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 위기 ‘중매’로 남과 북 만난다
  • 변창섭 기자 ()
  • 승인 1994.06.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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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정상회담은 미ㆍ북한 타협의 부산물… 최우선 의제는 사찰 통한 핵 투명성 보장

북한 핵 문제를 둘러싼 한반도 정세가 남북 정상회담 개최 가능성과 맞물리면서 큰 변화를 겪고 있다. 엊그제까지만 해도 미국에 의한 제재 위기를 맞았던 북한은, 한국에게는 정상회담을, 미국에게는 ‘핵개발 동결’ 카드를 던짐으로써 단숨에 위기 국면에서 벗어났다. 당초 큰 기대를 모으지 못한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의 북한 핵 중재는, 그 전모가 하나둘씩 밝혀지면서 미ㆍ북한 관계와 한ㆍ미 관계, 나아가 남북한 관계에 질적인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엄청난 결과를 가져왔다. 특히 가터 방북을 계기로 미국은 사실상 북한의 과거 핵 활동을 묵인하는 파키스탄식 해법(≪시사저널≫ 제242호 커버 스토리 참조)을 추구하고 있음이 확인되면서 한ㆍ미 공조체제에도 균열이 생길 조짐이다.

 카터가 가져온 가장 큰 낭보는 김일성 주석의 남북 정상회담 전격 제의다. 경수로 지원 문제나 북한에 대한 ‘핵 선제 사용 금지(NSA : Negative Security Assurance)' 문제는 이미 미국과 북한측 대표들이 1년 넘게 핵 협상을 벌여오면서 걸렀던 얘기들이다. 다만 이번에는 김주석이 이 문제를 더 명시적으로 꺼낸 점이 과거와 다를 뿐이다.

김일성 주석이 하루아침에 태도를 바꾼 까닭은?
 김주서이 제안한 남북 정상회담은 과거와 달리 아무런 전제 조건이 없다는 점에서 어느 때보다 성사될 가능성이 크다. 카터는 김주석이 “더 이상 지연되는 일이 없이 金泳三 대통령을 만나기를 희망했다”라고 전했다. 또 만남의 절차와 관련해서도 ‘대통령 이하 관료들의 개입없이 정상회담이 즉각 이뤄졌으면 한다’고 밝혔다고 전했다. 이같은 제의에 김대통령 역시 “언제 어디서나 아무 조건 없이 만나고 싶다”며 김주석의 제의를 즉각 수락한 상태다. 따라서 李洪力 통일 부총리가 북측에 제안한 정상회담을 위한 예비 실무회담이 28일 판문점에서 순조롭게 진행된다면, 가까운 시일 안에 남북 정상이 분단 49년 만에 처음으로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특히 협상 수단으로서 정상회담을 갖는 엄청난 효험을 감안할 때 김주석의 제의는 성사 여부에 관계 없이 그 자체가 이미 초대형 뉴스다. 아무리 실무 선에서 풀기 어려운 문제라도 일단 정상이 만나면 정치적 방식으로 풀 길이 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70년대 남북 대화가 시작된 이후 별 다른 친척이 없던 상황에서 남북 정상회담이 차지하는 의미는 대단히 클 수밖에 없다. 정상회담이 실현된다면 결과에 따라서는 한반도 냉전 종식은 물론 남북 관계에 획을 그을 만한 결실이 나올 수도 있다. 특히 남북한이 핵 현안에 관해 합의할 경우 ‘북한 특수’와 같은 본격적인 경제 협력 시대가 열릴 것도 기대할 만하다.

 한국은 81년에 全斗煥 전 대통령이 정상회담을 제안한 것을 시작으로 지난 2월 김영삼 대통령의 제안에 이르기까지 13년에 걸쳐 여섯 차례의 제안을 했으나 아무런 반응을 얻지 못했다. 그 때문에 김주석이 카터를 통해 ‘더 이상 지체하지 말고 만나자’는 전갈을 김대통령에게 전해온 진의와 배경에 관심이 대단하다. 왜 김주석은 지난 십수 년간 우리측이 여섯 차례나 제안한 정상회담에 대해 코방귀도 뀌지 않다가 하루아침에 태도를 바꾸었는가. 현재의 제재 국면을 벗어나기 위한 지연술인가, 아니면 진정 남북 문제를 풀기 위한 것인가.

