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집권 노리고 개헌 밀어붙이는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
  • 강성운 독일 통신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7.03.22 09:05
  • 호수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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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국가와 연일 갈등 빚는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의 속셈

지난 3월3일, 독일 바덴-뷔르템베르크주의 소도시 가게나우 시청에 전화가 걸려왔다. “가게나우시(市)가 터키 법무부 장관의 참석이 예정된 행사를 취소했기 때문에 시청을 폭파하겠다”는 협박전화였다. 이 때문에 시청은 즉각 폐쇄됐고 안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대피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그러나 시청 어디에서도 폭탄은 발견되지 않았다.

 

정작 ‘폭탄’은 엉뚱한 데서 터졌다. 베키르 보츠닥 터키 법무부 장관이 향후 공식 일정을 모두 취소해 버린 것이다. 그는 독일 연방법무부 장관과의 공식 회동을 일방적으로 취소한 데 이어 터키 언론을 통해 “이번 사건에는 배후가 있으며 독일 정부가 외교적 결례를 저질렀다”며 적대감을 드러냈다. 레제프 에르도안 대통령은 보츠닥이 지핀 불씨에 기름을 부었다. “독일에서 나치즘은 계속되고 있다”며 모욕에 가까운 성명을 발표한 것이다.

 

3월11일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이 이스탄불의 한 행사에서 네덜란드 정부를 향해 “나치의 잔재”라고 비난하고 있다. © AP 연합

에르도안, 개헌으로 2029년까지 집권 노려

 

에르도안 정부가 보낸 개헌 찬성론자들은 연일 유럽 곳곳에서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4월16일 개헌 국민투표를 앞두고 각국 정부와 사전 협의 없이 장관급 인사들이 이민자들을 모아 개헌 찬성을 위한 선거운동을 하고 있다.

 

에르도안은 2010년에 이은 또 한 차례 개헌을 통해 장기집권을 노리고 있다. 이는 지난 2월 터키 의회가 합의한 개헌안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개헌안의 핵심은 의원내각제에서 대통령중심제로의 전환이다. 세부 내용에는 총리직 폐지와 두 개의 부통령직 신설, 대통령에 법원 고위인사 및 대학 총장 인사권한 부여, 국가비상사태 선포 간편화 등이 포함돼 있다. 개헌이 통과될 경우 에르도안은 2029년까지 합법적으로 터키의 수장 노릇을 할 수 있게 된다.

 

에르도안이 이처럼 막가파식 국외 선거전을 벌이는 데 또 다른 이유가 있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영국의 일간지 ‘가디언’은 “에르도안이 이렇게나 기꺼이 유럽을 상대로 독설을 퍼붓는 외교 노선을 택한 것은 터키가 유럽연합(EU) 가입을 포기했다는 표시”라고 분석했다. EU 가입을 위해 개혁을 단행하는 것보다 지금처럼 몰려드는 난민을 대신 받아주는 대가로 협상의 주도권을 쥐고 경제적 지원을 받는 편이 더 이득이라는 계산을 했을 가능성이 크다.

 

에르도안은 지나친 언론 탄압으로 문제가 됐던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2016년 7월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한 후 지금까지 테러를 방지한다는 명목하에 자신에게 비판적인 150여 개 언론사를 폐쇄했고 800여 명의 기자 자격을 박탈했다. 국제앰네스티는 2016년 10월 기준 130여 명의 언론인이 구속 수사를 받고 있다고 발표했다. ‘국경 없는 기자회’는 이미 국가비상령 선포 이전에 터키의 언론 자유도를 180개 조사 대상국 중 151위로 꼽았다. 러시아나 파키스탄보다도 낮은 순위다.

