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문화]정직한 허무주의자 에밀 시오랑
  • 파리·高宗錫 편집위원 ()
  • 승인 1997.12.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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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에세이스트 시오랑, <수첩 1957~1972> 남기고 타계
재작년 6월 에세이스트 에밀 미셸 시오랑이 여든네 살에 세상을 떠났을 때, 이를 보도한 국내 언론은 하나도 없었다. 단편적으로나마 시오랑의 책이 국내에 이미 번역되어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좀 뜻밖의 일이다. 사실 문필가의 죽음에 유난히 호들갑을 떠는 프랑스 언론조차 그의 죽음을 차분하게 다루었다. 그가 동시대의 누구 못지 않게 아름다운 프랑스어를 구사한 문인이었는데도 말이다.

루마니아 출신 프랑스 문인이라는 공통점을 시오랑과 나누고 있었고, 생전에 그와 가장 가깝게 지내다 그보다 한 해 전에 타계한 극작가 외젠 이오네스코의 죽음에 프랑스 신문·잡지 들이 여러 쪽을 할애했던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자기 죽음에 대한 이런 상대적 무관심을 저 세상의 당사자는 내심 기뻐했을지도 모른다. 세상에 알려지는 것, 인구에 회자되는 것만큼 생전의 그가 불편해 한 것은 없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것은 기다란 생을 언어의 가장 좁은 의미에서 ‘주변인’으로 보냈던 사람에게는 썩 어울리는 일이기도 했다.

시오랑이 죽은 뒤 그의 단칸 아파트를 돌아보던 평론가 시몬 부에는 그의 책상 서랍에서 고인이 57년부터 72년까지 일상의 짤막한 단상들을 기록해 놓은 수첩 서른 네 권을 발견했다. 그 수첩의 내용물은 염세와 회의의 극단을 가장 빛나는 프랑스어로 구축한 시오랑 글쓰기의 우수리들이었다.

부에는 그것을 <수첩 1957∼1972>라는 제목으로 편집해 11월 초 갈리마르 출판사에서 내놓았다. 생전의 시오랑은 갈리마르 출판사의 전속 문인이었다. <존재의 유혹> <역사와 유토피아> <시간의 추락> <찬미 연습> 등 10여 권에 이르는 그의 모든 책이 갈리마르에서 나왔다.

천 페이지가 넘는 <수첩 1957∼1972>는 생전에 출간된 그의 책들이 그랬듯 허무주의(생전의 시오랑은 ‘허무주의’라는 말이 정치사적으로 러시아 제정 말기의 테러리스트를 뜻한다는 점에서 자신은 허무주의자가 아니라고 말했다. 그가 자신을 규정한 말은 ‘회의주의자’였다)의 끝간 데를 극도의 정직함에 담아 보여주고 있다.

그가 정직하다는 것은 세상의 위선을 공격하면서도, 스스로 결코 위악으로 치닫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는 자신을 포함한 인간이 악한 존재라는 것을 과장된 제스처 없이 담담하게 말한다. 그러한 인간을 악으로부터 구제할 방법은 없으며, 더 나아가 삶이나 역사에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말할 때도 그는 비장으로 흐르지 않는다. 그의 비관주의가 걸치고 있는 옷은 때때로 비장이 아니라 익살이다.

루마니아어와 헝가리어와 독일어가 함께 쓰이던 루마니아의 한 시골(당시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정교회 신부의 아들로 태어나 부쿠레슈티에서 대학을 마치고 프랑스 문화원의 장학금을 얻어 파리로 온 스물세 살 이후 그는 한 번도 조국을 찾지 않았다. 그가 루마니아에서 출간한 책 두 권은 종교를 조롱하고 모독해 부모의 마음을 찢어놓았다.

“내게, 글쓰기란 복수이다”