미국은 사실상 북한의 핵 보유 묵인
 김주석의 정상회담 제의 배경을 두고 여러 가지 추측들이 나오고 있다. 일단 제재를 피하기 위해서라는 관측도 있고, 미ㆍ북한 관계 개선에서 한국을 소회시키지 않으려고 그랬다는 얘기도 있다. 그러나 카터가 북한에서 한 발언, 서울에 온 뒤 발표한 성명과 기자 회견 내용, 워싱턴에 돌아가 그곳 언론과 가진 회견 내용에 따르면 미국과 북한 간에 뭔가 꿍꿍이속이 있지 않겠느냐 하는 강한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다시 말해 미국과 북한 간에 북한 핵 해법에 관해 어떤 타협을 했으리라는 해석이다. 김주석이 그간 핵문제 때문에 남북 대화에 성의를 보이지 않은 점을 고려할 때, 핵문제 해결에 대해 나름대로 낙관했기에 정상회담을 제의했으리라는 분석이다.

 이와 관련해 현재 가장 설득력 있는 분석은, 미국이 북한의 과거 핵 활동 규명을 최우선으로 해결할 과제가 아니라 장기적으로 해결할 과제로 재규정함으로써 사실상 북한의 ‘핵 능력’ 또는 ‘핵 보유’를 묵인했으며, 이같은 결과에 대한 한국측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김주석이 정상회담을 ‘선물’로 던졌을 것이라는 해석이다.

 이름을 절대로 밝히지 말아 달라는 한 북한 핵 전문가는 “결과적으로 김주석이 미국의 ‘과거 묵인’에 대한 한국의 초강경 반발을 무마할 목적으로 정상회담이라는 미끼를 던졌다”라고 분석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북한의 핵무기 보유 저지를 위해 총력을 펼쳐온 한국측 외교안보팀은 책임을 회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미국은 이미 지난 4월 갈루치 정치군사담당 차관보가 핵대사로 임명된 뒤부터 북한 핵문제를 기존 방식과는 달리 장기적으로 풀어나간다는 정책 기조를 재설정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문제는 한국이다. 한국은 91년 북한과 ‘한반조 비핵화’에 합의한 뒤로 주한미군의 전술핵 철수 등 비핵화를 위해 꾸준히 노력해 왔다. 비핵화에 대한 의지는 김대통령이 “북한이 단 반 개의 핵무기를 가져서도 안된다”라고 강조한 데서도 뚜렷이 나타난다. 한국 정부는 북한도 한국처럼 절대 핵을 보유해서는 안된다는 전제 아래 91년 발효한 한반도 비핵화 선언을 지켜오고 있다. 따라서 만일 미국이 북한의 과거를 묻어두기로 했다면, 이는 한국의 비핵화 노력에 찬물을 끼얹는 처사로 대단히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북한, ‘브라질ㆍ아르헨티나 해결 방식’ 제안할 가능성
 미국이 북한의 ‘과거’를 그다지 문제삼지 않게 된 것은 카터의 방북 결과 지난 19일자 <뉴욕 타임즈>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카터는 김주석이 현재의 핵개발 계획을 동결하는 대가로 미국에 경수로를 지원해 달라고 요구했다고 전했다. 김주석이 꺼낸 ‘핵 동결’ 대상은 97년 완공을 목표로 짓고 있는 2백MW용 흑연가목 원자로와, 빠르면 6개월 후에도 가동될 것으로 보이는 영변의 핵재처리 공장을 말한다. 그러나 이 대상들은 북한 핵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투명성을 보장하는 것일 뿐이지 이미 핵연료봉을 모두 교체해 플루토늄을 추출했는지 여부를 알 수 없게 된 영변의 5MW 원자로의 ‘과거’는 아니다.

 <뉴욕 타임즈>는 미국 관리의 말을 인용해 김주석이 약속한 ‘핵개발 동결’을 검증하기 위해 △영변 원자로에 연료봉을 장착하지 말 것 △최근 원자로에서 꺼낸 폐연료를 재처리하지 말 것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파견한 사찰단원 중 평양에 남아 있는 2명에게 체류를 허용할 것을 북한측에 요구했다. 이 요구를 북한이 들어주면 미ㆍ북한 3단계 회담도 개최하겠다는 방침이다.

 세 가지 전제 조건 어디에도 북한이 이 원자로에서 과거에 플루토늄을 추출했는지 여부를 묻겠다는 조항이나 또는 북한이 신고하지 않은 두 군데 핵시설에 대해 사찰하겠다는 요구는 나와 있지 않다. 2개 미신고 시설은 한국과 미국이 북한의 과거 핵활동을 규명하기 위해 바로 엊그제까지도 특별 사찰을 요구한 곳이기도 하다. 여러 정황으로 보아 미국과 북한의 3단계 회담은 북한의 ‘과거’보다는 ‘현재와 미래’부분에 중점을 두고 토의하는 자리가 될 것이 분명하다.

