뭉칫돈의 정체는 무엇인가.

 

아버지도 조심스러워 녹취록에 직접적으로 말하진 않았지만 돌려서 말한 흔적은 곳곳에 남아 있다. 결국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개인 금고가 있었고 그 금고에 있던 돈을 사망 후 어린 영애 박근혜가 주변을 지키던 최태민에게 넘겼던 거다. 최태민 입장에선 서 있던 자리에 폭포수 떨어진 것과 다름없었다.

 

 

돈이 많아진 후 고모들과의 교류가 끊긴 건가.

 

박근혜라는 권력에 대한 접근을 차단하고 그로부터 나오는 돈을 독점하기 위해 아버지를 더욱 경계했다. 1998년쯤 아버지 사업이 부도났을 때, 할머니가 딱한 마음에 고모들 몰래 8000만원 정도를 아버지 통장에 넣어준 적 있었다. 그런데 그 이체 내역을 최순실이 보고 돈을 도로 내놓으라고 난리를 쳤던 적 있다.

 

 

할머니 임선이는 계속 만날 수 있었나.

 

할머니를 마지막으로 본 건 1999년이었다. 그 후 몸이 아파 계속 병원에 계시다 돌아가셨다. 그런데 나와 아버지는 돌아가신 사실을 1년이 지나서야 지인을 통해 우연히 알게 됐다. 그들은 말해 주지 않았다. 우스운 건, 할머니 상갓집에 장남과 장손은 없었는데 박근혜가 상복을 입고 3일 내내 그곳을 지키며 울고 있었다는 것 아닌가. 나중에 이 사실을 알고 피가 거꾸로 솟는 줄 알았다.

 

 

이들에 대한 재산환수가 이뤄질 수 있을 거라 보는가.

 

환수 시기와 범위를 특정하는 데 분명 어려움은 있을 것이다. 그래도 전부 환수해야 한다. 일정 시기 이후부터 환수하고 마는 건 결국 그 전의 오랜 부정부패를 눈감아주는 것과 다름없다.

 

 

최순실의 궁극적 목표는 무엇이었을까.

 

돈에 관한 한 누구나 욕심이 있다. 그런데 최순실은 일반적인 수준을 뛰어넘는 욕심을 지닌 사람이다. 이번 사태가 터지지 않았다면 아마 지금도 끊임없이 돈을 위해 물불 안 가리고 있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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