 

 

“에르도안, EU에 유리하게 선거 도왔다”

 

그런데 국외에서 에르도안은 누구보다도 큰 목소리로 언론의 자유를 부르짖는다. 자국의 언론을 탄압하는 지도자가 외국 언론의 자유 혜택을 보려는 것이다. 그 목적은 투표권이 있는 자신의 국외 지지층을 결집시키는 데 있다. 2016년 7월 유럽 터키민주주의자연합(UETD)이 독일 쾰른에서 개최한 에르도안 지지 집회가 대표적인 사례다. 3만여 명이 군집한 이날 집회는 시작 전부터 논쟁을 일으켰다. 에르도안은 이날 모인 군중에게 대형 전광판을 통해 자신의 메시지를 생중계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주 고등법원과 연방헌법재판소 판결에 따라 저지됐다. 이에 에르도안 측은 “민주주의와 법의 수치” “독일의 표현의 자유가 후퇴했다”며 비난의 목소리를 높였다. 터키인들도 이를 근거로 “독일이 우리를 차별한다”는 적대감과 “에르도안만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그릇된 믿음을 굳혔다.

 

네덜란드, 프랑스, 독일 등 주요 선거를 앞둔 유럽 내 국가에선 에르도안의 막가파 전략이 EU 탈퇴와 이슬람 혐오를 부르짖는 유럽 극우파에 호재로 작용할 것이란 관측이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관측이 맞을지 증명할 3월15일 네덜란드 총선에 자연히 전 세계 이목이 집중됐다. 마르크 뤼터 네덜란드 총리는 터키 외무부 장관이 탑승한 항공기의 착륙을 불허하는 등 개헌선거운동을 원천 차단하는 강경한 입장을 고수해 왔다. 이에 에르도안은 네덜란드에 “나치”라고 막말을 하고, 터키 앙카라의 네덜란드 대사관을 폐쇄하는 등 총력을 다해 네덜란드를 ‘외부의 적’으로 만들었다. 이 때문에 개표 직전까지도 극우파인 헤르트 빌더스가 반사 이익을 얻을 것이라는 전망이 많았다.

 

그러나 표심은 달랐다. 뤼터의 자유민주국민당이 예상을 웃도는 선전(善戰)을 하며 제1당의 자리를 지킨 것이다. ‘슈피겔 온라인’은 “그가 외교 위기에 능숙하게 대처함으로써 표심의 이탈을 막았다”고 분석했다. 강경정책은 유지하면서도 에르도안의 ‘막말전’에 응하는 대신, 터키 총리를 만찬에 초대하는 외교적 묘술을 보인 것이다. 독일 공영방송인 1채널은 “에르도안이 뜻하지 않게 EU에 유리한 방향으로 선거를 도왔다”는 논평을 냈다. 에르도안의 막가는 도발을 계기로 유권자들이 극우파에 등을 돌리고 합리파 정치인에게 표를 던졌기 때문이다. 네덜란드 외교 전문가인 르네 쿠페루스는 “네덜란드 총선이 극우파는 불가항력이 아니며 우리가 그들을 막을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고 평했다. 브렉시트와 극우파 돌풍, 난민 정책으로 시름하던 EU는 에르도안 덕분에 오히려 한숨 돌릴 수 있게 됐다.

 

한편 독일 정부는 3월14일 전국에 13개 개헌국민투표소를 설치하게 해 달라는 주독일 터키 대사의 요구를 들어줬다. 네덜란드와는 다른 유화(宥和) 정책을 택한 것이다. 단, 독일 정부는 재외국민투표를 허가하는 대신 독일 내 국외투표의 전 과정이 독일법을 따라야 한다는 조건을 걸었다. 또한 터키 정부에 재외투표 마감일까지 독일을 방문하는 모든 정부 인사의 명단을 제출하도록 요구했다. 만일 명단을 제출하지 않거나 터키 정부가 독일 정부에 대한 모독을 계속할 경우 국외투표 허가를 취소한다는 단서도 달았다. 에르도안의 막가는 개헌선거운동에 고삐를 채우려는 시도다. 과연 터키 에르도안 측에서 독일이 내민 손을 순순히 잡고 합의를 이행할지, 아니면 독일이 제시한 제재들이 오히려 더 큰 분열을 낳게 될지 아직은 불투명한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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