 북한은 지난해 4월 우리측의 정상회담 제의와 관련해 회담의 주의제로 ‘전민족 대단결 10대 강령’ 채택을 주장했다. 거기에는 주한미군 철수 등 우리측이 받아들이기 곤란한 내용도 많았다.
 주한미국 철수가 포함된 10대 강령과 함께 북한이 들고 나올 의제로는 휴전협정의 평화협정 대체, 고려연방제 통일방안 등도 생각할 수 있다. 특히 경협의 경우 북한은 무엇보다 현재의 흑연감속 원자로를 경수로로 교체하는 데 드는 비용을 지원해 달라고 할 가능성이 크다. 1GeW(기가와트)급 경수로 원자로 1기를 짓는 데 10억달러나 들기 때문에 북한으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 미국의 경우 대외지원 창구인 수출입 은행은 상대국의 외채 상환 능력을 기준으로 차관을 제공하고 있다. 따라서 북한의 대외 신용도가 낮고 외채도 50억달러에 이르고 있으므로 미국측의 자금 지원은 쉽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남북한이 어떤 의제를 최우선 과제로 다루느냐 하는 시각 차가 상존한다는 점이다.

한국, 비핵화선언 재검토하는 대가 치를 수도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최우선 의제는 아무래도 핵문제가 될 것이라는 점이다. 그럴 경우 한국측은 북한에 대해 한반도 비핵화를 완전히 실천하기 위해 남북 상호 사찰을 주장할 것이 분명하다. 특히 한국측이 북한의 과거(핵 보유)를 파헤치려 들 경우 북한측은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의 해결 방식을 전격 제안할 가능성도 생각할 수 있다. 70년대에 지역 패권 경쟁을 벌이며 서로 원자력 개발 경쟁에 나섰던 브라질과 아르헨티나는 92년 상호 핵사찰을 통해 국제적인 핵안전성을 보장받으며 불편한 관계를 해소했다.

 북한도 이를 원용해 한국과 상호 합의한 핵시설에 대해 상호 사찰 방식을 제안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측은 북한의 핵개발 의혹이 있는 핵시설이면 어느 곳이든 사찰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는 방침이어서 어떤 합의가 나올지 의문이다.

 미국이 북한의 ‘과거 규명’을 당면 과제 아닌 장기 과제로 바꾸었을 경우 한국 정부가 택할 수 있는 대안은 세 가지다. 첫째, 한반도 비핵화의 완전한 실천을 위해 북한에 끊임없이 압력을 가하는 것이다. 둘째, 북한의 핵 동결 약속을 받아들이고, 미국처럼 북한의 과거 문제를 장기 과제로 설정한 채 우선은 남북 관계 개선에 총력을 기울이는 것이다. 셋째, 북한의 과거를 규명하기 위해 현재와 같은 유엔 차원의 제재 수단을 동원하는 것이다.
 이 가운데 가장 현실적인 대안은 두번째 것이다. 냉전이 끝난 후 지구상에 유일한 냉전 지역으로 남아 있는 한반도에서 긴장을 풀려면 북한을 우리 쪽으로 끌어들이는 참여정책(engagement policy)이 현실적인 대안인 것이다. 북한이 핵 보유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마당에 언제까지나 이를 이유로 남북 관계의 진전을 가로막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바로 이 점은 남북 정상회담이 열리기 전에는 한국 외교팀이 입장을 정리해야 할 과제이다.

 현재 한국 정부는 우선 정상회담을 성사시키기 위해 서두르고 있다는 인상이다. 이부총리가 정상회담을 위해 예비 실무회담을 제안하면서 의제는 뺀 채 우선 시간과 장소부터 정하자고 한 것이 단적인 예이다. 이는 우선 만남 자체를 성사시키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미국은 이제 북한 핵의 과거에 대한 해결 과제를 한국 정부에 넘겼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미국은 남북 정상회담이 미ㆍ북한 3단계 회담과 별도로 진행되는 것을 반대할 이유가 없게 됐다. 미국은 과거 같으면 핵문제가 풀리지 않은 상태에서 남북 정상회담이 열리는 것을 반대했을 것이다. 지난해 한국 정부가 일체의 남북 대화를 핵문제 해결과 연계한 것은 미국의 압력 떄문이었다. 이제 북한과 과거사 문제를 매듭지은 미국은 한국 정부가 이 문제에 관해 북한과 조율하기를 바라고 있다.

 한국 정부는 여전히 대외적으로 북한이 미신고 핵시설 두곳에 대해 특별 사찰을 받아야 한다는 정책을 유지하고 있다. 주변국인 일본도 마찬가지다. 한국 정부는 정상회담을 성사시키려고 비핵화 선언을 포함한 기존 핵정책을 재검토하는 대가를 치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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