30대의 어느날 노르망디 디에프의 한 여관 방에서 말라르메의 시를 루마니아어로 번역하다가 문득 아무도 읽어줄 사람 없는 자신의 모국어에 절망한 뒤로 그는 오직 프랑스어로만 글을 썼다. 그렇다고 그가 파리 문단의 중심부에 있었던 것은 결코 아니다. 그는 이오네스코나 종교학자 엘리아데 등 루마니아 출신 몇몇 문인들, 그리고 사뮈엘 베케트·앙리 미쇼·파울 첼란 등 역시 외국 출신 문인들과, 그의 문장에 홀린 갈리마르 출판사의 편집자 몇몇 외에는 파리 문단에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독일 점령기에 파리 몽파르나스의 한 카페에서 웨이터로 일하며 그 카페에 자주 들르던 사르트르를 먼 발치에서 몇번 보았을 뿐이고, 프랑스어로 나온 그의 첫 책 <해체 개요>를 처음 만난 카뮈가 혹평하자 그 뒤로 한 번도 그를 만나지 않았다. 그가 젊은 시절 한때 공짜 위스키를 마시기 위해 부지런히 드나들었던 파리 사교계에서 그는 허영심 많은 부인들에게 늘상 ‘시오랑 씨’가 아니라 ‘이오네스코 씨의 친구’로 소개되었는데, 그것은 그에게 약간의 수모와 커다란 편안함을 주었다.
박사 학위를 받는다는 구실로 파리로 온 그는 소르본에 등록만 해놓은 채 프랑스 전국을 자전거로 일주하며 한 해를 보냈고, 학위는 일찌감치 포기하고 마흔 살이 되도록 소르본에 등록을 경신하며 학생 식당에서 끼니를 해결했다. 대학 당국이 그의 나이가 많다고 재등록을 거부했을 때야, 그는 오래도록 머무르던 여인숙을 나와서, 라틴 구역에 값싼 단칸 아파트를 마련했다. 루마니아에서 대학을 졸업한 직후 고등학교 철학 교사로 1년 근무하고 카페 웨이터로 잠시 아르바이트를 한 것을 빼고 그는 일생 동안 아무런 직업도 갖지 않았다.

일종의 ‘정신 치료’로서 그의 글쓰기는 에세이와 아포리즘이었고, 만년의 그가 니체를 뛰어넘는 ‘아포리즘의 제왕’이라는 찬사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그가 실제로 책을 써서 버는 돈은 보잘것없었기 때문에, 그의 생활은 단순·소박·검소했다.

그 가난 속의 삶에서 그가 틈틈이 기록한 <수첩1957∼1972> 위에 우리는 어떤 한국 문인들의 얼굴을 겹쳐놓을 수도 있다. 예컨대 그는 65년 어느날 이청준의 목소리로 말한다. “내게, 글쓰기란 복수하는 것이다. 세계에 대해서 복수하고 나 자신에 대해서 복수하는 것. 내 글의 거의 전부는 이런 복수심의 산물이다.” 이런 구절도 같은 맥락이다. “내가 문필가의 길로 잘못 든 것은 살인이나 자살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무능력, 이 비겁함이 나를 필경쟁이로 만들었다.”

한편 그가 끝내 감행하지 못한 자살은 역설적으로 그에게는 하나의 ‘보험’이었다. 삶이 아무리 무의미한 것일지라도, 그것이 또한 추문에 불과한 것일지라도 언제라도 벗어날 방법이 있으므로, 즉 아무 때라도 마음만 먹으면 자살할 수 있으므로, 그 삶은 그에게 견딜 만했다.

그런가 하면 62년 어느날에는 장정일의 목소리로 말한다. “내가 스무 살도 되기 전에 알아 버렸다고 자부할 수 있는 것 하나는 아이를 낳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결혼, 가족, 더 나아가 모든 사회 규범에 대한 내 두려움은 거기서 온다. 자기 자신의 결함을 자식에게 전달하는 것, 그래서 자신이 겪었던 시련을, 어쩌면 더 지독한 시련을 자식에게 강요하는 것은 범죄 행위이다. 내 불행과 내 고통을 이어받을 사람을 낳는 것에 동의할 수 없다. 부모들이란 모두 무책임한 자들이거나 살인자들이다.”

“나는 절대적인 낙오자”

58년의 한 기록에는 후진국 지식인의 비애를 토로하는 청년 김 현의 목소리가 겹친다. “이 모든 행복한 인간들, 배부른 인간들, 프랑스인들, 영국인들… 아, 그러나 나는 여기에 속해 있지 않다. 내 뒤에는 수 세기 동안의 끊임 없는 불행이 있다. 행복은 빈에서 끝난다. 그 너머는 저주뿐이다.”

그의 상표가 되어 버린 염세주의에 대한 이런 구절도 있다. ‘타인이란, 내 취향에 맞지 않는다. 나는 내가 나를 혐오하는 것만큼 남을 혐오한다. 자신을 혐오하는 자는 아무도 사랑할 수 없다.’‘혼자 있을 때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을지라도, 시간을 낭비한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그러나 남과 함께 있으면 거의 언제나 시간을 낭비하게 된다.’

고립과 가난과 (상대적) 무명으로 일관된 자신의 삶에 대한 그의 평가는 어떨까? ‘만약에 절대적인 낙오자라는 것이 있다면, 바로 나다. 나는 그 말을 모든 자부심을 가지고 말할 수 있다.’ 그가 낙오자라는 바로 그 사실이 그에게는 자기가 파리에 사는 이유가 된다. ‘어차피 삶을 망칠 바에야, 파리에서 망치는 것이 제일 낫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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