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개인의 행복감인가, 시민으로서의 행복감인가
  • 남인숙 작가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7.03.24 11:01
  • 호수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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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진국의 중산층으로 태어나는 게 나을까요, 후진국의 부유층으로 태어나는 게 나을까요?” 한 모임에서 누군가가 이 질문을 던졌을 때 ‘후진국의 부유층’ 쪽으로 몰표가 나왔다. 이유는 간단했다. 빈부격차가 큰 후진국들의 부유층이 누리는 삶의 질은 상상초월이라는 것이다. 개인의 삶으로 따지자면, 국가라는 추상적인 소속집단보다 직접적인 혜택을 받을 수 있는 부와 권력 쪽이 더 유용하다는 데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었다. 필자 역시 크게 다르지 않은 의견이었다. 선진국이라는 게 모든 구성원들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해 주는 국가 시스템을 의미한다면, 그런 것들이 굳이 필요하지 않은 이들에게 좋을 일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난 3월10일, 이런 논리에 어느 정도 수정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게 한 중대한 사건이 벌어졌다. 헌정 사상 처음으로 헌재에서 대통령 탄핵이 인용된 것이다. 민주주의 역사가 고작 수십 년밖에 안 되는 나라에서 더할 나위 없이 품위 있는 방식으로 최고권력자를 끌어내렸다. 민주주의는 백성들의 피를 먹고 자란다는 오랜 명제를 뒤집을 수 있는 좋은 선례를 보여주었다. 세계 민주주의 역사에 남을 이 장면을 지켜본 이후, 필자는 앞서 언급한 ‘후진국 부유층’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헌법재판소가 만장일치로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을 인용한 3월10일 오전 서울 재동 헌법재판소 인근에 모인 시민들이 환호하며 기뻐하고 있다. ⓒ 시사저널 최준필

성숙하고 자랑스러운 사회의 일원으로 사는 기분이라는 게 어떠한 것인지 시뮬레이션해 본 심정이랄까. 그날 이후 ‘시대적 우울’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는 지난겨울의 어두운 감정이 물러갔고, 무례한 사람들과 맞닥뜨릴 때의 적대감도 좀 수그러들었다. 일도 손에 더 잘 잡히고 동기부여도 잘되었다. ‘나’라는 개인은 더 부유해지거나 상황이 좋아지지 않았는데도, 더 나은 삶을 살게 되더라는 말이다.

 

이번에는 입장을 바꿔서 상상해 보았다. 구성원에 대한 존중, 사회적 신뢰, 정의가 없는 후진국에서 부자로 사는 기분 말이다. 아무리 하고 싶은 것을 다 하고 살 수 있어도, 힘 있는 자들의 전횡을 방관하거나 적극적으로 동조할 수밖에 없는 사회라면 세상이 먹빛으로 보일 것 같다. 절망이 기조가 되어 있는 사회에서 나만 행복하기란 생각만큼 쉽지 않은 일일지도 모른다. 거대한 사회를 이룰 수 있었기에 진화의 승자가 될 수 있었던 인간은 사회 속의 존재로 안정됐을 때에만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진화론자들의 설명이 설득력 있어 보인다. 물론 선진국이라고 해서 모든 것이 만족스럽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상식이 통하는 사회에 사는 선진국 중산층으로서의 삶이, 다수의 불행과 부조리를 외면해야만 행복할 수 있는 후진국 부자로서의 삶보다 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마약과 갱으로 유명한 어느 남미 국가 출신의 지인이 있다. 그는 태어나서 돈 때문에 아쉬워 본 적이 없는 그 나라의 소위 ‘금수저’다. 넓은 수영장과 정원이 딸린 저택에 살고 있는 그이지만, 안전 문제 때문에 단 한 번도 그 집 대문 밖을 혼자서 나가 본 적이 없다고 한다. 오늘도 봄바람에 홀려 산책을 하고 들어온 필자는 문득 이거 참 행복하다 싶었다. 아직 갈 길이 멀지만 적어도 산책할 행복 정도는 느낄 수 있는 이 나라에서, 중산층인 것만으로도 더 행복할 날이 오기를 간절히 기대해 본다. 

 

● 외부 필자의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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